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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 애착을 거니는 고독 : 집착과 미련(未練) 사이 어디쯤 2
    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3. 2. 7. 13:46

     

     

     

     

     

     

     

     

     

     

     

     

     

     

     

    불과 수년 전의 멀쩡하던 열정이 실종되었다는 것.

    생각하면 참 신기한 일이다.

     

    우리의 마인드가 예전과는 사뭇 달라져 있다는 것.

    자연의 법칙처럼 당연한 건가.

     

    열정에 대한 무기력을 심신의 노화인 양 경험한다는 자체가 서글프게 느껴진다.

     

     

     

    쥐뿔 가진 게 없어도 열정만 있으면 "살아있음"은 증명되지만,

    아무리 가진 게 많아도 열정이 사라지면

    사라진 만큼 가까워지는 것은 죽음.

     

    하물며

    가진 것도 없는 데다 열정마저 소진되었다면,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리.

    살아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워지겠지.

     

     

     

    열정이란 개념에 도덕의 향취를 첨가하고 싶진 않아. 열정은 그저 열정일 뿐..

     

    백주 대로에 창피한 줄 모르고 흘레 붙은 암수 똥개들의 열정도

    열정은 열정이지.

     

    보잘것없는 비루한 열정이라도 호기롭게 시도할 수 있다면

    아마 그때가 인생의 전성기리라.

     

     

    열정의 자격이 부여될만한 몸부림,

    긴장으로 몸서리치는 희로애락도

    시기가 정해져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은 하였지만, 이처럼 덜컥

    열정이 박탈되는 날이 올 줄은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 방전된 배터리랄까.

     

    혀끝의 찌릿함이 조금은 남아 있는 배터리란 걸로, 위안을 삼아야 할지..

     

     

     

    불안과 두려움의 무차별 공세로

    맘껏 우울할 겨를도 없다면

    그것이 열정의 마이너스 버전, 열정의 변종은 아닐는지..

    (발각의 공포와 숨바꼭질하던 그 시절 부지런함도 여기 포함되겠지.)

     

    체면이 보증 안 된 "안개 같은 미래"와,

    스스로의 온전한 선택인지 불분명한 "저주받은 삶"을,

    노골적으로 두려워하고

    덮어놓고 쪽팔려하는

    무책임한 히스테리 또한, 아직은 꺼지지 않은 "열정의 불씨"인지도.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따위 추레한 뒷걸음질에, 열정의 아류라는 타이틀마저도 붙이고 싶지 않다.

     

     

     

     

    그녀와 보낸 시간들에는 열정이 너무 많이 묻어 있었다.

    곰곰이 따져 봐도 그건 부정하기 힘들어.

     

    내게 열정의 흔적이 남아있다면 그건 내 안에 여전히 살아있는 그녀 때문이리라.

     

    나를 완전히 씻어내지 못하는 "그녀의 슬픈 애착"과

    내가 절절히 공명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확 불타올랐다 사그라질 운명이란 걸 알기에,

    요렇듯 자취만 남은 열정이 악착스럽게 자기 존재를 호소하는 걸까.

    그리고

    마지막을 지필 한 개비 성냥도 이왕이면 그녀여야 한다고

    집요하게 고집하는 걸까.

     

    "과거로 회귀하는 단순함"에서 위험 요소만 얄밉게 도려낸

    "추억으로 각색된 새로움"을 꿈꾸며,

    재로 변한 지 오래인 열정의 미미한 온기가

    그녀 또한 새롭게 타오르기를 맹랑하게 고대하는 걸까.

     

     

    하지만 문제는,

    둘 다 서로의 불쏘시개가 되기엔 너무 많이 식어 있다는 것.

     

    본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열정의 상실을

    노화하는 인간의 한계로 덤덤하게 받아들여,

    무에 그리 급한지 서둘러 내면화하였다는 것.

     

    한쪽이 다시금 활활 타올라 상대를 끌어안아야 하고 그것은 일종의 희생인데

    그녀와 나 이제는 그럴 의욕이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는 것.

     

     

    사랑은 영원하되 무릇 성장에 걸맞게 진화해야 한다는

    세상의 진부한 진리에 어설프게 맞장구치느라,

    우린 정작 "사랑"을 놓치고 있는 건지도.

     

     

    그래,

    서로의 열정을 탐닉하던 시절이 가능했던 것은

    수동적인 열정을 암사마귀처럼 쥐고 흔들던 적극적인 열정 때문이었어.

     

    소극적인 내게 먼저 다가서는 쪽은 언제나 그녀였지.

