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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봄을 거니는 고독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3. 3. 30. 14:32
차창을 통해, 뒤로 가는 세상을 봅니다. 겨울과 봄이 싸우는 오후의 서슬 퍼런 바람이 칼춤을 추며 출렁이는군요. 풍경은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나는 스치어 갈 뿐이니까요. 차창 안의 공중부양한 자비들이 모호한 미소를 점잖게 아래로 던지면, 땅 딛고 서 있는 사람들은 못 본 척 외면하고 표정 없이 찡그립니다. 겨울 낮의 의기양양한 바람이 기진한 봄볕을 안고 춤추며 흘러가는 거리에서 정류장을 몽유하는 내 쓴웃음 한 컷에도 불현듯 뒤돌아 함께 웃어 주는, 소녀가 다 있네요. 착각이어도 좋아요. 소녀의 슬리퍼 속 언 듯한 맨발이 동동거리며 밟고 선 땅에서, 때 이른 아지랑이가 그녀의 발그레한 미소처럼 피어오릅니다. 꼭 있어야 할 풍경이었습니다. 결국은 봄이 오는 이유를, 스치어 갈 뿐인 내가 고개 돌려 한참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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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골목을 거니는 고독 : 낯섦, 애잔한 평화.. 1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3. 3. 28. 17:16
어느 시인의 한 구절 시구가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멀리 따돌린 것들은 모두 나를 앞질러 있었다는 것을....." 삶이 버거울 때면 간혹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헤매고 다닙니다. 산책이라기엔 좀 그렇지요.. 처음에는, 사는 곳 주변 아는 동네들을 바쁜 척 누비다가 다리가 끊어질 듯 아파 아무 데나 주저앉고 싶어질 즈음이면, 생전 가보지 않은 구역의 미로 같은 골목들을 서성이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땅거미를 뒤집어쓴 생경한 풍경이 아득한 너머까지 늘어진 혓바닥처럼 대로(大路)를 깔아놓으면, 해진 다리는 한참을 망설입니다. 골목들 안에서 계속 어슬렁거릴지 저 큰길 너머로 아주 사라져 버릴지.. 얼기설기 얽힌 추레한 골목 어딘가에는 살던 곳이 언제나 굳건히 기다리며 안심하기를 종용합니다. 낯섦에 유혹되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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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막사에서 막사로Letters to D.J. (지수 외전)/FRIDAY THE 13TH 2023. 3. 25. 20:48
Another stories of Jisoos in parallel universes : 2. Friday the 13th (원본) (12) 도련님! 안에 계세요? 기울어진 평행육면체가, 기정사실화된 몽환성에 불안을 덧입히는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물속인 듯 물속 아닌 공간을 두려움에 떨며 서성인 지 얼마나 지났을까요. 코앞까지 다가선 공포와 혼란스러운 상념에 휘둘리느라, 한참을 흘러 버린 시간도 체감할 새가 없었습니다. 그런 그를 한순간 얼어붙게 만드는 일이 위태로운 정적을 헤치고 급습하였습니다. 최대한 소음을 줄이려는 의도가 다분한 소심한 두드림이었지만, 비좁은 창고 내부에 울려 지수의 극도로 예민해진 신경을 자극하기엔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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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생명을 거니는 고독 : 시를 아는 척 2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3. 3. 23. 04:49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생명의 서" 첫 연에서 청마는, 겉핥기 식 정돈에 집착하는 부실한 결벽증이 생의 표피에서 희로애락의 뾰루지를 다독일 뿐 그것들을 짜내려 진피를 헤집지는 못하는 소위 "천착하는 삶의 결여"를 초래하는 동안, 단정했던 내면은 길 잃은 듯한 불안과 초조가 야기하는 구토 증세를 시작으로 "지성이 끝내 붕괴 되는" 무력감을 절감하면서도 함께 무너지지 않고 시원으로부터 꿈틀대는 생명의 본류를 기어이 부여잡아 위기를 극복하고야 마는, 초인의 웅건한 의지를 또 한 번 되새김하고 있다. 거기는 한 번 뜬 백일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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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색귀월광 프로젝트 (판타지) 2023. 3. 22. 22:29
