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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 욕망을 거니는 고독 : 사랑 뒤에서
    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3. 1. 26. 02:56

     

     

     

     

     

     

     

     

     

     

     

     

     

     

     

     

     

     

    10월 하순

     

     

    만추의 쌀쌀한 저녁.

    퇴근 무렵의 휘황한 거리는, 화려한 의상을 입고 취해 비틀거리는 텐프로 아가씨처럼, 사치스러운 욕망으로 달아오른다.

     

     

    화연이? 지금 어디야?

    난 벌써 20분 전에 도착했는데..

     

     

     

     

    고급 중형 세단.

    화연이 운전하고 조수석엔 상준이 앉아 있다.

    미니에 가까운 검은색 긴팔 원피스가 그녀의 적당히 날씬한 몸매에 밀착하여 수줍은 볼륨감을 도드라지게 한다.

    제법 차가울 밤공기를 의식하여 걸친 부드러운 모피 숄 속에서, 그녀의 아담한 어깨가 - 야릇한 기대감으로 다소 들뜬 주인과는 달리 - 침착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시크한 섹시미를 물씬 풍기는 화장만큼이나 세련되어 보이는 (연한 갈색의) 웨이브 진 머리는, 숄에 얌전히 닿을 정도의 길이로도 여성미를 발산하기에 충분하였다.

    서른넷의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싱그러운 미모에,

    상준은 매번 보면서도 감탄을 반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엣지 있는 스타일 전반에 매혹된 나머지, 눈금이 촘촘한 검정 망사 스타킹을 느긋하게 곁눈질하기까진 시간이 다소 걸렸다.

    페티시의 마력에 갇혀 있는 농염한 꿀벅지는

    그물을 터뜨릴 듯 꿈틀대는 싱싱한 물고기의 탄력

    그대로였다.

     

     

    오늘은 또 어떤 시나리오를 설정하셨어?

    공범들하고 입은 잘 맞춰 놨고?

     

    왜..?

    쿨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은근히 걱정은 되나 보지?

     

    걱정은 무슨..

    갈 데 까지 가 놓고선 새삼스럽게..

    너나 나나 헐렁하게 바람피우다 나자빠질 타입은 아니잖아. 그러니 여기까지 왔지.

     

    후훗, 너무 안심은 하지 마. 허즈번드는 나보다 한 수 위야.

    언제든 내 허점을 파고들어 우릴 코너로 몰아붙일 수 있는 위인이지.

     

    그러셔? 어이쿠 무서워라.

     

    자아,

    오늘 이 누나의 보디가드 역할 확실히 하는 거다, 알겠지?

     

    아아, 짜증 나려고 해.

    내가 아는 여자들은 왜 이리 하나같이

    바깥양반들이 놔 주질 않는 걸까. 부담되게시리..

    콩가루 막장 모드로 맞바람 씽씽 피워대는 집 여편네들은

    죄다 어디에 숨어 있는 건지 원..

    꼴에 걸맞지 않은 이놈의 뻔뻔한 죄책감, 이거 영 재미없걸랑.

    따지고 보면 스트레스 날리려고 이 짓 하는 건데 적어도 더 쌓이진 말아야지.

    정떨어진 남편의 애착을 주체 못 해서 본의 아니게 살짝 공주과 증세 보이시는 미녀 누님들,

    잘나가다가 결정적일 때 날 지치게 하는 경향이 있어.

    화연이도 참고해 줬음 해.

     

    얘가 지금 날 어디다 찍어 붙이는 거야?

    날 그 정도로 밖에 안 봤다 이거지?

     

    아니 뭐, 당장 그렇다는 건 아니고..

    너 (남편에 대해서) 하는 얘기 가만히 들어보면 그럴 기미가 충분히 엿보여서 하는 말이야.

    마치 무의식은 남편이 계속 자기한테 집착하여 주길 바라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랑과는 별개로, 불안한 권태가 혹여 가져다줄지 모를

    비참한(?) 말로에 대한 일종의 든든한 보험인 양.

     

    풋.

    같지도 않은 소리 그만하시죠, 상준 씨!

    나야말로 기분 다운되려고 해.

    남자가 무어 그런 것 갖고 이러쿵저러쿵..

    상준 씨 답지 않아. 오늘따라..

     

    성 여사, 내가 너무 정곡을 찌른 거요?

    나 땜에 기분 상했다면 사과하리다. 성 여사 저조해지는 건 나도 바라는 바가 아니야.

    하지만 이참에 본질을 직시해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텐데..?

     

    얘가 오늘 뭘 잘못 먹었나..

    함께 밤바다 보러 가자고 꼬셔 낸 건 당신이랍니다. 낭만파 바람둥이 아자씨!

    네가 이전에 어디서 어떤 아줌마들을 만나 크게 데었는진 나 알 바 아니야. 그렇지만, 내 꼬이지 않은 일관성 그딴 식으로 모독하지는 마.

