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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아이를 거니는 고독 : 동물원에서 2
    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3. 1. 20. 23:58

     

     

     

     

     

     

     

     

     

     

     

     

     

     

     

     

    오싹한 반가움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서일까.

     

    매번 누군가와 함께였는데 이번만은 혼자 오고 싶었습니다.

     

     

     

    잔인한 기억들로 조잡하게 기워진 추억은

    처절한 환상입니다.

     

    어수룩하여 현실을 짚어도 절뚝거리는 추억은,

    둔갑하여 홀리는 환상들이 너저분하게 널린 그곳에서

    차라리, 요망한 그것들에게 잡아먹히고 싶었습니다.

     

     

     

    여전히 봄을 점령한 게이샤들은

    방정맞은 거짓 눈물을 하얗게 쏟았고,

    그 팍팍함에 나도 여전히 목이 말랐습니다.

     

     

     

    어린애처럼 아이스콘을 핥으며 독수리 우리를 기웃거립니다.

     

    근처 벤치에 홀로 앉아 싸구려 하드를 핥는 아이가 눈에 뜨입니다.

     

    데자뷰!

     

    보이지 않는 요정의 인도(引導)였을까요.

    나는 다가가 어리디어린 외로움 옆에 앉았습니다.

     

     

     

     

    귀여운 아이야

    엄마는 어디 가고 네 혼자 이러고 있니?

     

     

     

    아저씨 또 왔네?

     

     

     

    나를 알아?

     

     

     

    응. 꿈에서 봤어.

    아저씨도 엄마 기다려?

     

     

     

    아아.. 엄마..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면 온댔어.

     

     

     

    엄마가 어떤 아저씨랑 같이 가셨니?

     

     

     

    어떻게 알아? 그 아저씨 미워..

     

     

     

    너, 네 살?

     

     

     

    우와, 또 맞혔다. 아저씨 천사야?

     

     

     

    엄마 올 때까지 지켜줄게.

     

     

     

    응. 나쁜 사람들 오면 아저씨가 때찌 해 줘.

     

     

     

    그 아저씨가 엄마 많이 좋아해?

     

     

     

    응. 아빠도 아닌데 엄마 사랑해.

    이따 오면 아저씨가 때찌해 줘. 엄마 뺏어가지 못하게.

     

     

     

     

    아이가 되어, 아이보다 더 초조하게 엄마를 기다립니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막대사탕을 먹고

    초콜릿과자를 먹은 뒤에도

    엄마는 오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자꾸 흐르자

    참을성 있던 아이가 울먹이기 시작합니다.

     

     

     

    괜찮아.

     

     

     

    머리를 쓰다듬다가

    결국 울음이 터지자 꼬옥 안아 주었습니다.

     

     

     

    아가야, 엄마가 적어준 종이 있니?

     

     

     

    없어.

     

     

     

    '집에 무사히 데려다줘도 엄마는 없겠지. 정말 슬픈 건 그것이란다.

    엄마가 집이고, 집이 엄마였는데..

    이제 엄마 없는 집으로 가야 한단다.

    엄마의 숨결이 묻은 집에서

    기약 없이 엄마를 기다려야 한단다.'

     

     

     

    엄마한테 데려다줘.

     

     

     

    엄마도 길을 잃었나 보다.

    아저씨 하고 엄마 찾으러 가자.

     

     

     

     

    아이의 손이 나처럼 차가웠습니다.

     

    우리는 손을 잡고

    우리와 우리 사이를 누비었습니다.

     

    인파 속에서도 왠지 아이의 엄마를 알아볼 것만 같습니다.

     

    어릴 적 잘 알던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희미해져

    아련한 체취로만 남은 사람.

    꿈에 그리던 얼굴..

     

     

     

    엄마가 잘 보이게, 목말 태워 줄까?

     

     

     

    어깨가 아프고 등이 땀으로 흥건해도 아이를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드넓은 동물원을 돌고 돌았습니다.

    허름한 행색의 아저씨가 나에게 그랬듯이..

     

     

    슬픔이 지쳐, 눈물 마른 아이의 건울음마저 잦아들 때

    내 눈에 고였던 처량함이 더는 참을 수 없어 주르륵 흘러내립니다.

     

    아이의 찬 손이 내 볼을 만지다가 뜨겁게 여문 절망에 닿습니다.

     

     

     

    아저씨도 엄마 못 찾아 우는 거야?

     

     

     

    꼭 찾고 싶었는데..

     

     

     

    나 배고파..

     

     

     

    저런 배고팠구나. 아저씨랑 맛있는 것 먹자.

    우리, 밥 먹고 경찰 아저씨한테 갈까?

     

     

     

    싫어. 아저씨랑 있을래.

     

     

     

    내가 안 무섭니?

     

     

     

    날 지켜 주러 온 천사 아저씬데 뭐가 무서워?

     

     

     

     

    카페테리아에서

    아이에게 먹일 돈가스를 잘게 썰며 깨달았습니다

    사랑해야 할 현실은 참으로 환상적임을.

