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미완(未完)을 거니는 고독 : 시를 아는 척 1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3. 1. 29. 19:17
답장드립니다.우선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경우는,
세세한 분석보단 감상 후의 처음 느낌이 소중하답니다.
시인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저만의 감흥이라고나 할까요..
여기에 초점을 맞추므로, 난해성 여부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아요.
시가 가지는 주관적 모호함은
그 자체로 완성도에 기여하는 장치일 순 있어도,
확고부동한 해석과 진의가 반드시 따라와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처음의 느낌이 애매함일 뿐이라도
그것이 펼쳐 보이는 다양한 상상의 가능성과 역동성은
감동적인 유희를 제공한답니다.
외람되지만, 저 역시 헷갈리는 "제 의도"에 큰 비중을 부여하지 마시고
유희적 상상력으로 시를 가볍게 다루어 주시면,
제가 한결 부담을 덜 것 같네요.
시의 심각성은, 시가 되고픈 절실함만큼이면 충분한 듯합니다.
시를 넘어서는 철학적 관념적 논란은, 시에게 유해할 따름이죠..
진부한 얘기일 테지만,
누군가가 시를 읽은 이상 그것은 그 누군가의 시입니다.
누군가의 느낌과 상상 그리고 그것들이 조합된 견해는,
시를 살아있게 해요. 영광스럽게도..
본인의 시를 스스로 설명한다는 것은, 언제나 진땀 나는 작업이랍니다.
풍부한 다의성으로 보드라운 시에, 콘크리이트를 붓는 기분이지요.
건강과 행운이 항상 함께 하길 빕니다.
졸시에 관심과 애정을 주시니,
저로선 크나큰 힘과 위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제 설익은 감성이 소박한 감동이나마 드릴 수 있어서 정말 기뻐요.
아울러, 고견과 따끔한 비평도 겸허한 자세로 받겠습니다.
저에게 습작이란,
일상적이고 사회적인 언어와의 결별을 위한 악전고투입니다.
영감이 무궁무진 샘솟아 자동필기하듯
화려한 기발함, 자연스러운 독창성, 심오한 즉흥성을 쏟아내는 천재와는,
애초에 거리가 멀기에,
평범한 단어에서
상식화된 이미지와 보편적인 뉘앙스를 과감히 제거하려고
무척이나 애를 씁니다. 잘 되진 않지만요..
힘이 잔뜩 들어간 다소 억지스러운 집착이랄까요..
그래서인지,
물 흐르듯 잘 뽑아내는 베테랑들의 유연한 역량이 부러울 때가 많습니다.
특히, 표현하고자 하는 본질(?)과 대응하는 단어를 고를 땐,
그 언어가 가지는 편견에서 최대한 자유로워지려고 발버둥 쳐 봅니다.
다행히, 주제인 "본질"의 모호성 덕분에,
선택된 단어는 제법 말랑말랑해지는 편이에요.
물론, 감상하는 분의 찰진 상상력 또한
이러한 시도를 실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시에 생명을 부여하여 확대 재생산하는 필수 과정에, 없어서는 안 되는 분이지요.)
어차피 언어의 상징성을 극대화하는 작업에 몰입한 이상,
관습화된 어감을 철저히 무시하고픈 욕심에 매달려 보려고요.
은유의 대상과
그것을 상징하는 단어 사이의
굳은 약속을 깨뜨리고 싶어요.
보편성이라 불리는, 그들 사이의 일관된 유착 관계를 끊어 버리고 싶습니다.
상반된 의미를 지녔다고 흔히들 여겨지는 두 단어가
하나의 대상/느낌을 상징할 수도 있고,
반대로,
하나의 단어를 가지고도
서로 다른 두 대상/느낌들을 상징할 수 있다고 봅니다.
가령, 시 안에서는 흰 토끼가 흴 수도 있지만 검을 수도 있답니다.
또, 하얀 메밀밭 가운데 서서 까만 밤하늘을 하얗게 볼 수도 있는 것이죠.
인식의 대상이 되는 실존 자체도,
주관적인 인식 작용만큼이나 유동적이고 불확정적이라고들 하는데..
마치,
고착을 거부하고 변화를 갈망하는 (현실의 저와는 많이 다릅니다만..) 잠재적 자아가
내면에서 자꾸만 시를 초월하라고 속삭이는 것 같아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어 변화무쌍하게 꿈틀거려야
보편(?)적인 예술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가당찮은 역설을 고집하는 것 같아요..
시라는 장르에 누가 무슨 짓을 하여도 그에게 면죄부를 주세요.
교과서적인 해석이 가능한 "박제된 시"들은 왠지 좀비 같습니다.아주 쉽게 이해되는
(사물에 대한 삐딱한 시선과 복선이 없고
의미의 의도적 왜곡이나 화려한 위장이 없는)
명확하면서 담백한 작품들을,
소박하고 다정다감한 인간적 감흥들을,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
이는 취향과 선택의 문제일 뿐..