     

    그녀의 저돌성에 중독되어, 고통과 환희의 소용돌이를 헤어날 여력 없이

    "멈춰진 시간" 속을 헤매던 그때가,

    추억이란 당의정을 입고 깊디깊은 사랑으로 미화된 감 없지 않으나,

    솔직한 여인의 "가감 없이 순수하여 감미롭던" 진실을 맛볼 수 있어서

    그런대로 의미 있는 시기이기는 했어.

     

    그렇다 보니

    이때의 미성숙했던 습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그녀가 성큼 다가오기만을 은근히 바랐던 걸까.

    남자답지 않게..

     

     

    함께 지내는 시간 내내 여자이고 싶었으나

    부응하지 못한 남자한테 실망이 컸을 그녀에게,

     

    재회가 선사할 소박한 희망까지

    가당찮은 미련인 양 훌훌 털어 버렸을 그녀에게,

     

    "한때 내게 바친 열정"을 비정상적이라 선언하고 안락사시켰을지 모를 그녀에게,

     

    또다시 열정의 불균형을 감수하라고 종용한다면

    그건,

    그녀와 내가 애써 믿고 있는 "우리의 사랑"에 대한

    아주 질 나쁜 모독이리라.

     

     

    그럼에도 가끔은,

    그녀의 무모함에 은근히 기대어 안주하던 그때가 그리워진다.

    이것은 악마의 상념인가.

     

    만남을 지속할 때 원죄 의식에 시달리는 참담함을 겪었으면서도,

    강렬한 유혹을 거부하지 못하고 몰래 따 먹는 사과의 달콤함에 기꺼이 젖어들던

    어리석음이 때로는 그립다. 어리석게도.

     

     

    끊임없이 달려드는

    갈등과 분노, 두려움과 불안, 좌절과 포기, 슬픔과 허무에 치를 떨었지만,

    그럴수록

    애잔함과 그리움, 집착과 갈망은 짙어져만 갔지.

     

     

    속절없이 빠져들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자르지 못하고

    미묘한 감정의 유희를 쫓아 부질없이 쳇바퀴를 돌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감히 단언컨대 그것은 아마, 우리의 연정이 욕정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리라.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를, 당시의 복잡한 심리 상태를 들어

    그녀는 내게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을 테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만남 동안 서로의 육신을 탐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에 대한 보상이었다 해도.

    일상의 고단함, 삶 자체의 괴로움을 잠시나마 잊기 위한 도피처였다 해도..

     

     

     

    우리의 애달픈 애틋함은, 하나 되기 위한 갈구와 다름 아니었다.

     

    결합하여 다시 허탈해질지언정 일단 결합은 하고 봐야 하는 간절함이었다.

     

     

    이제 와서 그녀와의 인연을 평가절하하려는 건 아니다.

     

    혹은, 그것은 정당한 사랑이었으니 떳떳하게 만나 예전처럼 살을 섞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시점에서 왠지,

    재회 이후 조금씩 덮어온 가식의 베일을 벗어야겠다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감추려 했던 "관계의 본질(?)"을 명확히 하고픈 충동이 들었을 따름이다.

    그래야 답답한 숨통이 조금이나마 트일 것 같아서..

     

     

     

    어쩌면, 가장 고귀할 수 있는 무엇이

    그간 과도하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 부분을 정립하지 않고 두루뭉술 넘어가다 보니

    그 여파가 괜한 오해들을 낳았던 것도 같다. 부작용이랄까..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주관적 직감이므로

    객관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라고

    그녀가 다그쳐도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그냥 건강히 사는 데까지 살아볼 요량을 열정과 혼동하며

    쥐 죽은 듯 지내는 나에게

    진정한 열정이라는 것이 남아 있다면,

     

    생에서 마지막일 수 있는 그것이

    실은, 더도 덜도 아니고

    딱 그녀를 향해 발산할 분량만 남은 것이라면,

     

    자신의 명예와 가족의 영달을 위해 한 몸 불사르는

    또래 가장들의 실속 있고 미래 지향적인 열정과 달리,

     

    심오한 깨달음과 숭고한 박애의 실현을 추구하는

    종교적 열정과도 달리,

     

    그것은 그저

    열심히 안아주고픈 (나잇값 못하게 퇴행적인)

    때늦은 청춘의 발가벗은 욕망에 불과한 것임을 어쩌랴.

     

     

    세월의 흐름을 한탄하는 그녀는

    마치 폐경기 여성과도 같이 행세하며 나날이 무미건조해져 가는데,

    혼자 껄떡대며 운우지정을 기대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런 쓸쓸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를 원하지는 않는다고!

     

    그러니까 내 얘기는,

    과거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청산할 부채인 양 부담스러워하지도 말자는 것이다.