    어설픈 짐작으로, 마치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양 우쭐대지 말란 말이야. 재수 없으니까.

     

    나만 좋아해 주는, 나한테 푹 빠진 그런 일관성?

    남편은 안중에도 없고

    나랑 크게 사고 쳐도 후환이 두렵지 않은,

    무모한 열정의 일관성?

     

    네가 정말로 원하는 게 그런 거니? 아닐 텐데..?

     

    사고 치긴 싫고 오래가고는 싶고 그래서 더욱 치밀해질 수밖에 없는,

    알량한 낭만을 맛보기 위하여 현실을 치열하게 기만해야 하는, 그런 일관성??

     

    응. 그런 일관성..

    그게 어때서?

     

    어떻긴. 베리 굿이지.

    남들이 손가락질해도 우리만 좋으면 되는 파렴치함이 아니라,

    손가락질 못하도록 철저히 은밀하게 완전범죄를 실행하는 짜릿한 성실함.

    "결국은 들통 날 어리석음"을 완벽하게 차단하리라 장담하는, 야무진 "현실(?) 인식".

    그래서 열정의 수위를 조절하고 사랑 중독증에 걸리지 않으려는, 발악스런 조심성.

    너도 오케이?

     

    아직까진 자신감이 넘쳐.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너만 생각하면 그래. 너만 보면 그래.

     

    나도 그래.

    그러나 이런 걸 사랑이라 부르진 말자. 우리에게 최소한의 양심이 남아 있다면..

     

    알아.

    거창하게 양심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현재 우리가 하는 걸 사랑이라 하기엔 낯간지러운 면이 분명 있지.

     

    설령 사랑이라 쳐도 문제야.

    진행하는 사랑의 속성은 "깊어짐"인데, 이대로 유지하고자 몸부림치는 우리가, "깊어지는 사랑"의 불가측성을 견뎌낼 수 있을까?

    "도약하는 사랑"의 비가역성을 감내할 수 있을까?

    우리의 사랑이 작정하고 진화하면 우리는 그때 변하여 있을 테고,

    변화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지 지금의 우리로선 예측하기 힘드니,

    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그렇게 되면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자신감이 생겨날지 몰라.

    하늘 아래 부끄럽지 않는 "진정한 용기" 같은 것.

    그것으로 모든 걸 다 잘 해결해 낼지도 몰라.

     

    그래서..?

    사랑에 중독되고 싶어?

    우리의 관계를 사랑이라 명하고 본격적으로 발전시켜 나아가길 원해?

     

    아니..

    말하자면 그렇단 얘기지..

     

    "하늘도 인정할 사랑"으로 모든 어려움을 잘 헤쳐 나갔다 함이, 현재의 우리에게 뿌듯한 기쁨을 주지는 않아.

    상상조차 하기 싫은 난감한 상황들을 피하지 않고 맞닥뜨려 하나하나 극복해야 하는, 치욕스러운 과정이 수반되니까.

    사랑이 변화시킨 우리라면 모를까 지금 상태의 우리로선

    죽었다 깨도 이뤄내지 못할, 거의 불가능한 결과물이야.

     

    으으, 생각도 하기 싫어.

    우리 둘이 이러는 거 발각돼서 간통죄로 고소당하는 따위의 최악의 사태 말이지?

     

    에구, 귀여워. 하여간 이럴 땐 또 순진하단 말이야..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날 수 있겠어?

    벼랑 끝에 몰리는 난관이 찾아와도, 서로를 위하고 아끼며 단단히 뭉치는 사랑이라면, 패닉은 발생하지 않을 거야.

    의연하게 대처하면서 본인들이 저지른 죄를 수긍하고 묵묵히 죗값을 치러 내겠지.

    그러는 동안에도 사랑은 식지 않고 깊이 있게 확장하겠지.

    진정한 사랑이라면.

    사랑이라 불리어도 괜찮을 사랑이라면..

    극단적인 예를 들면서 몸서리까지 치는 걸 보니

    너도 꽤나 찔리긴 하는 모양이구나.

    아무래도 우리가, 발 뻗고 편히 잘 일을 하고 있지 않은 것만은 확실한듯해. 그렇지?

     

    주말에다 퇴근 때라 그런가 참 많이 막힌다.

    휴우, 이제야 겨우 서해안 고속도로로 들어섰네.

    차가 막히니까 많이 지루했나 봐.

    평소 안 하던 아니 할 필요도 없던 이런 요상한 이야기, 우리스럽지 않게 많이도 나눴다. 덕분에 조금은 덜 지루하였지만 그래도 쓰잘데기 없는 말들만 지껄인 것 같아 좀 그러네.

    이럴 바엔 차라리 음악이나 들으며 갈걸..

     

    그러게..

