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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 은밀한 타락
    지수 이야기/이상한 사춘기 2023. 3. 7. 17:10

     

     

     

     

     

     

     

     

     

     

     

     

     

     

     

     

    1993년 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 오후 네 시경.

    지수의 집.

     

     

     

     


    모처럼 친지들이 모여 집안이 왁자지껄하다.


    일 년에 한두 번 모일까 말까 하는 그들은 아버지의 형제들로,

    할아버지와 장남인 아버지 덕택에 계열사 사장직을 맡고들 있었다.
    밖에서야 업무관계로 아버지와 심심찮은 접촉들을 하고 있지만, 집에서 이렇게 모여 오후 늦게까지 있는 것은

    명절이라 해도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회사가 바쁘게 돌아가는 경우, 집 안엔 청탁 내지 아부성 선물들만 산더미처럼 쌓이고

    아버지의 지인들을 포함한 외부 방문객들로만 문전성시를 이룰 뿐, 이들을 제외하면

    정작 오래 머물러야 할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명절일 때가 적지 않았는데,

    아침 일찍 차례를 마치고는 (성묘는, 삼촌들 가운데 그날 가장 여유 있는 사람이 명예 회장인 할아버지를 모시고

    약간 명의 수행원들만 대동하여 다녀오곤 함.) 수저도 들지 않고 다들 부랴부랴

    각자의 회사로 뿔뿔이 흩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수는, 차라리 그런 명절이 더 좋았다.
    이는,

    어린 나이답지 않게 혼자 있기를 유독 좋아하고 시장통 같이 시끌시끌한 것은 딱 질색인 성격에서 기인하였는데,

    이러한 성격이 형성된 데에는 자라온 환경의 영향이 컸다.

     


    늦둥이 막내로 태어나 유모의 손에서 외롭게 자랐으며,

    자신을 포함 4남 3녀의 형제들이 있긴 하나 바로 위 누나하고도 터울이 열 살이나 져,

    아기일 때 "고 녀석 귀엽다"고 만져들 준 다음부터는 형 누나들의 손을 탈 일도 별로 없었다.

    선택받은 귀족(?)의 자제들답게 어려서부터 이것저것 배우고 여기저기 다니는 등

    꽤나 촘촘한 스케줄 대로 그들은 자기들만의 시간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단, 막내 지수는 예외였다.

     

    무엇보다 본인이 그런 생활을 못 견디게 숨 막혀했고,

    그가 원하는 것은 무조건 들어주려는 부모의 배려 덕분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막내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널널한 삶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똑똑한 머리로 뛰어난 성적을 고수하여 부모를 안심시키면서, 그는

    사색과 독서와 고독을 통해 자기만의 (번뇌로 얼룩진) 극단적인 세계를 소리 없이 구축해가고 있었다.

     


    사춘기로 막 접어들고 있는 지금은 그 사정이 좀 더 심하여,

    제일 위 큰형부터 아래로 세 명은 결혼해서 출가하였고

    바로 위 누나부터 위로 세 명은 제각기 유럽과 미국에 나가 유학 중이었으므로,

    지수는 자연히 혼자 지내는 것에 익숙해졌고 그래서 그것이 편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은, 삼 일의 연휴기간 중 이틀을 회사일로 반납한 아버지와 삼촌들이

    따로 살고 계시는 할아버지도 (삼 년 전에 새로 부인을 맞아들여 신혼부부처럼 살고 있는 팔순의 창업주도) 모셔 오고

    형제간의 친목을 공고히 하기 위해

    아버지 소유의 크고 호화로운 저택에서 다시 모이기로 한 날이었다.

     

    주로 외국에서 지내고 있다는 핑계로 - 아주 중요한 "집안의 대사(大事)"가 아니면 - 웬만한 모임에는

    귀국할 생각을 하지 않는 형과 누나들까지,

    이번엔 웬일로 일정들을 맞출 수 있었는지 한둘을 제외하고는 모두 들어와 있는 상태여서,

    그 북적댐의 레벨이 평상시보다 급상승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지수는 이렇게 소란스러운 명절이 정말 싫었다. 
    몇 년에 한 번 있는 행사일지라도 그에게 싫은 건 싫은 거였다.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이런 날만 되면 유난을 떨며 아는 척하고 형식적인 예의범절을 강요하는

    호들갑이 싫었다.


    나이도 어리면서 엄마와 맞먹으려 하는 (잔뜩 거드름 피우는) 새할머니가 싫었다.


    불한당 같은 사촌과 조카들이 허락도 없이 난입하여, 그의 공간을 (추억이 숨 쉬고 있는 "지수만의 놀이동산"을)

    함부로 유린(?)하는 것도 참을 수 없었다.