제 습작들 중에서
형이상적 주제를 관념적 언어와 난삽한 수사로 표현한 것들은,
일단 십 프로 부족한 구닥다리들입니다.
화장술이 어설퍼 들떠 버린 화장 같다고나 할까요.
퇴고 정도가 아니라 폐기처분해야 마땅할 것들이지요.
제가 지향하는 시관은,
우주나 인생의 본질 운운하는 꽤나 거창한 주제를
비교적 평이한 언어로 담담하게
그러나 세련된 상징과 기교를 구태여 배제하지 않고
그려내야 한다는 것인데,
이 경우
시들은 대개 다중적이어서 중첩된 의미를 가지게 마련이지요.
이때, 관념적인 "속뜻"은 지은이가 발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저의 개인적 견해입니다.
관념 자체가 고정적이지 않거늘
시를 굳이 철학의 시녀로 자리매김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읽으시는 분들이 유추해 내는 여러 다양한 "겉뜻"들이야말로,
시를 풍성하게 하는 자양일지언정 결코 혼돈은 아니라고 봅니다.
설사 겉뜻이 속뜻과는 전혀 이질적일지라도,
그것이 시의 생명력에 누가 되진 않는다고 생각해요.
일부로 카오스를 조장하려는 치졸한 앙큼함만 자제한다면,
창작의 고통이 순산한 모호함도,
평가절하의 대상이 아닌 예술적 가치로서 인정받을 수 있겠지요..
본질조차도 주관적이고 불확정적이라 봅니다.(우린 "포스트 아인슈타인"의 시대에 살고 있다지요.)
따라서 본질을 파악함에도 패러다임의 변화는 불가피합니다.
흙의 본질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시대가, 과학이, 상식이 주입한 (흙에 대한) 고정관념을
우리는 본질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표현 수단이나 기법의 문제가 아닙니다.
본질에 관한 해석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데 머물 것이 아니라
본질부터가 다양할 수 있음을 심각하게 고찰해 보자는 겁니다.
흙을 물처럼 공기처럼 묘사하는 화가나 조각가 앞에서
함부로 표현의 미숙함을 논할 일이 아니란 겁니다.
피카소의 그림 속 "여인"은, 어쩌면
여인에 대한 그의 "주관적 본질"이 반영된 수준을 넘어
여인의 다른 본질을 그가 발견한 결과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그림에 대하여 이러한 부분을 미주알고주알 떠벌였다손 쳐도
그것으로, 그의 작품이 가지는 주관적 모호함이 객관성을 입증받지는 못합니다.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영역이
그의 그림을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지요.
시는 주관이 극한까지 발현되는 문학 장르이므로,위에 언급한 형이상적 측면도 고려하여 다양성을 존중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업적 성공을 의도한 "대중성과의 타협" 유무와는 별개로 말이지요.
(돌연변이가 아닌 이상, 시란 놈이 원래 상업성과는 상극이지만서도..)
동일 잣대로,
인간의 근원적 서정에 흠뻑 와닿는 토속적인 작품들, 그리고 그 대척점에 있는
개성 만점의 재기 발랄한 (혹은 포스트모던하거나 심지어 키치한) 시들까지도,
본질의 상대성에 대한 투명한 관조의 산물이요
실존적 부조리에 대한 묵직한 고뇌가 걸쭉하게 우러나 동동 뜬 가벼움의 발로라면,
그것들을 섣불리 무시하는 우(愚)는 범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저의 습작들은 대부분, 소위 "문법적 기본"도 안 되어 있으면서
보여주고자 하는 강박만으로 무분별하게 실험주의를 표방하거나
엉성한 상징, 서투른 유미주의, 어색한 모더니즘에 안주하는,
아마추어리즘의 오류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노력은 경주하되
저의 이러한 시관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산다는 것의 고단함이 창작의 에너지를 많이 앗아가는 현실이지만,
시에 관한 제 견해만큼은
자부심을 가지고 누구 앞에서나 당당하게 피력하렵니다.
"시가 어렵다"는 핸디캡이 진정성을 스스로 갉아먹는 꼴이지만,
이와는 별개로
저의 허술한 논리 역시 언제나 딱딱한 거부감을 유발할 수도 있겠군요.
그다지 신선하지 않고 촌스럽기만 한 "논리의 비약"을
끝까지 참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 미완(未完)을 거니는 고독 : 시를 아는 척 2 (0) 2023.01.31 19. 욕망을 거니는 고독 : 사랑 속으로 2 (0) 2023.01.31 17. 욕망을 거니는 고독 : 사랑 속으로 1 (0) 2023.01.28 16. 결핍을 거니는 고독 (0) 2023.01.27 15. 욕망을 거니는 고독 : 사랑 뒤에서 (3) 2023.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