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 이야기/이상한 사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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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이상한 누나지수 이야기/이상한 사춘기 2023. 5. 19. 18:57
'얘가 어찌 된 일이야. 9시가 다 되었는데 들어올 생각을 않네?'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유모는 걱정이 되어 밀린 설거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평소에 거짓말을 하지 않고 어른과의 약속은 결코 어긴 적 없는 아이라 일찍 들어오겠단 얘기만 철석같이 믿고 - 몸이 두 개라도 모자를 만치 몹시 분주하단 핑계로 - 윗선에 보고하지 않은 것이, 이제 와서 뼈저리게 후회되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2차로 마련된 응접실 술자리에서 저마다 취기가 돌아 흥겹게 이야기꽃을 피우며 양주잔을 돌리고 있는, 지수의 아버지와 그 형제들. 안방에서는, 그들의 부인들이 따로이 모여 맥주 파티를 위한 한상을 거하게 차려놓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위태롭게 유지하는 가운데 자질구레한 잡담들이 활발히 뛰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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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불장난지수 이야기/이상한 사춘기 2023. 5. 5. 11:29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내가 이런 지옥에 떨어진 걸까. 차라리 옥상에서 뛰어내려 버릴까..' 지수 하는 짓이 답답해 미치겠다는 듯 연거푸 두 잔을 들이켜는 민호. 인마! 나 술 취하면 무섭다!? 여기서 확 던져 버리는 수가 있어! 최소한 맥주 한 병 다 까기 전엔 여기서 걸어 내려갈 꿈도 꾸지 마! 알았어? 담배연기만 푸우푸우 공중으로 뿜어대고 있던 철용이 한 마디 거든다. 쟤, 술 먹고 꼬장부리기 시작하면 나도 감당 못 한다. 미스 나, 담배는 피울 줄 알아? 한 번도 안 펴 봤어. 그럼, 술은 놔두고 이거나 한번 빨아 봐라. 자신이 피우던 담배를 지수의 코앞에 들이민다. 이거 피우면 술 안 마셔도 돼? 너 하는 거 봐서.. 어휴, 저 여우 같은 새끼.. 또 통빡 굴리네. 국민학교 때 호기심으로 제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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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한배를 타다지수 이야기/이상한 사춘기 2023. 4. 7. 13:31
미스 나, 괜찮냐? 신축 중인 연립주택 건물과 마주 보고 있는 그 문제의 상가 벽면에 등을 기대고 지수는, 여러 번 한숨을 쉬며 놀란 위장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사내 자슥이 그리 비위가 약해 빠져서 어따 쓰겠냐. `나보고 사내 자식이라고? 철용이 녀석, 약 먹었나..' 노랗던 낯빛이 창백함으로 바뀌었으나 혈색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너두 인제 알 거 다 아는 나이 아니냐. 널 진짜 남자로 만들어 주려고 우리가 여기 데려온 건데, 우리 성의도 모르고.. 너 참 너무한다 야. 미안해, 철용아. 나도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어. 니들 말대로 재밌는 것 같긴 한데 (지수의 거짓말임) 처음 보는 거라 그런지 좀 그렇더라.. 너무 충격적이고.. 솔직히, 더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 철용이 그의 등을 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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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강제 경험지수 이야기/이상한 사춘기 2023. 3. 20. 17:09
지하는 뜻밖에 만화방이었다. 큼직한 만화 포스터가 붙어 있는 문으로 들어서자, 바깥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 내부는 국민학생들부터 어른들에 이르기까지 사람들로 제법 붐비고 있었다. 열대여섯 평 남짓한 공간의 사방 벽에는 만화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고, 중앙에 얼기설기 놓여 있는 낡은 소파들은 독서삼매경(?)에 빠진 사람들의 엉덩이와 하나 된 지 오래였다. (들어온 사람 수에 비해 소파가 크게 부족하여, 바닥에 주저 앉은 아이들로 통로를 지나다니기가 힘들 정도였다.) 낮은 천장에 붙어 껌벅거리는 질 나쁜 형광등 세 개에만 의존하여 만화책에 코를 박고 있는 아이들 대부분의 공통점은 지수처럼 안경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아저씨! 저 왔어요. 장사 잘 되시죠? 철용이구나. 네 눈엔 이게 잘 되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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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은밀한 타락지수 이야기/이상한 사춘기 2023. 3. 7. 17:10
