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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 미스 나 대 미스 나
    지수 이야기/이상한 사춘기 2023. 2. 21. 23:49

     

     

     

     

     

     

     

     

     

     

     

     

     

     

     

     

    1993년  7월 4일   덕망중학교 운동장.

     

    4교시 체육 시간.

     

     

     

    기말고사 실기 성적에 반영할 체력 측정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철봉대 앞에 모여 있는 6반 아이들.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팔 굽혀 펴기를 하는 녀석, 두런두런 잡담을 나누는 녀석, 모래밭 귀퉁이에서 씨름을 하는 녀석,

    철봉대 근처 축구 골대 부근에서 줄넘기 측정을 받고 있는 9반 여학생들을 훔쳐보는 녀석 등등..

     

    제각각 무질서하게 따로 놀고 있는 아이들을 소 방목하듯 내버려 두고 턱걸이 측정에 여념 없는

    만만디 체육선생님이, 검정 선글라스 뒤에 감춘 게슴츠레한 눈으로 명단을 들여다 보고 있다.

    (어젯밤 과하게 마신 술이 아직 덜 깬 모양이다.)

     

     

     


    김필용, 정혁태, 윤봉남, 나지수, 이장범.

    앞으로 나와!

     

     


    `큰일인데..

    턱걸이는 한 개도 못하는 걸.'

     

     


    망설이던 끝에 지수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저어, 선생님..

    전 턱걸이 한 개도 못하는데요..

     

     


    학생들을 지도함에 있어 매너리즘에 단단히 빠져 있는 사십 대 중반의 체육 교사가,

    무거워 보이는 입을 벌려 하품하는 김에 바리톤 음성으로 말 몇마디를 내뱉는다.

     

     


    그래도 해 봐. 노력하는 낌새는 보여야 기본점수라도 주지.

    시도도 안 하는 녀석은 빵점이야.

     

     

     


    흙 씹은 표정이 된 지수는, 떨어지려 하지 않는 다리를 천천히 움직여 철봉대 앞으로 나아간다.

     

     

     


    선생님!

    미스 나 키가 작아서 철봉에 손이 안 닿는데, 제가 도와줘도 되죠?!

     

     


    선생님으로부터 무언의 동의를 얻은 철용이, 지수를 따라 성큼성큼 걸어 나온다.

     

     


    `이 녀석, 또 무슨 짓을 하려고..

     

    하필 9반하고 체육시간이 같을 건 또 뭐람.
    철용이 놈이 "미스 나"라고 떠벌리는 소리를 주은이가 들으면 안 되는데..'

     

     

     


    야, 미스 나!

    내가 받쳐 줄 테니깐 안심해라, 히히..

     

     


    철용이, 뒤에서 지수의 배를 힘껏 껴안아

    철봉을 잡을 수 있도록 그를 들어 올려 주었다.

     

     


    `이 녀석이 웬일로 친절하게 구는 걸까. 어째, 기분이 좀 싸한데..?'

     

     


    교사를 보조하여 뒤에서 턱걸이 횟수를 체크하는 아이가 따로 있는데도

    굳이 나서 친절(?)을 베푸는, 그의 꿍꿍이속을 알 길이 없어 지수는 잠시 혼란스러웠으나,

    턱걸이 하나도 못하고 낑낑거리다 내려 올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창피하고 얼굴이 화끈거려,

    그의 모략을 곰곰이 추측해 볼 여유가 없었다.

     

     

     


    철용의 튼튼한 팔 힘에 의존한 채, 공중에 붕 뜬 기분이 되어

    그는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다스리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아, 이대로

    저 파란 물감 속에 흡수되어 버렸으면..'

     

     


    이때, 그의 귀를 괴롭히는 지겨운 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미스 나, 잘해라!


    힘 내, 미스 나!


    미스 나!  미스 나! 미스 나! ..............!!!

     

     


    "각개전투"를 벌이고 있던 아이들이,

    6반의 귀염둥이(?) "미스 나"를 응원(?)하기 위하여 응집력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듣고 대여섯 명의 9반 왈패들이 검정 선글라스가 앉아 있는 의자 주변으로 "헤쳐 모여"를 하는 게 아닌가.

    이런 낭패가..