놀라지 말게. 저 흉측한 장면이 3차원 물질계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아니라는 점.. 자네도 그 정도는 간파할 수 있겠지? 4차원에 존재하는 저놈은, 자네 인생 전반을 점령하다시피 한 저급령들과 마찬가지로 자네의 육신을 탐하고자 하는 욕망에만 사로잡혀 있다네. 자네 몸을 둘러싸고 있는 4차원 오오라가 일찌감치 "에프엠의 달빛"에 오염되었기에, 먹이나 다름없는 훼손된 오오라를 감지하게끔 조정된 저것들이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드는 것일세. 왜곡과 퇴행을 오가는 잠재의식에 묶여 한껏 위축되어 있는 그것을, 이를테면 음탕귀가 확인사살 하고 있는 셈이지. 너무 끔찍하군요. 볼 수 없다면 속이나 편하련만.. 저 녀석은 지금 뭔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주책없이 껄떡대고만 있으니.. 에이 한심한.. 절망적이도록 찝찝한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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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강제 경험지수 이야기/이상한 사춘기 2023. 3. 20. 17:09
지하는 뜻밖에 만화방이었다. 큼직한 만화 포스터가 붙어 있는 문으로 들어서자, 바깥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 내부는 국민학생들부터 어른들에 이르기까지 사람들로 제법 붐비고 있었다. 열대여섯 평 남짓한 공간의 사방 벽에는 만화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고, 중앙에 얼기설기 놓여 있는 낡은 소파들은 독서삼매경(?)에 빠진 사람들의 엉덩이와 하나 된 지 오래였다. (들어온 사람 수에 비해 소파가 크게 부족하여, 바닥에 주저 앉은 아이들로 통로를 지나다니기가 힘들 정도였다.) 낮은 천장에 붙어 껌벅거리는 질 나쁜 형광등 세 개에만 의존하여 만화책에 코를 박고 있는 아이들 대부분의 공통점은 지수처럼 안경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아저씨! 저 왔어요. 장사 잘 되시죠? 철용이구나. 네 눈엔 이게 잘 되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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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생명을 거니는 고독 : 시를 아는 척 1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3. 3. 17. 17:05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지상으로부터 우뚝 솟아 황량한 바람을 받으며 나부끼는 깃발은, 생명의 본질을 향해 깊이 침잠하여 꿈틀대는 번뇌 그 소리 없는 아우성 속에서 유연하게 자신을 지탱하는 고독한 초인의 상징이다. 저 푸르고 넓은 바다, 조금의 내색 없이 정해진 방향으로 고요하고 진중한 흐름을 계속 이어갈 뿐인 거대 심연은, 태초부터 있어온 원시의 생명이요 인류에게 본능적 생동감과 활기찬 생명력을 수백만 년 이상 공급하여 온 태반이기에, 초인은 그곳에로의 영원한 향수를 못 이겨 바람보다 더 심하게 몸을 흔든다.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그것은 본원적 그리움의 표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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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꿈속 꿈으로Letters to D.J. (지수 외전)/FRIDAY THE 13TH 2023. 3. 15. 16:35
Another stories of Jisoos in parallel universes : 2. Friday the 13th (원본) (11) 영화 속 슬로 모션인 양 느릿느릿 드러나고 있는 것은 자체발광하듯 번득이는 예리한 칼날이었습니다. 주방에서 흔히 사용하는 부엌칼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크기나 길이가 보통의 그것에 비해 두세 배는 되어 보였습니다. 잔뜩 머금은 선혈을 바닥에 뚝뚝 떨어뜨리며 등장한 그것은 거대한 야수의 날카로운 송곳니를 연상케 하였습니다. 저렇게 큰 식칼을 쥐고 있는 주체는 보나 마나 한 덩치 하리라 예상 안 한 건 아니나 그래도 반전이 있기를 아주 작게나마 기대했었는데, 예상을 뛰어넘는 비현실적 체구가 불쑥 튀어나와 아저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