전체 글
-
8. 미스 나 대 미스 나지수 이야기/이상한 사춘기 2023. 2. 21. 23:49
1993년 7월 4일 덕망중학교 운동장. 4교시 체육 시간. 기말고사 실기 성적에 반영할 체력 측정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철봉대 앞에 모여 있는 6반 아이들.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팔 굽혀 펴기를 하는 녀석, 두런두런 잡담을 나누는 녀석, 모래밭 귀퉁이에서 씨름을 하는 녀석, 철봉대 근처 축구 골대 부근에서 줄넘기 측정을 받고 있는 9반 여학생들을 훔쳐보는 녀석 등등.. 제각각 무질서하게 따로 놀고 있는 아이들을 소 방목하듯 내버려 두고 턱걸이 측정에 여념 없는 만만디 체육선생님이, 검정 선글라스 뒤에 감춘 게슴츠레한 눈으로 명단을 들여다 보고 있다. (어젯밤 과하게 마신 술이 아직 덜 깬 모양이다.) 김필용, 정혁태, 윤봉남, 나지수, 이장범. 앞으로 나와! `큰일인데.. 턱걸이는 한 개도 못하는 걸..
-
24. 애착을 거니는 고독 : 집착과 미련(未練) 사이 어디쯤 3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3. 2. 18. 03:43
그런 류의 황당함에는 어느덧 많이 익숙해져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더라. 그 피치 못할 사정이란 걸 파악할 길 없는 막막함이 헛수고의 허탈함과 "개무시가 주는 소외감"을 끝없이 솟아나게 하였지만.. 그렇게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잔인한 애잔함의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비틀거리면서, 초췌해진 쓸쓸함을 펑펑 쏟았지만.. 시네마 콤플렉스는 부분 공사 기간이라 걸린 영화들 가운데 몇 편만이 순차적으로 상영 중이었지.. 어수선한 게, 설사 너를 만났어도 거기서 영화 볼 생각은 사라졌을 듯. 재밌을 것 같은 영화도 별로 없었고.. 후덥지근한 한낮의 강렬한 볕이, 물러가지 않으려 버티는 늦여름의 앙탈을 제대로 보여 준 날이었지만, 가슴속은 꽤나 서늘한 것이, 이날따라 그 많던 땀마저 인색하게 흐르더라. 작열하는 태양..
-
6. 과거라 불리는 평행우주월광 프로젝트 (판타지) 2023. 2. 16. 18:06
그럼 이번엔, "자네가 살아온 과거"의 어느 한 시점으로 이동해서 음탕귀들이 자네의 불순한 상념에 어떻게 개입하여 저열한 난동을 부려왔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볼까. 다시 눈을 감게. 당신 덕분에 드디어 정통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겠군요. 가까운 과거에서부터 자네 생의 초기에 이르기까지, 자네가 현재의 지경에 이르도록, 집요하게 작용해 온 에프엠의 종적인 전개 궤도를 역추적하여, 급속한 오염의 치명적인 원인을 제공한 몇몇 사건 시공들 중 하나로 이동해 보겠네. 이 또한, 자네 삶의 4차원적 궤적을 방향타 삼아 평행우주를 찾아 나서는 여행이니 만큼, 자네가 경험한 "상상 미래계"로의 이동과 별반 차이가 없다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눈 감기를 주저하자 친구는, 상준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여유를 되찾을..
-
8. 군인들Letters to D.J. (지수 외전)/FRIDAY THE 13TH 2023. 2. 14. 15:53
Another stories of Jisoos in parallel universes : 2. Friday the 13th (원본) (8) 명색이 중대장실인데 전기도 안 들어오는지 (당연히 안 들어올 것 같긴 합니다) 몹시 어두컴컴하였습니다. 먹구름 같은 것의 기습 때문이기도 했지만 창문이 있던 자리를 여러 개의 판자들이 막고 있어서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창문뿐 아니라 사방 이곳저곳이 부서져 급하게 수리한 흔적들이 너저분한 상태로 눈에 띄었습니다. 언뜻 거지나 양아치 소굴과 다를 바 없어 보였습니다. 잊을만하면 여기가 꿈계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으스스한 위화감들이 꼬리를 물고 튀어나옵니다. 뒤로 곧 넘어갈 것처럼 위태롭게 기울어진 겉모..
