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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 아이를 거니는 고독 : 동물원에서 1
    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3. 1. 18. 20:52

     

     

     

     

     

     

     

     

     

     

     

     

     

     

     

    엄마,

    더워. 아이스케키 사 줘요.

     

     

     

    창경원을 점령한 벚꽃의 느끼한 입김에, 아이는 목이 말랐나 봅니다.

    하늘하늘한 짧은 원피스의 맨다리에 매달려 칭얼대는군요.

     

     

     

    얘가 왜 이래? 얌전히 못 있어?!

     

     

     

    선글라스로 한껏 멋을 낸 젊은 엄마는,

    투정 부리는 네 살배기에게 오 원짜리 하드 하나 물려

    벤치에 눌러앉힙니다.

     

    같이 온 임과 함께 꽃무늬 양산 쓰고 어디론가 가 버려도,

    서늘한 달콤함을 핥는 동안 아이에게 절망은 없어 보입니다.

     

     

     

     

    귀여운 아이야,

    엄마는 어디 가고 네 혼자 이러고 있니?

     

     

     

    허름한 행색의 아저씨가 다가와

    어리디어린 외로움 옆에 앉습니다.

     

     

     

     

     

     

     

     

     

     


    통통하고 뽀얀 (갓 입학한) 여대생과 동물원에서 첫 데이트를 하였습니다.

     

    흑표범의 따분한 포효에도 화들짝 놀라던 작달막한 그녀였습니다.

     

    내게 보이던 감지덕지한 호감을 그때는 어째서 외면하였을까요.

    나의 환상에 못 미쳐서였을까요.

     

    현실감 부족한 얼뜬 환상이, 주제에 여자는 꽤 가렸나 봅니다.

     

     

    그녀 역시 나만큼은 어렸었지요.

     

    만개한 봄의 다사로운 풍경과 대공원의 발랄한 생기가

    온실의 화초 같은 여심을 충분히 들뜨게는 하였을 겁니다.

    "비현실이 쨍쨍한" 무중력 속에서,

    내가 사준 솜사탕을 오물거리며 애교 어린 미소를 연방 지었으니까요.

     

    나에게 반했다기보단,

    나를 감싸 안은 "그녀의 환상"에 도취하였겠지요.

     

     

    둘 다, 현실을 보듬을 준비가 안 되었던 겁니다.

    그게 사랑이란 걸 몰랐고, 알 자신도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밋밋한 분위기만 즐겼고

    그래도 괜찮을 나이였습니다.

     

     

     

     

     

     

     


    긴 머리의 이지적인 여성과 만남을 가진 지 네 번째.

    동물원에 갔습니다.

     

    부슬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오후, 비좁은 우산 아래에서

    남자를 체험하고픈 요염한 성숙이

    착 감기어 과감하게 팔짱을 끼었을 때,

    헐떡이는 정염은

    거북한 교양을 벗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네요.

     

    음침한 파충류관(館)에서

    꿈쩍도 않는 비단구렁이에 실망한 그녀.

     

    나의 긴장한 팔이

    팔짱을 풀지 않는 그녀를 위해 뱀처럼 꿈틀거렸지만,

    그녀가 만족하기에는 많이 모자랐을 테지요.

     

    야외의 동물들이 파업하는 을씨년스러운 날,

    우리는 덜 익은 솔직함조차 그곳에 남겨두고 아쉽게 돌아섰습니다.

     

    정갈한 식사와 전통 곡차로 그날을 마무리하면서,

    욕망이 두려웠던 환상은

    끝내 품위를 놓지 않았습니다.

     

    사랑스러운 현실을 품을 기회는

    그렇게 날아가 버렸답니다.

     

     

     

     

     

     

     


    열정이 차고 넘쳐

    "환상도 부러워하는" 현실을 싫증 나도록 탐닉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서로를 마음껏 음미하다가 나른해진 오후.

     

    경험으로 충만한 곱슬머리 여인이 풍만함을 내게 비비며 제안을 했었지요.

     

    날씨도 화창한데 우리, 동물원에나 갈까?

     

    대담하게도, 자신의 네 살배기 아이를 데려가자더군요.

    나는 살가울 자신 없는데..

     

    알아 자기 무뚝뚝한 거.. 그냥 오랜만에 엄마 노릇 좀 하려고..

     

     

    피붙이를 살뜰히 챙기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는 하루였습니다.

     

    죽고 못 사는 애인도 그날만은 뒷전이었습니다. 시샘이 날 만큼.

     

    신나는 놀이기구와 신기한 동물들이 마냥 즐거운 아이에게,

    엄마를 따라온 수상한 아저씨는 그저

    엄마의 잘 아는 친구일 뿐.

     

    네 살이라 그런가. 아님 그 아이의 천성인가.

    서먹해하는 나를 따르기까지 합니다

    저만치 떨어져 쭈뼛쭈뼛 바라보는 나를.

     

    용기가 필요한 사람은 나였습니다.

     

    죄짓는 것 같아, 천사 같은 아이를 제대로 이뻐해 주지 못하였습니다.

    제 발이 저려 힘껏 안아 주지도 못하였습니다.

     

    낯을 안 가리고 다가오는 아이가, 고마웠습니다.

     

    기어이 나를 알게 된 측은한 아이에게

    흰곰의 넉살이

    돌고래의 재롱이 행복을 주니, 고마웠습니다.

     

    아이의 손을 나누어 잡고 위로 번쩍 드는

    붕붕 놀이에, 까르르 까르르.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웃음이 부러웠습니다.

     

    그냥 엄마 친구라니까 기쁘게 매달리는 아이.

    잠깐이지만 지켜주고 싶었지요.

     

    놀다 지쳐 졸려하는 아이를 업었습니다.

     

     

    내 등에서 쌔근쌔근 잠든 아이는 내가 누군지 영원히 몰라야 합니다.

     

    네 살배기의 "여물지 않아 난처한" 절망을

    이 아이는 몰라야 합니다.

     

     

    사랑스러운 현실은 또다시 날아갔습니다.

    그렇게 업힌 채로..

     

     

     

     

     

     

     

     

     

     


    현실에 차여 환상만 남은 사내가

    동물원을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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