    생전 처음 보거나 - 얼굴 본 지가 너무 오래돼서 -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그들과

    어울려 놀아야 하는 서먹서먹함에, 그저께 먹은 송편이 넘어 올 지경이었다.


    친목은커녕 술만 취했다 하면 언성이 높아지는 (계열사 간의 협조가 원활하지 않음에 대한 쌓였던 불평불만 때문임)

    삼촌들이 무섭고 싫었다.

     


    그러나 다른 어느 것보다 가장 싫은 것은,

    술자리가 어느 정도 무르익을 즈음이면 어김없이 그를 불러 옆에 세운 다음

    친척들 앞에서 막내아들을 과대 포장하여 자랑을 늘어놓는 아버지의

    보통 때와는 많이 다른 수다이다.


    막내 얼굴 보기 힘든 아버지의 각별한 애정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식에 대한 기대를 그런 식으로 나타내어 가뜩이나 소심한 지수에게 매번 부담을 안겨 주는

    그의 특이한 명절 버릇이 싫었던 것이다.


    다른 사촌들에 비해 두뇌가 명석하고 공부도 비교적 잘하는 건 사실이어서 아버지가 자랑할 만하였으나,

    그것도 한두 번이지 모일 때마다 그러하니 지수는 겸연쩍어 죽을 지경이고,

    겉으로 내색은 못하는 숙모들의 얼굴에 지겹다고 쓰여 있는 것 같아 민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교내 유도부 주장을 맡아 전국 대회에서 상도 여러 번 탔고 학생회장까지 겸하고 있는

    활달하고 당찬 성격의 고2 사촌 형을 막내아들로 둔 셋째 삼촌이, 아버지의 속 빈 자랑을 그만두게 하고자

    쐐기를 박는 차원에서 지수의 자폐적이고 지나치게 수줍음 타는 성격을 거론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집안 분위기는 썰렁하기 일보 직전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렇잖아도 남자다운 사촌 형한테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그를 자기 아들과 비교하며

    아픈 곳을 습관처럼 건드리는 삼촌이 미웠다.

     


    사내자식이 왜 그렇게 하는 짓마다 계집애 같냐며,

    얼굴은 또 왜 그리 하얗고 손이 보드랍냐며,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학교에서의 악몽을 되살아나게 하는 사촌 형은 더 미웠다.


    그는 또한, 호신술을 가르쳐 준다는 핑계로 지수에게 자신의 유도 실력을 빠짐없이 선보이는 친절(?)을 베풂으로써,

    자기보다 아이큐가 높은 사촌 동생의 거만함에 대한 (지수의 붙임성 없고 무뚝뚝한 모습이 그에겐 이런 식으로 느껴짐)

    합당한(?) 응수를 빼먹지 않았다.

     

     


    싫어하는 일들만 기를 쓰고 일어나는 행사가 잊을 만하면 되풀이되는 것이

    정말이지 끔찍했다. 그래서일까

    명절이 다가오는 것이 더더욱 두렵기만 한

    지수였다.

     

     

     

     

     

     

     

     

     

     

     

     

     

        
    지수야, 친구들 왔는데?

     

     

     


    다섯 명의 "불한당"들이 점령한 "놀이동산"의 입구에 유모가 서 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이 녀석들 등쌀에 멀미가 날 지경이었는데..'

     

     


    누군데요?

     

     


    글쎄다.

    그냥  반 친군데 잠깐 놀러 왔다는구나.

     

     

     


    `누굴까..

    혹시, 상만이가 아닐까.

    그래, 우리 집에 찾아올 아이는 상만이밖에 없어.
    아,

    상만이가 다시 내게 마음을 열어주려나 보다.'

     

     

     

    들어오라 그럴까?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야.

    빨리 이 지옥에서 벗어나야지.'

     

     


    아녜요. 내가 나갈래요.

    나, 뒷문으로 해서 나갈 테니깐 엄마한텐 얘기 좀 잘 해주세요.

     

     


    그러면 못써요. 더구나 오늘 같은 날..

    친척들도 와 있는데 집에 있어야지.

     

     


    금방 갔다 올 거니깐 걱정 마세요.


    얘들아!

    너네들은 여기서 실컷 놀아라. 이 형은 바깥 구경 좀 하고 올 테니..

     

     

     

     

     

     

     

     

     

     

     

     

     

     


    천진하게 웃고 있는 상만이를 상상하며 대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순간..

     


    얼굴의 핏기가 머리 위로 증발해 버리는 공포가 달려들어

    원래 하얀 그의 얼굴을 백지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어이, 미스 나!

    추석 잘 지냈냐?

     

     

     


    꿈에서 만날까 무서운 두 녀석 차철용과 권민호가, 어깨동무까지 하는 다정한 포즈를 취하며

    입가엔 음흉한 미소를 머금은 채 서 있는 게 아닌가.