     

     

    정성껏 썬 고기 조각을 사랑스러운 현실이

    납죽납죽 받아먹을 때마다

    부자연스러운 서글픔이 품으로 파고들어

    소름 돋은 심장을 어루만집니다.

     

    서글픔으로 위장한 행복이지만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체할라 꼭꼭 씹어야지.

    물 더 가져올게 천천히 먹고 있어.

     

     

     

    아주 잠깐이었습니다.

    현실의 사랑이 사라지고 말았네요.

     

    온몸이 떨려옵니다. 아이를 잃어버리다니..

    나를 두고 혼자 찾아 나선 걸까.

     

     

    창경원에서 엄마가 사라진 날도 이처럼 절망적이진 않았습니다.

     

    식당 근처를 미친 듯이 헤매었으나 소용없었습니다.

     

     

    조금 전 아이가 앉았던 자리, 테이블 위에서

    잘게 썰린 희망들이 조각조각 목 놓아 울고 있습니다.

     

    적응 못해 후미진 철창으로 밀려난 짐승들도

    절망에 동참하여, 꺼이꺼이 오열하기 시작합니다.

     

     

     

     

    햇살 눈부신 낮에

    걸어 다니면서 꿈이라도 꾼 걸까요.

    가슴을 찢는 슬픔이 이렇게 생생한데..

     

     

    나를 사랑해 주는 현실은

    역시나 풀 죽은 환상이었던가.

    비루한 환상에 갇힌 짐승에게,

    친근하게 구는 구경꾼도

    맥 빠진 환상과 다름 아니듯.

     

     

    치명적인 기억을 달래 주던

    그 깜찍한 추억이, 어디로 숨은 것일까.

     

    이 넓은 동물원을 지금도 울며 돌아다니고 있을까

    잃어버린 엄마를 찾아서.

     

     

    그래 실컷 찾으렴 아가야. 불안해하지 말고.

    너를 만나 감격한, 내가 있잖니.

     

    포기 안 하고 기쁘게 너를 찾을

    이 아저씨가 있지 않니.

     

     

     

     

    한시름 놓은 해가

    환상과 현실의 숨바꼭질 위에 맛깔스러운 노을을 뿌리었습니다.

     

     

     

    세상이 동물원만하다면,

    치열한 환상의 도움 없어도 사랑을 쉽게 찾을 수 있을 텐데.

     

    수줍은 현실과 현실이

    삭막한 환상 뒤에서 살그머니 포옹할 수 있을 텐데..

     

     

     

    곧 어두워지겠지만 겁내지는 말아라.

    다 자란 환상은 감히 범접 못하도록

    나의 요정이 너를 곱게 보존할 것이니.

     

    널 지켜 주러 내가 다시 오면

    넌 언제나처럼

    벤치에 외로이 앉아 서늘한 달콤함을 핥고 있으리라.

     

     

     

    날마다 과격한 환상에 시달릴지라도,

    사랑하는 아이에게 다가가는 현실은

    고단한 기색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한 그리움을 얌전하게 기다리는 사랑한테

    다가갈 수 있답니다.

    그래야,

    슬픔과 기쁨을 모두 반기는 괴이한 그리움한테 달려갈 수 있답니다.

     

     

     

    품에 안길 어린 사랑이 동물원에 남겨져 있습니다.

     

    매번 혼자 와야 내 앞에 나타날 기묘한 사랑을

    그곳에 두고 왔습니다.

     

     

     

    앞으로는,

    아무리 어여뻐도 환영(幻影)과 함께 가지 않으렵니다.

     

    사랑스러운 실상을 만나려면

    단출한 하나의 삶이 홀가분하게 가야 합니다.

     

     

    잊지 않고 자주 가서

    순진한 "죽음 너머"와 재밌게 뛰놀고 싶습니다.

     

     

     

    내가 가야 되는 동물원,

    내가 안 가면 사라지는 동물원은,

    방긋 웃는 기적이 "고지식한 환상"을 화들짝 놀래키는 곳.

     

    추레한 환상이 "산뜻한 현실"을 입고

    좋아 어쩔 줄 몰라하는 곳.

     

    나의 사랑하는 분신과, 그를 돕는 귀신들이,

    시치미 뚝 떼고 "찡한 현실"을 꾸미는 곳.

     

    엄마라는 이름의 찬란한 그림자가 절절하게 아이를 따르는 곳.

     

    "사랑을 위해 죽어도 좋은" 사랑들이 베푸는,

    용서와 화해를 향한 끝없는 기회.

     

     

     

    나의 동물원에서,

    내가 사랑해야 할 현실이

    파릇한 전설을 한가로이 뜯고 있습니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아이는

    부지런한 혼으로 사육되어

    골육이 붙고 기혈이 돕니다.

    그리하여

    "내가 사랑할" 아름다운 현실이 됩니다.

     

    나의 심장에 내릴 참신한 뿌리가 됩니다.

     

     

     

     

    아가야,

    너 없으면 안 되는 나를 부디 사랑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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