    아줌마 체육 선생님의 눈총을 꿋꿋이 견뎌 가면서

    "구경거리는 절대 놓치지 않는다"는 불타는 신념 아래 똘똘 뭉친,

    어린 악녀(?)들 중에는 (그렇다!) 분명 주은이의 모습도 보였다.

     

     


    `으으.. 이럴 수는 없어.

     

    쟨 왜 저렇게 타락한 거야. 날 좋아한다면서 내가 묵사발되는 꼴은 빠지지 않고 보려 하니..

    그러고도 나랑 친구가 되겠다는 거야?

    쳇! 이제 내 별명까지 공식 확인하였으니, 대놓고 놀리는 일만 남았군.


    그래, 박주은. 너까지 놀려라, 놀려. 미스 나라고 어서 부르란 말이야!'

     

     

     


    자아, 준비 됐나?!

     

     


    선글라스의 호루라기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지수를 제외한 네 명의 아이들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철봉과 씨름하기 시작했다.


    죽기 살기의 투지를 불태우며 저마다의 실력을 과시하는 그들과 달리,

    젖 먹던 (거의 먹지도 못했지만) 힘까지 동원하여도 철봉 아래서 바동거리다 망신만 당할

    운명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던 지수였다.


    그러나, 예고된 운명은

    예고 없이 찾아온 운명과 바톤 터치를 했고, 너무 뜻밖의 참사에

    "준비된 수치심"마저 기절초풍하고 말았으니..

     

     


    이쪽을 보고 활짝 웃는 주은의 해맑은 얼굴에만 신경이 쓰여 눈을 감아 버린 무방비 상태로

    철용의 존재는 잠깐 잊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제물에게 행할 새로운 의식을 치르는 능숙한 손놀림에,

    모여있던 신도들조차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신호가 내려지고 얼마 안 되어, 그는 지수의 반바지를 (덕망중학교의 여름용 체육복. 그의 신체 사이즈에 비해 크고 헐렁한 편임.) 훌러덩 까 버리고 만 것이다.


    천만 다행히도,

    그의 팬티가 (워낙 알아주는) 아주 타이트한 최신 모드라 그것마저 벗겨지는 최악의 사건은 막을 수 있었지만,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사태여서 이에 대처하고 수습해야 할 뇌신경들이 잠깐 졸도하는 바람에, 지수는

    가느다란 팔로 몇 초간을 멍하니 철봉에 매달려 있어야 했다.

     

     


    9반 왈패들의 비명(?)과 6반의 심리적 동조자들이 지르는 괴성은

    한 데 섞여 철봉대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고,

    정신을 가다듬은 지수가 손을 놓고 모래 바닥으로 떨어질 틈도 주지 않는 철용의 다음 동작이,

    그것들의 도는 속도를 두 배로 높여 놓았다.

     

     


    내 사랑, 미스 나!

     

     


    만인 앞에서 "미스 나"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큰소리로 공표하고는,

    타이트한 팬티를 입었음에도 입체감이 별로 부각되지 않는 그 부위를

    스펀지 쥐어짜듯 움켜잡은 것이다.

     


    그제서야 절망의 부피를 짐작할 수 있는 시점이 도착하였고, 균형 감각을 잃은 지수는

    내동댕이쳐지는 짐짝과도 같이 등부터 바닥으로 추락하였다.


    그의 반바지를 포획한 철용은 교사의 꾸지람을 피해 축구 골대 쪽으로 부리나케 달아나 버렸고,

    여학생들이 있는 쪽으로는 감히 쫓아갈 엄두도 못 낸 지수가 할 일이라곤

    모래밭에 쪼그리고 앉아 무릎을 감싸 쥐며 고개를 떨구는 것이 고작이었다.

     

     


    녀석들의 유치하고 조잡한 장난질에는 이미 신물이 날 대로 난 체육 교사가,

    검정 선글라스를 써서 더 그렇기도 하지만,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무덤덤하게,

    그의 곁에 앉아 있는 한 무리의 아이들을 가리키며 지시를 내립니다.

     

     


    어이,

    너희들이 쟤 몸 좀 가려 가면서 저기 나무 그늘 뒤로 옮겨 놓고..

     

    연호야!  넌 철용이 잡아 와.