1993년 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 오후 네 시경. 지수의 집. 모처럼 친지들이 모여 집안이 왁자지껄하다. 일 년에 한두 번 모일까 말까 하는 그들은 아버지의 형제들로, 할아버지와 장남인 아버지 덕택에 계열사 사장직을 맡고들 있었다. 밖에서야 업무관계로 아버지와 심심찮은 접촉들을 하고 있지만, 집에서 이렇게 모여 오후 늦게까지 있는 것은 명절이라 해도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회사가 바쁘게 돌아가는 경우, 집 안엔 청탁 내지 아부성 선물들만 산더미처럼 쌓이고 아버지의 지인들을 포함한 외부 방문객들로만 문전성시를 이룰 뿐, 이들을 제외하면 정작 오래 머물러야 할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명절일 때가 적지 않았는데, 아침 일찍 차례를 마치고는 (성묘는, 삼촌들 가운데 그날 가장 여유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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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미스 나 대 미스 나지수 이야기/이상한 사춘기 2023. 2. 21. 23:49
1993년 7월 4일 덕망중학교 운동장. 4교시 체육 시간. 기말고사 실기 성적에 반영할 체력 측정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철봉대 앞에 모여 있는 6반 아이들.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팔 굽혀 펴기를 하는 녀석, 두런두런 잡담을 나누는 녀석, 모래밭 귀퉁이에서 씨름을 하는 녀석, 철봉대 근처 축구 골대 부근에서 줄넘기 측정을 받고 있는 9반 여학생들을 훔쳐보는 녀석 등등.. 제각각 무질서하게 따로 놀고 있는 아이들을 소 방목하듯 내버려 두고 턱걸이 측정에 여념 없는 만만디 체육선생님이, 검정 선글라스 뒤에 감춘 게슴츠레한 눈으로 명단을 들여다 보고 있다. (어젯밤 과하게 마신 술이 아직 덜 깬 모양이다.) 김필용, 정혁태, 윤봉남, 나지수, 이장범. 앞으로 나와! `큰일인데.. 턱걸이는 한 개도 못하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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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엉뚱한 연정(戀情)지수 이야기/이상한 사춘기 2023. 2. 4. 23:43
이때, 구세주(?)의 목소리가 달아나려는 정신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차 철용! 사랑싸움은 보금자리에서나 하시지. 뭐야?! 노랗게 흘러 내리던 세상이 다시금 윤곽을 갖추어, 안경 너머의 반전된 현실을 보여 주었다. 뜻밖에도 건장한 뺀질이 이경택의 손이 철용의 두꺼운 팔목을 잡고 있는 게 아닌가. 운동장에서 축구하다 들어온 그가 마침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야, 이 무식한 놈아. 미스 나 때릴 때가 어딨다구.. 네 한방이면 오늘 초상 치러야 돼. 너 쇠고랑 차고 싶냐? 뭔 일인진 몰라도 그래, 천하의 차철용이 요런 피래미한테 주먹질했다고 하면, 저기 날아다니는 파리 새끼가 웃겠다. 넌 상관할 일 아냐! 이 손 못 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철용의 주먹은 어느새 반쯤 풀어져 있었다. 비록 덩치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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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공상만 너마저지수 이야기/이상한 사춘기 2023. 1. 26. 02:58
점심시간이면 밥을 먹자마자 운동장으로 나가 열심히 공을 차던 그가 (덕분에 점심시간만은 그로부터 해방되어 피폐한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불안한 안식이나마 취할 수 있었는데..) 그날은 밖에 나갈 생각을 않고, 책상 위에 엎드려 쉬고 있는 지수 쪽으로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미스 나, 자니? 미스 나아.. 자?? 징그럽게 밀착해오는 철용에게 일일이 반응하는 것이 두려워, 지수는 자는 척하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때 그의 투박한 손이 아랫도리로 들어와 중요 부위에서 멎었다. 흠칫 놀라 몸을 크게 뒤척였으나, 그의 손이 바지를 힘주어 움켜잡는 바람에 급습하는 저릿한 통증과 난감함으로 숨소리조차 굳어 버리는 긴장감이 이내 지수를 사로잡고 말았다. 다행히 더 큰 고통을 줄 의도는 없는지, 철용이의 손가락 서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