    더군다나,

    극복해야 할 잘못으로 여겨 죄책감을 꼬리처럼 다는 우(愚)는 더욱 범하지 말자는 거지.

     

     

     

    그녀는 크게 잘못한 것이 없었어. 많이 속상하게 하는 쪽은 주로 나였지.

     

    티격태격하며 행복과 불행 사이를 수시로 왕복하였지만,

    그러는 중에도 그녀와의 유대감이 주는 야릇한 희망은

    절망으로 허덕이는 나를 곧잘 지탱해 주었어.

     

    살을 부비고 따뜻한 체온을 품을 희망 말이야.

     

     

    아이러니하게도,

    살 떨리는 일탈을 행하면서

    고질적 만성 불안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누군가의 심적 고통을 담보로 하는 "임자 있는 몸과의 쾌락"이 과연

    마냥 흥분되고 즐거웠을까.

    정확히 그 반대였지만 난 그녀를 끊어내지 못하였고 덕분(?)에,

    악마에게 영혼을 판 유다와 같은 삶을 살게 되었다 지금도 망상하지.

     

    그런데 현재는 말이야,

    내면을 잠식하는 이 악마적 이중성까지 순진하고 귀엽게 느껴져 흐흐..

     

     

     

    육욕이 매개가 되었든 아니든 당시의 초심은,

    기껏 쌓아온 점수를 깎아먹고 변질되어가는 "우리의 현 상황"보다야 차라리 순수한 것이었으리.

     

     

    솔직해질게.

     

    눈에서 멀어지고 마음에서도 멀어져 감을,

    시나브로 관심의 영역에서 사라져 감을,

    (조금은 씁쓸하지만) 이성(理性)은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에도,

     

    청승맞은 정염이 감히 회춘을 바라며, 플라토닉한 그리움을 빙자하여

    불순한 아쉬움을 차마 떨쳐내지 못하나 보다.

     

    금욕에 어느 정도 이골 난 고고한 가식이

    뜨문뜨문 찾아오는 요 철면피한 "춘정 발동기"를 섣불리 얕잡아 보았다가

    뒤늦게 큰코다치고 있나 보다.

     

     

    명분을 가지고 세련되게 젊어지는 걸 추구하는 명망가 어르신들의 점잖은 욕심과 다르게,

    용두질에 몰두하는 소년의 단순한 정욕 같은, 노쇠한 적 없는 "욕망의 에센스"가

    더는 못 참고 본능적으로 안테나를 세워 그녀를 찾아 나서는 걸까.

     

    첨이자 마지막 기회를 내게 한번 더 주려고?

     

    열정의 하찮은 불티로 기어이 옥문을 파고들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건지..

     

     

     

    재회의 기쁨을 그럴싸하게 지어내는 것이 지겨워, 한 번씩 투정을 부릴 적마다,

    그 대가는 냉혹하여 오해의 골만 깊어갔지. 서먹해지고.

     

     

    헐떡이는 진심을 그녀에게 노출하는 게,

    그녀의 초탈한 아량에 기대어 "감춰둔 속내"를 풀어내는 게, 정녕

    건재하고자 용을 쓰는 열정의 치졸한 생존 방식이란 말인가!

     

    가식을 벗고 "남자"를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과연

    내 속에 있는 미지근한 흔적이,

    그럴듯한 열정으로 타오를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을까.

     

     

     

    그녀 앞이니까, 낯부끄러운 이야기도 끄집어낼 수 있는 법.

    적어도 그 정도의 밀착은 서로에게 용인하고 있으니.

     

    원래부터 솔직하였던 그녀의 입장이야 항상 초지일관일 테니까

    (더 이상의 로맨스는 꿈꾸지 않는다니까)

    오히려 안심하고 이렇게 써 내려갈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코드가 다시 일치하여 에로틱 무드를 재현하게 된다면 덤과 같은 기쁨이겠지만,

    예전의 왕성했던 내가 아닌 만큼, 현실성 없는 "악마의 선물"에 집착하지는 않으리.

    즉, 현실을 각성한 그녀가 괜스레 공연한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단 뜻이지.

     

     

     

     

    그녀를 향한 열정은 아무래도 여기까지가 한계인 것 같다.

     

    그래도 나는 만족한다.

    나의 마음을 읽어 줄,

    내 독특한 정서를 보듬어 줄 "영혼의 반쪽"이

    멀지 않은 곳에서

    언제나 함께 호흡하고 있으니.

     

     

    존재함만으로 마지막 열정을 이쁘게 다듬어 줄

    그녀에게 감사하며

    두서없는 열정의 한자락을 이만 접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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