     

     

     


    지수의 각선미(?)를 곁눈질하며 웃고 떠드는 말괄량이들 사이에서 주은은

    유독 심각해진 (슬퍼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으로,

    울상이 된 얼굴을 들지 못하는 지수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참다못한 아줌마 교사가 다가와 호통을 치며 9반의 아웃사이더들을 끌어내는 동안에도,

    그녀는 지수로부터 안타까운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아까부터 주은의 모습을 눈여겨본 왈패 대장이,

    눈꼴 시어 더는 못 봐 주겠다는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그녀를 흘겨본다.

     

     


    열녀 났네, 열녀 났어..

     

    얘! 그렇게 불쌍하면, 가서 니 바지라도 벗어 주고 오지 그러니?

     

     

     

     


    한편,

    정규 시간보다 일찍 수업을 마친 음악 선생님이 - 운동장을 사이에 두고 교무실과 떨어져 있는 - 음악실을 나와

    나무 그늘을 따라서 걸어 내려오던 중, 문제의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참고로, 음악 교사의 이름은 나 향미.


    지수의 패션 팬티가 본의 아니게 나향미 선생의 시선을 끌어, 그녀의 얼굴은 금세 웃음기로 적시어진다.

     

     


    헤이! 미스 나!

    각선미 죽이는데!?

     

     


    경택의 우렁찬 목소리가 적절한 타이밍으로 터져 나왔다.


    마침 나향미 선생은, 여교사 치고는 파격적이라 볼 수 있는

    무릎 위 10센티미터가량의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그 소리에 가던 걸음을 멈추고, 철봉대 너머 옹기종기 앉아 있는 6반 아이들 쪽으로 돌아서는 그녀.

     

    미모와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으나 성격이 활달한 그래서 경택이와는 - 다른 여선생들에 비해 - 죽이 잘 맞는 편인 그녀가,

    양손을 잘록한 허리에 대어 화났다는 포즈를 취하면서도

    거미줄처럼 번져 있는 웃음기는 완전히 거둬 내지 못한 채, 음악 교사다운 소프라노의 톤으로

    아이들의 긴장하는 척하는 연기를 유도하였다.

     

     


    이 경택! 너지?!

    좋은 말할 때 이리 나와서 자진 납세 한다 실시!!

     

     


    수업 시간이 아직 십 분여는 남아 있는데도 선글라스는, 나머지 아이들의 측정을 다음 시간으로 미룰 심산인지

    본분을 잠시 망각하고, 나 선생의 몸매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자세를 고쳐 앉는다.

     

     


    선생님, 그건 오해예요.

    저는 우리 반의 마스코트 미스 나한테 말한 건데요.

     

     


    흥! 내가 네 속셈 모를 줄 알고?

    미스 나를 빙자해서 나한테 한방 먹인 거잖니!

     

     

     

    어이쿠, 무슨 그런 심한 말씀을..

    제가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어요. 여기 체육 선생님도 계시는데, 그랬다가 맞아 죽을 일 있나요?!

     

    그러고 보니, 선생님도 다리는 예쁘시네요, 헤헤.

     

     


    요 엉큼한 녀석! 넌 나만 보면 "미스 나"를 뻔질나게 불러대는데,

    그러다 언제 한 번,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는 수가 있다!?

     

     


    미스 나한테 미스 나라 부르는 건데, 왜 그러세요?

     

     


    야! 그럼 난 뭐  미스 나가 아니고 미스터 나니?

     

     


    아휴, 답답해. 이 가슴을 열어 보일 수도 없고..

     

    그렇담, 제가 선생님께 미스 나라고 부른 증거를 대 보세요.

    어떻게 해야 제 결백을 믿어 주실 거죠?


    얘들아! 내가 선생님 보고 말한 거니, 아니면 미스 나 보고 말한 거니.

     

     


    미스 나!!

     

     


    요런, 한 통속들 같으니..

     

     

     


    나 선생님이

    아름드리 나무 뒤에 숨어 - 그때서야 되찾은 - 반바지를 입고 있던 지수를 보고

    한숨을 푹 쉬며, 들리지도 않을 말을 건넨다.

     

     


    너나 나나 신세가 참 꿀꿀하구나.

    넌 어쩌다 별명이 "미스 나"가 돼 가지고, 저 가뜩이나 개구진 녀석을 완전범죄자로 만드는 거니?

     

     

     


    선생님!

    거기 그렇게 서 계신 김에 턱걸이나 한 번 해보시죠.
    저 미스 나는 하나도 못하는데, 진짜(?) 미스 나께서 대신 실력 발휘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어머머! 이제 체육 선생님께서도 저를 놀리시기예요?!