     

     

     


    듣던 대로, 집 한번 으리으리하구나.

    궁전이 따로 없네..?

     

     


    `대체, 무슨 꿍꿍이속이란 말인가.

    이 녀석들이 의기투합하여 나를 다 찾아오고..'

     

     


    야, 미스 나! 너 그럴 수 있냐?

     

    그래도 우리가 반에서 널 가장 이뻐해 주고 관심도 가져 주는데,

    한 번쯤은 집에 초대도 하고 뭐 그래야 되는 거 아니냐?!


    니 초대 기다리다 눈 빠지는 것보단 나을 거 같아서

    우리가 이렇게 직접 찾아온 거야.

    들어가도 되지?

     

     

     


    `이런 뻔뻔하기 짝이 없는 놈들!

    너희를 내 집에 한 발짝이라도 들여놓으면, 내가 인간이 아니다.'

     

     


    어어.. 그래, 너희들도 추석 잘 보냈지?


    그런데 이걸 어쩐다지?

    지금 안엔 아버지 손님들하고 친척들이 너무 많이 와 계셔서 말이야..

     

     

     


    권민호가, 그 두꺼운 낯짝으로 지수를 노려보며 뻔뻔한 주둥이를 놀린다.

     

     


    얀마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큰 집에 우리 들어갈 자리 하나 없겠냐?


    우리, 여기 올려구 점심도 안 먹구 왔단 말이야!

    빨랑 들어 가자니깐?!

     

     

     


    그의 어깨를 밀치며 대문을 막 넘어서려고 하는 민호를 간신히 만류하는 지수.

     

     


    저기..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조만간에 너희 둘 정식으로 초대할 테니깐 오늘은 일단 나랑 같이 나가자.
    맛있는 거 사줄게. 차례 음식 너희들도 이젠 신물 날 거 아니니?
    돈 두둑이 가지고 나왔으니깐, 너희 먹고 싶은 거 다 먹을 수 있을 거야.

     

     


    나 참..

    미스 나는 어떻게 해놓고 사는지, 꼭 구경하고 싶었는데..

     

     

     


    못내 아쉬워하는 철용의 손목을 끌다시피 하며 지수는 대문을 나섰다.


    그의 팔을 철용이를 대신하여 뿌리쳐 주면서 민호가 윽박지른다.

     

     

     


    너 그럼,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정해! 우리 언제 초대할 거야?
    그거 말 안 해주면 지금 당장 집으로 쳐들어갈 거다!?

     

     

     

    아.. 알았어, 이번 주 중으로 초대할게..!

     

     


    너, 그 약속 어겼다간 완전히 가는 수가 있다?!

    골로 가기 싫으면 알아서 기어!!

     

     

     

     

     

     

     

     

     

     

     

     

     

     

     


    연휴 끝 무렵이긴 해도, 명색이 명절 연휴라 영업하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곳저곳을 헤매던 끝에, 문을 연 중국 음식점 한 곳을 겨우 찾아

    두 명의 악동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자장면 곱빼기와 탕수육으로 배를 불린 녀석들이, 이번엔 자기들이 좋은(?) 곳으로 안내하겠다며

    납덩이처럼 무거운 발걸음의 지수를 앞세워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볐다.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철용은 휘파람을 (형편없는 솜씨가 쑥스럽지도 않나) 불어댔고,

    민호는 중간중간 그의 귀에 입을 가져가 속닥거렸다.

     

     

     


    `녀석들, 둘이 언제부터 친했다고..

    그나저나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가까운 목적지의 방향을 일부러 헷갈리게 하려는 속셈인지 삼십여 분을 계속 걷게 하여

    다리에 힘이 빠진 지수가 웬만큼 지쳐 보이자, 그제야

    외딴 골목의 후미진 곳에 위치한 허름한 상가 안으로 들어서는 그들이었다.


    건물 구석에 숨어 있는 유리문을 열고 비좁은 입구로 들어서자 바로,

    지하와 연결된 가파른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야?

     

     


    니가 밥도 사주고 해서 오늘 좋은 구경시켜 주는 거니까,

    미스 난 그저 재밌게 보기나 해! 히히..

     

     


    물론 돈은 네가 내야 한다는 거!

     

     

     


    민호가 손가락으로 등을 쿡쿡 찌르며 계단으로 내려갈 것을 강요하고 있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의 실체가 집어삼킬 듯 아가리를 벌리고 그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묻는 말에 답변은 하지 않고 어서 내려가라고만 재촉하는 녀석들의 성화에 못 이겨, 지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진정하며 어두컴컴한 계단을 서둘러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 이상의 약한 모습을 보였다가는

    원체 난폭한 녀석들이 또 어떻게 돌변할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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