     

     

    소금기 머금은 목적지가, 일상에 린치를 가하며 희희낙락하는 두 남녀를 140킬로로 끌어당긴다.

    고속도로 위를 날아가는 차 안에선 다른 차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여인이 홍조 띤 색정을 자연스레 과시해도..

     

     

    상준아, 나 느끼고 싶어.

     

     

    귓가를 간질이는 화연의 속삭임에 상준은 긴장한 무표정이 된다. 그리고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기계적인 손놀림이 바지춤과 혁대를 무장 해제하고 있다.

     

     

    어머나, 이렇게 빨리? 나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역시 젊음은 대단해.

     

     

    화연은 우뚝 솟은 바벨탑을 가녀린 오른손으로 살포시 감싸 쥐고, 박동하는 뜨거움을 재미난 듯 음미한다.

     

     

    나도 널 느끼고 싶어..

     

     

    미세하게 떨리는 그녀의 오른손이 치맛단을 당겨 잡는다.

    상준은 땀이 밴 왼쪽 손바닥으로 - 그녀가 고이 감춰 놓은 - 탱탱한 보드라움을 쓰다듬다가 손가락에 힘을 주기 시작한다.

     

     

    어떡해? 몸이 너무 떨려 와..

     

     

    그의 손가락이 탭댄스를 출 때마다 화연은 경련을 억누르느라 무던히도 애를 쓴다. 그러나 통제가 안 되는 심한 떨림을 더는 어쩌지 못하고 결국 방목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그녀는 창피함을 느낄 겨를이 없다.

    두 사람은 히터가 켜진 차 안에서 비밀스러운 오한을 즐긴다.

    한 손으로 능숙하게 운전대를 고정하고 있는 화연의 시야가 좁아진다. 순간, 이들이 탄 차는 광속을 돌파하는 타키온 우주선이 된다.

    정면으로 달려드는 고속국도의 가장자리가 둥그렇게 휘어져 뭉개지고 있다.

     

     

    어머낫! 벌써??

    자기 오늘 좀 피곤했나 보다, 호홋.

     

     

    애초에 위태로움이 잉태한 연인들이어서일까.

    요 정도 행각쯤은 전혀 위협이 되지 않나 보다, 이들 남녀에게..

     

     

     

     

    새벽 2시

    ○○해변.

     

     

    좋다.

     

    으이그, 참 좋기도 하겠다. 춥기만 하구만.

     

    미안해. 나 혼자 좋자고 널 고생 시키네..

    그런데 이왕이면 긍정적으로 생각해 줄래? 나이 든 티 팍팍 내지 말고.

    이 검푸른 밤바다, 너와 단둘이 보고 싶었어.

    너와 함께니까 예까지 올 용기가 난 거야, 화연아.

    사는 게 고달파서 항상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어디론가"의 문제는 아니었어.

    누군가와 떠날 수 있느냐가 내겐 훨씬 중요했던 거야.

    "누군가"와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그 희미한 누군가가 이렇듯 진한 존재감으로 내 옆에 나타나줘서 너무 기뻐.

    내 답답한 숨통이 탁 틔어지는 건, 단지 저 망망대해와 코끝이 얼얼한 바닷바람과 상쾌한 파도 소리 때문 만은 아니야.

    그 누군가가 너여서 난 살 것 같아.

     

     

    상준은 입고 있던 트렌치코트를 벗어, 오들오들 떨고 있는 화연을 감싸주었다.

     

     

    후훗 하여간, 온갖 화려한 작업 멘트는 훤히 꿰차고 있다니깐.

    어디서, 순진한 처녀에게나 통할 닭살 멘트를 날리는 거야?

    나처럼 닳고 닳은 누나를 고작 그 정도 버터질로 감동케 할 작정이었어?

    맹랑하기는..

     

    알아, 안다고! 유치한 거..

    이럴 때 장단 좀 맞춰 주면 어디가 덧남?

    센스라고는 도무지..

    이래서 세상이 공평하단 거였군.

    미녀에게 무드까지 바라는 건 정녕 욕심이란 말인가.

     

    어린애같이..

    삐쳤어? 상준 씨?

    웃자고 하는 소리에 그리 울상을 지으면 어떡 하누.

    알았어, 손발이 오글거리긴 하지만 정 소원이라면 무드의 끝을 보여 줄게. 나중에 후회하기 없기다?

    차 있는 데까지 나 업고 가 줘, 응?

     

    또, 또, 머리 굴렸어. 하여튼 치밀해.

    좀 솔직해 보지 그래?

    지금 춥고 졸리고 다리 아프니깐 업어달라는 거잖아.

     

    그래서?! 싫다고??

    싫음 말아라..

     

    누가 싫데? 빨리 업혀.

    동기가 불순하면 어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뭐.

    흐으, 이 장면 또한 어쨌든 내가 그리던 그림이니까.

     

    진작에 이리 나올 것이지.

    튕기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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