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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미완(未完)을 거니는 고독 : 시를 아는 척 2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3. 1. 31. 15:36
서양인들의 시론이 반 넘게 차지하는, 지루한 책이 있었습니다.
우리를 가르치던 머리 희끗한 교수가 그 책은 꼭 사야 한댔지요 아마.
(그 역시 시인이었습니다.)
그가 사라는 책들은 하나같이 절판되어 구하기 힘들더군요.
하는 수 없어 단골 헌책방으로 달려갔답니다.
암시의 효능 떨어져 바스러지는 초라한 세상 앞에 서서
빽빽이 꽂힌 의기소침을 둘러보았습니다.
시취에 코를 쥐고,
죽은 시선(視線)이 누워 있는 종이 관(棺)을 찾아보았습니다.
다행히 책은 있더군요!
그 책을 소유한 우리는 하나같이 시인이 되었지요.
무슨 이유인지 그 녀석만 책을 사지 못하였습니다.
돈이 없어서였을까. 게을러서였나..
그 책을 옆구리에 낀 우리 모두가 시인일 때
그놈은 그저 그놈일 뿐이어서 불안하였나 봅니다.
그리도 옆구리가 허전하던가.
책을 끼어 구부정한 우리 앞에서
팔 벌리고 펄쩍 뛰어나 볼 것이지, 이 사람..
우리가 그리도 부러웠나.
노교수의 번듯한 이마 대하기가 그렇게 면구하던가.
구석 자리에 앉아 질끈 눈 감고 몽상이나 할 것이지, 이 사람.
그의 시를 향한 열정이 아마도 대단하였던 게지요.
권태로운 나에게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책을
그의 반짝이는 눈이 용케도 포착하였으니 말입니다.
겨드랑이에 달린 묵직한 종양처럼 거북살스럽던
내 옆구리의 책을 기어이 점찍었으니 말입니다.
흐트러진 내 거동을 살피느라 그리 안절부절못했구먼.
바로 옆에서 슬쩍할 만큼 절망적인 용기를 부리었던 거구먼.
자넨 모를 거야.
견고한 가방 안에 내 책을 쑤셔 넣고 잠글 여유도 없이 달아나던,
자네의 달아오른 경직이 얼마나 희극적이었는가를.
녀석의 뻑뻑한 의지가 잠시 실성하여 그 책을 팔아다 술이나 마셨기를,
간절히 빌었건만..
거나하게 취하고 싶은 이들이 낡은 책을 훔칠 리 없지요.
그의 시를 향한 열정은 대단하였던 겁니다.
나 몰래 가져간 책을 옆구리에 끼고
노시인의 번듯한 이마를 떳떳이 주시할 그 녀석은, 아마
"내가 빈 우리"와 함께 시인이 되었겠지요.
서양인들의 시론이 반을 넘게 차지하는 지루한 책,
"권태로 무장한 내"게서 벗어나려고 그토록 몸부림치던 책이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났습니다그려.
자넨 그렇게 당당한 시인이 되었고,
노(老) 시인의 강의를 골백번 들어도
자네 덕분에 난 항상 그저 나일뿐이네그려. 고마우이!
또 써야지.
형용사 [아름다운]에 굴복하여, 진부함이 득세하면,
"ㅇ+ㅏ + ㄹ+ ㅡ + ㅁ = 아름다운 (보이는) 것"이 사라집니다.
"ㄷ+ㅏ + ㅇ+ ㅜ + ㄴ = 아름다운 (보이지 않는) 것"이 사라집니다.
사라질 것은 다 사라져야, 형용사 [아름다운]이
시 속에 편입됩니다.
내가 사람이라 또 사람 얘기를 합니다.내가 신이 아니라서 또 하나님 얘기를 합니다.
착한 사람 / 보통 사람 = 1/4이면
악한 사람 / 보통 사람 = 3/4인
세상에서,
장사 못하는 하나님은 1/4 + 3/4 = 1이라고 하십니다.
착한(?) 사람 / 보통(?) 사람 = 1/4
악한(?) 사람 / 보통(?) 사람 = 3/4인
세상에서,
장사하는 하나님은 1/4(?) + 3/4(?) = 1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착한(?) 사람 / 보통(?) 사람 = ? / ?
악한(?) 사람 / 보통(?) 사람 = ? / ?인
세상에서,
장사 잘하는 하나님은 ? / ? + ? / ? = ?라고 하십니다.
착한 사람 / 착한 사람 = 1이고
착한(!) 사람 / 착한(!) 사람 = 1인세상에서,
장사 안 하는 하나님은 1 + 1 = 0 속에 계십니다.
장사 잘하는 하나님을 믿는 내가, 시를 쓰는 건 당연해.
원고지에 귀를 대면, 손익을 따지는 아우성이 들려요.
ㄱ,ㄴ,ㄷ,... 속에서 경합하는
피맺힌 울림이 있어요.
아, 드디어 마지막 연이구나.
운율을 고르는 우쭐함이 [생명]을 망각하기 전에,
ㅅ.ㅐ. ㅇ. ㅁ.ㅕ. ㅇ.들이 각기 반란을 꾀하기 전에,
빵 냄새 그윽한 잉크에 취해 아주 잠들기 전에,
서둘러 이쯤에서,
장사하는 하나님께 팔
또 한 편의 미련(未練)을 완성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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