     

     

     


    그래요, 선생님!

    저 때리는 거 보면 힘 세시던데요, 뭐..

    턱걸이가 뭐하면 오래 매달리기라도 보여 주세요.

     

    얘들아 뭐 하냐. 응원의 박수 안 치고..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아이들의 입에서 "미스 나"가 줄줄이 이어져 나왔다.

     

     

     


    잠깐!

    이런 맹랑한..

    드디어 증거 잡았다. 이래도, 너희가 날 놀리는 게 아니야?

     

     


    선생님, 오해하지 마시라니깐요?

     

     

     


    경택이가 롱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나오더니, 원래 부족한 기가 더욱 죽어 힘없이 그늘에 앉아 있는

    지수를 잡아 일으켜 음악 선생님 쪽으로 몰아갔다.

     

     


    `얘는 또 무슨 일을 꾸미려고

    안 하던 짓을 하고 이래?!'

     

     


    쟤네들은, 우리의 호프 "미스 나"를 부른 거라구요.


    아그들아!

    우리 반의 이쁜이 미스 나 하고, 자타가 공인하는 덕망 학원의 미녀 나향미 선생님의,

    오래 매달리기 대결이 곧 펼쳐질 테니, 어서들 모여라!!

     

     


    우와!! 와아!!!

     

     


    경택아, 얘!

    나 오늘 치마 입었잖니.. 다음에 바지 입은 날 하도록 하자, 응?

     

     


    에이, 야간 (약한) 모습..

    오래 매달리긴데, 무슨 상관이에요.


    여기 좀 봐라!

    선생님께서, 미스 나만 일방적으로 응원한다고 기분 나빠서 못하시겠단다.


    자아, 구호 시이작!!

     

     


    얍!!!!

     

     


    언제 손발들을 맞추었는지, 경택의 주도하에 일사불란한 응원이 시작된다.

     

     


    나 미녀! 짝짝짝__! (박수 소리)


    나 미녀! 짝짝짝__!


    무진장!  짝짝짝__!


    이뻐요!  짝짝짝__!

     

    우우우우우____ (파도타기)

     

     

     


    으이그, 눈물 난다 눈물 나!

     

    그래.. 알았다, 알았어.
    너희들이 내 실력을 무시하는 모양인데, 이래 봬도 왕년에 운동깨나 했단다.

     

     

     


    아무렴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미스 나!

    네가 나 선생님을 이기면 턱걸이 열 개 한 셈 치고 점수를 주겠다. 그러니 한 번 잘해봐!

     

     


    `이거야 원..

     

    체육 선생님까지 거들지를 않나,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도통 모르겠군.'

     

     

     


    어리둥절하여 머뭇거리는 지수를 경택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클라크 게이블이 비비안 리를 안아 올리는 자세로

    번쩍 들어 철봉대 앞에 옮겨 놓았다.


    얼떨결에 그의 품에 안겨 버린 지수의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얘, "미스 나"야.

    너, 턱걸이 한 개도 못하는 실력으론 나 이기기 어려울걸..?
    오래 매달리기 얕보지 마라. 그거 아무나 할 줄 아는 거 아니다.

     

     

     


    선생님, 미스 나 겁주지 마세요.


    미스 나!  겁먹지 마.

    저렇게 호리호리하신 미녀께서, 체면이 있지

    설마 낑낑대고 무지막지하게 매달리기야 하시겠냐?!

     

     


    경택이 넌, 괜히 옆에서 초 치지 말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 알았니?!

     

     


    선생님, 팔 안 닿으시는 것 같은데, 제가 뒤에서 안아 드릴까요?

     

     


    너 자꾸 선 넘을래? 얘가 이젠, 못하는 말이 없어!!?

     

     

     


    이럴 때만 눈치가 빠른 체육 선생님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를 손수 음악 선생님 앞에 갖다 바쳤다.

     

     


    이거 밟고 오르시죠.

     

    인마! 넌 엉뚱한 생각 말고 얘나 들어!!