-
23. 미완(未完)을 거니는 고독 : 시를 아는 척 3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3. 2. 13. 06:04
쓰려고 해도 손을 찾을 수 없다. 시간의 날카로운 이빨에 뜯겨 만신창이 된, 불쌍한 손이 어디 갔을까. 써야 할 손이 보이지 않으니, 구김살 한 점 없는 고운 그대를 만질 수가 없잖아. 그대를 안을 방법을 찾는 수밖에.. 시 한 편을 써서 십만 원이 생긴다면 걱정이 없어질까. 십 행짜리 시를 쓰면, 한 행이 만 원어치. 운 좋게 길에서 만 원을 주우면, 마지막 한 행의 고통은 더는 셈인가. 딱 만 원만큼의 향락을 즐긴 후라면 심각하지 않게 꽃을 바라볼 수 있으려나. 그래야 그대는 나를 원하겠지. 왜 하필 꽃인가 따지기 위해 만 원의 기약 없는 한 행을 기어이 채워 버리면, 나에게 올 그대는 사라져 세상 어디에도 없겠지. 젊은이가 시를 쓰면 머리가 한움큼씩 빠진다. 조급한 관념들이 다투어 두피를 뚫고 나와..
-
5. 악화일로 2월광 프로젝트 (판타지) 2023. 2. 11. 01:05
우리가 안타깝게 여기는 것도, 이들 덜 자란 아동과 청소년들이 검은 섭리의 고도 전략인 "사회 파국의 복잡성 시나리오" (파멸의 우회로와 지름길 외엔 선택의 폭을 불허하는 딜레마, 섣부른 정신 분석이 주도하는 "무의식의 왜곡", 심리적 쾌감을 야기하는 "패러독스 메커니즘" 등등..)에 감염되어, 내면의 창조를 스스로 일궈낼 잠재 역량이 채 다듬어지기도 전에 (폭력이 구동하는) 직선적 세계관의 소모적인 구성원으로 굳어져 버린다는 점이야. "음란함이 충만한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한 에프엠의 도구로서, 이들은 창조의 껍데기에 집착하는 - 편집증으로 무장한 - 엘리트를 뽑아낼 "우매한 매트릭스"가 되고 있다는 얘기지. 개성을 외치고 그것에 경도되지만 결국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몰개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작..
-
7. 삼청 교육대Letters to D.J. (지수 외전)/FRIDAY THE 13TH 2023. 2. 7. 16:06
Another stories of Jisoos in parallel universes : 2. Friday the 13th (원본) (7) 먹구름이라기엔 너무도 생경한 저것이 먹구름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공중의 나뭇잎들이 무엇인가에 부딪혀 후드득후드득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장대 같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립니다. 저것이 뱉어내는 액체가, 과연 보통의 빗물일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일단 시커먼 소나기가 아니라서 다행이라 해야 할지.. 교복이 금방 축축하게 젖어 드는 걸로 봐서 그리고 머리와 피부에 닿는 익숙한 느낌으로 봐서 비라는 걸 의심할 근거가 당장은 희박하지만, 언제 치명적 무기로 돌변할지 몰라 꺼림칙하기 그지없습니다. 다만 쫓아오..
-
22. 애착을 거니는 고독 : 집착과 미련(未練) 사이 어디쯤 2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3. 2. 7. 13:46
불과 수년 전의 멀쩡하던 열정이 실종되었다는 것. 생각하면 참 신기한 일이다. 우리의 마인드가 예전과는 사뭇 달라져 있다는 것. 자연의 법칙처럼 당연한 건가. 열정에 대한 무기력을 심신의 노화인 양 경험한다는 자체가 서글프게 느껴진다. 쥐뿔 가진 게 없어도 열정만 있으면 "살아있음"은 증명되지만, 아무리 가진 게 많아도 열정이 사라지면 사라진 만큼 가까워지는 것은 죽음. 하물며 가진 것도 없는 데다 열정마저 소진되었다면,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리. 살아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워지겠지. 열정이란 개념에 도덕의 향취를 첨가하고 싶진 않아. 열정은 그저 열정일 뿐.. 백주 대로에 창피한 줄 모르고 흘레 붙은 암수 똥개들의 열정도 열정은 열정이지. 보잘것없는 비루한 열정이라도 호기롭게 시도할 수 있다면 아마 그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