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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 생명을 거니는 고독 : 시를 아는 척 1
    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3. 3. 17. 17:05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지상으로부터 우뚝 솟아 황량한 바람을 받으며 나부끼는 깃발은,

    생명의 본질을 향해 깊이 침잠하여 꿈틀대는 번뇌 그 소리 없는 아우성 속에서 유연하게 자신을 지탱하는

    고독한 초인의 상징이다.

     

    저 푸르고 넓은 바다, 조금의 내색 없이

    정해진 방향으로 고요하고 진중한 흐름을 계속 이어갈 뿐인 거대 심연은,

    태초부터 있어온 원시의 생명이요

    인류에게 본능적 생동감과 활기찬 생명력을 수백만 년 이상 공급하여 온 태반이기에,

    초인은 그곳에로의 영원한 향수를 못 이겨 바람보다 더 심하게 몸을 흔든다.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그것은 본원적 그리움의 표시이며, 순수한 정념이 넘치도록 배인 몸짓이다.

     

    초인은, 현실의 고통을 잊으려고 최면을 원하지는 않는다.

    번민의 소용돌이 속에서 엄살 떨며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날아가버리지도 않는다.

    바람은 결코 푸른 해원으로 깃발을 데려가 주지 않음을,

    바다의 그윽한 수면이 깃발을 적시는 것을 바람은 좌시하지 않음을

    그는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황폐한 계곡의 가시덤불에 찢기고 흙먼지로 얼룩져 뒹구는 볼성사나운 운명을 허용할 만큼

    깃발은 어리석지 않다.

    번뇌가 꼬리를 무는 악순환의 굴레에 갇힐 정도로 초인은 나약하지 않다.

     

    하늘 향해 솟은 만큼 땅 속 깊이 뿌리를 박은 푯대는

    조금의 속임도 없이, 흔들리는 지축의 불안한 떨림을 꼭대기의 깃발에 그대로 전달한다.

    그럴수록 깃발은 나부끼는 몸을 더욱 더 밧줄에 옭아맨다.

     

    바다가 그리운 만큼 깃발은 땅을 사랑한다.

    역사의 굴곡에서 요동치는 땅은 초인에겐 언제나 연민의 대상이다.

     

    원시 바다의 온유한 활력을 대지 위에 뿌리는 것이 초인의 강건한 의지가 바라는 유일한 희망이므로,

    깃발은 그리움을 원동력으로 하여도 힘차게 펄럭일 수 있는 것이리라.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현실의 고통을 가슴 가득 안은 상태로 원시적 그리움을 향해 나부껴야 하는

    모순의 비애가 크면 클수록, 깃발은 더 높은 곳에서 펄럭인다.

     

    원시의 생명과 처음 분리되어 혼돈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태고의 사건은

    일그러진 역사의 전개를 낳았고, 동시에 많은 초인들이 비애 속에서 명멸하였건만

    최초의 초인은 누구였던가.

     

    나 이제 최후의 초인이 되어 가장 높은 공중에 애수의 깃발을 달고

    장중한 우주의 심연을 향해 펄럭이리.

     

    오늘날 초인은 드물고

    주동이 된 범부들은 핏기 없는 문명을 연장하여 우울의 도피행로를 꾸준히 파 나아가니,

    최후의 초인은 성장하는 역사와 함께 이미 완숙의 단계로 들어섰으되

    세상과의 괴리는 오히려 커져만 가고, 이러한 모순이 가하는 비애감의 무게도

    비례하여 증대하며 그를 괴롭힌다.

     

    그러나

    커가는 비애를 동력으로 깃발은 더 높은 곳에서 펄럭일 수 있다.

     

     

    "깃발"에서 보여진 청마의 이념은 이른바 생명의 시원을 향한 회귀이며

    이를 가능케 하는 초인 지향적 삶에 대한 희구이자 의지이다.

     

     

     

     

     

     

     

     

     

     

     

    미당 또한 그의 곧은 시들 속에서

    존재의 근원이 지니는 영원한 생명력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초기 주제 의식은 세월의 흐름을 따라 자연스럽게 천착되어, 깊어진 통찰이 주는 심오한 시 세계는

    절제된 세련미를 입힌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탄생시키게 된다.

     

    베테랑 시인의 노련해진 필력이

    이렇듯 묵직한 주제를 경쾌한 터치로 얼마나 풍성하고 생동감 넘치게 표현하는지,

    "추천사"를 살펴보면서 잠시 느끼도록 하자.

     

     

     

     

     

    향단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향단아.

     

     

    땅 속 깊이 뿌리내린 고목의 줄기에 굵은 동아줄을 단단히 매어 만든 그네는,

    이상을 그리워하면서 현실도 사랑하는 초인의 상징으로

    청마의 "깃발"과 같은 이미지이다.

     

    그네와 일체가 되어 그네와 함께 움직이는 춘향이 또한,

    청춘의 환희를 발산하는 발랄한 생명력과 여성적 온유함이 조화를 이룬

    인격화된 상징이라 하겠는데,

    "원시의 생명을 잉태하여 대지와 인류를 키워온" 심해의 온유한 본성을 사랑함과 동시에

    푸르른 하늘을 동경하며

    그네를 높이 띄우려는 춘향의 시도는,

    초인과의 동질성 회복을 지향하는 본능적 정념의 발로요 결연한 의지의 몸짓인 것이다.