     

     

     


    지수의 가벼운 몸뚱이를 가뿐하게 들어 그의 턱을 철봉 위에 고정시켜 놓으면서도, 경택은

    맨발로 의자를 밟고 선 나향미 선생의 매끈한 종아리를 훔쳐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평소 폼생폼사 하시는 체육 선생님께서 스타일리시한 선글라스까지 벗어던지고 "다리 보기" 행사(?)에 동참하시니,

    두 남자의 느끼한 눈빛은 젊은 여인의 종아리에 쉴 새 없이 부딪쳐 흐르며

    고지(?) 선점을 위해 한 치의 양보 없는 (피 튀기는) 경쟁을 불사하였다.

     

     

     


    의자와 경택이 동시에 뒤로 빠지고, 아이들의 함성이 모래바람을 일으키는 가운데

    두 명의 "미스 나"는 대롱대롱 매달려 있어야만 했다.


    체육 실기 점수도 중요하였으나 경택이의 애인(?) 나향미 선생에게 지는 것이 우선 싫어서,

    지수는 이를 악물고 버텨 보려 하였다.

    얼굴이 벌게지고, (심리적 요인이 아닌 단지 용을 쓰기 때문에 빨개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턱이 깨지는 통증이

    사태 난 눈처럼 밀려왔지만, 참는 데까지 참아 보려 노력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나향미 선생의 얘기가 단순한 엄포성 발언은 아니었나 보다.
    턱걸이 하나 못하는 알량한 팔심으로 유리턱에 체중을 싣고 버틴다는 것은,

    그에게 처음부터 무리였나 보다.


    불과 십여 초도 못 되어 그는,

    늦가을 가로수에서 메마른 낙엽 떨어져 내리듯 맥없이 떨어져 나갔다.

     

     

     


    지수의 초반 탈락은 예상하고 있던 터라,

    "나향미 이벤트"의 들러리에 불과한 그의 부진을 아쉬워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예전 같으면,

    이날처럼 황당한 일을 당하는 지수의 곁엔 언제나 상만이가 있어서

    철용이를 쫓아가 반바지를 빼앗아 온다던가, 체육이 지시하기 전에 알아서 상의를 벗어 아랫도리를 가려준다던가 등등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해주고 위로의 말도 아끼지 않았건만..


    집에서처럼, 학교에서도 그는 어느새 완전한 외톨이가 되어 있었다.

     

     

     


    나향미 선생은

    아이들의 일방적인 성원에 힘입어 무려 오십 초 이상을 독하게 견디어 내었다.

     

     


    어때, 내 실력이 어떠한 지 이제는 잘들 알겠어?

     

     


    의기양양한 음악 선생님은, 꿔다 논 보릿자루처럼 철봉대에 기대어 머쓱하게 서있는

    (힘을 써 빨개진 얼굴이 부끄러워 빨개진 얼굴과 교체된) 지수에게 악수를 청했다.

     

     


    미스나야, 앞으로 운동 열심히 해야겠다. 그래 갖고 언제, "미스 나" 딱지 떼겠니.

     

     

     


    선생님, 힘드셨죠?

     

     


    경택이 그녀에게 엉겨 붙다시피 하여

    어깨를 주무르는 등 그답지 않은 갖은 아양과 애교를 떨며 수선을 피웠다.

     

     


    얘가 왜 이래? 징그럽게..

     

     


    선생님은 얼굴만 예쁘신 게 아니라, 힘도 캡 세시네요. 선생님 혹시..

    원더우먼이 변장하신 거 아니에요?

     

     


    칭찬이니, 욕이니? 헷갈린다, 얘..

     

     

     

     


    그가 음악 선생님께 접근하기 위하여 자기를 이용했다 해서, 지수는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다만,

    자기 앞에서 그녀와 다정한 모습을 보이는 그를 멀뚱하니 바라봐야만 하는 심정이,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외톨박이의 탄생을 알리는 서곡인 양 쓸쓸하고 서글플 뿐이었다.

     

     

     


    `고요한 곳으로 가고 싶다.


    평온하게 잠잘 수 있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않고 놀리지 않는

    아름다운 타인들만 사는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롭고 질척이는 관심이 없는 곳.


    따스하고 다정한 무관심이 포근하게 감싸는 곳.

     


    세 살 때던가..

    태어나 유일하게 바다 건너

    가 본 그곳.


    엄마의 손을 잡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가본 그곳.


    세 살짜리의 마음에 평화 비슷한 것을 심어 준 곳.


    부드러운 바다의 속삭임이 고독의 즐거움을 알려주는

    그곳, 피지에 가고 싶다.


    피지섬으로 사라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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