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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결핍을 거니는 고독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3. 1. 27. 21:10
추위가 거리를 누비면, 추위를 쫓는 산책에 나선다.
건물과 건물 간의 밀어에, 언 귀를 기울여도 보고..
논쟁과 결속이 보일러를 가동하는 집들.
불안이 꽁무니에 힘을 주어 미끈한 담장을 자아내었다.
안도(安堵)를 기대하며 담 따라 미끄러지는
시린 얼굴의 주인들.
얽힌 보금자리들의 중심에 후끈 도사린
맛난 다정(多情).
하나 둘 켜지는, 창(窓)끼리의 밀회.
어둠 속 밝음들의 묵계는,
유리에 부딪는 한풍(寒風)의 암호를 즐겁게 외면한다.배고픈 산책이
코끝을 스치는 매서운 위로에 힘입어 귀환하는 곳.
저물어도 밝을 줄 모르는 깡마른 창문.
당당한 조명의 주시를 피하여,
상기된 절망이 비추이지 않는 저녁으로
캄캄함에 순응하는 후미진 구멍으로
들어간다.
무모하게 열린 틈에서
동사(凍死) 직전의 쓸쓸함이 꾸역꾸역 밀려 나온다.
서글프도록 경박한 인색함이 이제야 깨우는 공용 난방기.
의미심장한 게으름을 멸시하는 야멸친 환기(換氣)가,
얼어붙은 수도관을 선사한다.무릎을 쑤시는 잔풍(殘風)이 엎드려 졸고 있는
삭막한 보금자리.
꾀죄죄한 멈춤을 거니는 여행이,
한가로운 위기를 사모하여 장기투숙하는 곳.
아사(餓死) 직전의 궁상이 편안하게 망설이는,
그곳에서,
상처 입은 크로마뇽인은
고립된 욕망을 으깨어
쓸모없는 벽화를 그린다.
젖은 빨래의 습기가, 사방 벽에 암호를 적어 놓는다.
광인(狂人)의 태연한 궁금증이, 즐겨 꾸는 슬픔처럼 부푼다.
베개 밑까지 내려온 암호는,
성가신 잠마다 가위 누르던
질퍽한 체취를
고스란히 머금었다.
달과 태양의 시큼함,
수성 금성의 냄새,
화성 목성 토성의 소리,
천왕 해왕 명왕성의 환각마저 간직한
암호의 추근거림에
가래가 끓는다.
새끼발가락을 야무지게 깨무는
바퀴벌레의 결심이, 십억 년을 이어 온다.
간지럼 태우는 진드기의 낙관(樂觀)이 원하는 것은,
한바탕 재채기뿐.
번지는 콧물 속에서 꼬물대던 바이러스가
퀴퀴한 이불 위로 시원하게 뿌리어지면,
침방울들의 점괘도 어찌할 수 없는
지금이,
소름끼치도록 마렵다.
끼니를 걱정하면 가벼움은 무거워진다.
다채로운 찬들이 끼이지 않는,
그윽한 맨밥과의 하루 한 차례 상견례.
한 공기 맨밥의 모락모락 올라오는 사랑은,
반반한 찬들이 버린 가벼움을 거둔다.
배고파 잠에서 깰 때도 물론 있어.
냉수 한 잔 들이켜고 창을 열면,
시장 어귀에서 부침개 지지는 초저녁이
어스름을 타고 날아들어.
아껴가며 조금씩 부침개를 베어무는
가슴 졸임이
명왕성 뒤에서 날아와,하품하는 아주머니의 주름진 손으로
지글거리는 반죽을 뒤집어.
부침개 냄새와 헤어지기 아쉬운
위장을 달래면서
철길을 걸은 적이 있어.
레일에 뺨을 붙이고, 다가올 고향의 소리를 들어.
길을 차지하고 방황하는 열차.
궤도를 벗어나려고 울부짖는 바퀴들.
레일의 한쪽을 밟고 도열한 남자들.
다른 한쪽을 밟고 늘어선 여자들.
끝이 안 보이는 저편으로 점점 작아지는 남자들.
끝이 안 보이는 이편으로 점점 커지는 여자들.
그녀들의 능란한 솜씨에 행성처럼 단단해지는 남자들.
더는 참지 못하고 철길 위로 뿌려지는
나.
자외선이 달구어놓은 지평선 위에
운명을 두르고 나를 부치는,
노쇠한 노을에게서
언제나 고소한 쩐내가 풍겨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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