     

     

     

     

     

    이 다수굿이 흔들리는 수양버들 나무와

    벼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뎀이로부터,

    자잘한 나비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조 내어밀듯이, 향단아.

     

     

    다수굿이 흔들리는 수양버들과 벼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뎀이와 자잘한 나비새끼와 꾀꼬리들은 모두,

    핏기 없는 사회에 순응하여 각박한 삶으로 끌려가는 필부들의 행렬이다.

     

    자연의 생기에 역행하여 회색의 도시에서 우울을 벗 삼고,

    "현실과 부딪쳐 부스러지는" 희로애락의 조각들을 쓸어내기에 바쁜,

    모래알 같은 군상이다.

     

    춘향은

    숨통을 죄는 이러한 삶의 우매함을 힘차게 밀어내고 탁 트인 하늘로 도약하려 한다.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다오.

    채색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다오!

     

     

    푸른 해원의 망망한 수평선과 맞닿은 광활한 하늘.

     

    미당에게 이는,

    태고와 현재, 이상과 현실이 조화로이 공존하는 광경으로, 초인들이 생동하는 이상향의 영역이다.

     

    이에 반해,

    "산호와 작은 섬들이 널브러진" 얕은 근해를 낮게 깔린 구름으로 아우르는 가까운 하늘은,

    잡다한 이데올로기가 조종하는 서양 문명의 대중 친화적 경박성을 의미한다.

     

    한편,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이란,

    상대적 개념으로서의 동양적 진중함이며,

    생명의 진수가 태동하도록 대양의 심연을 굽어살피는

    "자연 친화적 초월"이자 "만유 조화 자체"라 할 수 있겠다.

     

    그 티 없는 하늘로 솟아오르길 염원하는 "채색한 구름"은,

    완벽한 섭리에 감응코자 하는 초인의 약동하는 본능이고, 고로

    울렁이는 가슴을 가진 춘향은 초인과 동격이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다오.

    향단아.

     

     

    영원한 생명에의 지향은 가능성의 파장을 무한대로 증폭시켜

    그네의 끊임없는 왕복 운동을 하늘과의 접촉으로까지 이어간다.

     

    관념들의 오만은 스스로 그넷줄을 끊고 하늘 향해 곧잘 튕겨나가지만

    예상하던 바 대부분 중력에 굴복하여 이내 곤두박질치고,

    요행히 시공에 걸려 추락을 면하는 것들도

    생기 잃은 달빛이 되어 쇠락해 가는 대가를 치른다.

     

    인간 구원의 현명한 대안인 "생의 진자 운동"을 깨달아 힘차게 그넷줄을 밀고 당기는 초인들은

    과연 몇이나 될런가.

     

    홀로 고고한 척 않고,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 그렇게 밀어달라 외치는 초인은

    운명을 함께 할 조력자의 중요성도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

     

    조금씩 상승하여 차차 하늘에 닿음도,

    되돌아 땅을 스치는 정감 어린 반복을 통해야 비로소 가능하므로,

    땅에다 뿌리박고 살아가야 하는 민초들의 애환이

    무기력한 기복(祈福)을 떨치고 그와의 동행에 기꺼이 동참하도록

    초인은 정중하게 간청하는 것이다.

     

    상전의 육중한 갑옷을 벗어던지고 자연의 나풀거리는 생기에 들떠

    줄기차게 그러나 상냥하게 하녀를 불러대는데,

    초인을 이끌어 깨달음의 극한까지 안내할 친근한 동력, 인정받는 산쵸판서의 자존감이

    어떻게 가만히 있으리.

    씩씩하게 발을 구르는 춘향이보다

    향단이가 더 의기양양 힘주어 밀고 당긴다.

     

     

     

     

     

     

     

     

     

     

    서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다가 그리운 만큼 땅을 사랑해야 하는 "깃발"의 내적 고통을,

    역설(逆說)을 추구하지 않겠다는 단정(斷定)으로 절절하게 표현한 구절이다.

     

    고뇌의 소용돌이 속에서 현학을 떨고 싶은,

    바람에 실려 모호한 관념 속을 훨훨 날고 싶은 심정이

    "깃발"엔들 왜 없으랴.

     

    광대한 하늘의 품에서 자유로이 놀다가

    그윽한 해면 위를 스치듯 날며 몸을 적시고픈 욕망이,

    그네엔들 왜 없으랴.

     

    그러나,

    무수한 철학과 종교들의 황홀한 칼춤에 매료되어 심각한 사상의 창백한 자아실현을 만끽하는 것이

    초인에게는 한낱 도피와 다를 바가 없다.

     

    초인의 자아실현이라 함은 자아의 궁극적인 극복에 있으며, 이는

    자아와 외계의 자연스러운 교류 나아가 합일의 단계일진대

    어찌 "고목의 뿌리가 박힌 대지"를 외면한단 말인가.

    바다가 본향인 육지를, 초인을 길러낸 생명을, 어찌 팽개친단 말인가.

     

    그것은 정녕, 자연의 본성인 바다가 원하는 바도 아니었다.

    바다와 하늘이 공히 바라는 것은

    맥박이 요동치는 "생의 진자 운동", 땀 흘리는 위대함의 여정이리라.

    박제된 천상을 한가롭게 주유하는,

    액자 속 니르바나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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