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그녀를 거니는 고독 (지은이) 3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2. 12. 26. 22:41
여자와의 사랑 말이니?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지는 못하였다.
상대 탓만 하는 내게 사랑을 알 기회가 오지 않는 건 당연하지.
남녀 간의 상식적인 사랑에도 난 무지하였다.
그것은 저주와 다를 바 없었지.
응보로서 따르는 고독 때문에 저주라 여긴 것은 아니다.
원인을 모르는 답답함이 실존을 갉아먹는 것 같아서였어.
누가 봐도
게으름과 이기심 그리고 성격적 결함 때문인 게 명확한데,
무엇이 답답하다는 건지..
뚜렷한 이유를 인정하기 싫어
괜히 숨 막혀 하며 사회 탓, 카르마 탓을 하였다.
고치려 노력 않는 느긋한 도태가
철부지처럼 생떼를 부릴 수 있었던 것도,
명백한 이유는 이유가 아니라는 현학적 모호함 때문이었지.
젠체하는 모호함이 명료하게 펼치는, 복잡한 인생들.
푸근한 모호함이 명료하게 만개하는, 화사한 자연.
이만하면 미칠만 하지 않은가.
이렇게 밖에 써지지 않는, 피골이 상접한 유희.
빼도 박도 못하고 휘갈겨야 하는 이 모호함.
나의 글에 치가 떨린다..
넌 사랑이 뭔지 아니?
꼭 알아야 사랑을 하나요?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해" 하면, 사랑하는 거겠죠.
누가 나에게 "사랑해" 하면, 사랑받는 거겠죠.
사랑하고 사랑받으려면 노력이 필요하다고요?
사랑은 억지가 아니에요, 달성할 목표가 아니에요.
그래, 사랑을 쟁취하겠다는 건 남자들의 착각이지.
그러나 가만히 있는다고 오는 것도 아니더구나.
내가 먼저 이쪽에서 "사랑"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면 저쪽의 사랑이 외면 안 하고 나를 반겨줄 텐데..
그게 나에겐 참 어려워. 아니 불가능해.
사랑 한 번 못하고 저무는 인생도 그것대로 의미가 있겠지.
아저씨의 사랑은 힘 좀 빼야겠네요. 느슨해지세요.
어설픈 완벽주의가 사랑을 정교한 탑처럼 쌓고 있어요.
이러면, 사랑을 하기도 전에 사랑에 체하고 만답니다.
완벽주의는 얼어죽을..
허점투성이 완벽주의였겠지. 내가 예까지 온 걸 보면..
이제 와 변명은 안 하련다.
난 성숙하지 못한 인간이었어.
고로, 남들 다 하는 사랑도 생활도
내겐 버겁기만 하였던 거지.
선명함으로 덧칠하지 않은 모호함이
어찌하여 세상에 나왔을까.
선명함을 차려입을 줄 모르는 모호함은
세상과 어울리지 않아.
할 만큼 해도 안 되는 이유지.
첨부터 나오지 말았어야 할 놈이
세상에서 깨달은 단 하나.
세상 이전의 모호함으로 복귀하면
존재함의 고통은 없어진다는 것.
분열 이전의 원초적 융합으로,
아늑한 모호함의 대양(大洋) 속으로 회귀하면,
존재의 어색함은 사라진다는 것.
아저씨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브라보!
아저씨의 정답이 아저씨를 보기 좋게 결박했네요.
아저씨가 사랑에 무기력해도 사랑을 거부해도
사랑은 아저씨 가까이에 언제나 있답니다.
아저씨가 잘못 살아왔어도
사랑함을 포기하고 살았어도
사랑은 아저씨 곁에 항상 있어왔답니다.
"살지 않음"을 선택했던 순간에도..
사랑이 함께하고 있었단 말이니?
함께하는 사랑이 차라리 너였으면 좋겠어.
오늘 처음 만나 잠깐 얘기 나누고도
나를 다 알아 버리는 너..
저것 봐! 너와 얘기 나누니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지는구나.
너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기적이 유성처럼 떨어지는구나.
살아가는 사람들, 살려고 애쓰는 모습들이 사랑입니다.
혼자 외로이 살아도 그럭저럭 살만하지요?
쓸쓸함도 어느덧 습관이 되니 편안하지요?
왜 그런 지 아세요?
타인들이 있어서랍니다.
군중 속의 고독은, 고독이 아니라 평화입니다.
주변의 사랑을 아프게 하지 마세요.
공포가 끊이지 않는 세상도
고달픈 현실도
모두 나를 위해 있는 거라 얘기하고 싶니?
안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에 나는 유감없다.
나 이외의 것에 유감을 표할 만큼
나는 동적(動的)이지 않아.
스스로가 맘에 안 들어 "고뇌하는" 자는,
타인을 향한 사랑의 공간을 내면에 항상 마련하고 있나니.
아저씨는 언제든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지요.
갑자기 날 사랑하고 싶어진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랍니다.
총명한 아이야,
넌 이런 나를 사랑할 수 있겠니?
내일이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를
이 익명의 사내를..
사랑해.
우주에서 날아온 기적이 가슴에 박히는 순간이었다.
'나를 방해하러 온 천사여,
내 토라진 비애를 다독여다오.'
한창 경솔할 때지. 후회할 말은 마라.
헛된 희망을 주는 건 사악한 일이야.
장난이라면 봐주마.
바보..
......
......
진심이어도 늦었어.
머릿속이 복잡해졌나요?
"사랑해"를 듣고도 살 자신이 없나요?
사랑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문제니까..
내가 문제면, 나의 사랑도 문제가 돼.
사람은 누구나 다 문제아에요.
널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없어.
또 탑을 쌓으시는군요 들어가 숨을.
난 지금 기뻐요. 기쁨은 창조니까요. 창조는 기쁨이니까요.
내 걱정 말고 아저씨도 지금 행복을 만드세요.
밥 한 숟가락 입에 넣을 용기만 있으면 만들어지는 행복을요.
너.. 여자 맞니?
아저씨가 행복하면 제가 행복해요. 세상이 행복해요.
지은아, 사랑해.
그리고 고마워. 사랑 뒤에 도사린 지옥을 없애 줘서..
그럼 잘 살아 아저씨.
난 이만 갈게.
그녀를 잡지 않았다.
결실에 목말라 행위를 꼬드기지 않았다.
급조되는 해피 엔딩으로 소박한 기적을 윽박지르기 싫었다.
비극이 있어야 해피 엔드도 있는 법.
그녀의 삶도 나의 죽음도
비극이 아니므로 결론은 필요 없어.
그녀가 사랑한다 해서 희망이 아니듯이
그녀가 가버려도 절망은 아니리라.
본디 잔잔히 흐르던 기쁨을 나는 잠시 확인하였을 뿐.
지독한 슬픔까지 기뻐하는 냉정이
나를 잠시 축복하였을 뿐.
그러고는 늘 그래왔듯
그것은
세상에 스며들어 시간을 돌리지.
즐거운 자와 권태로운 자
악한 자와 착한 자
행복한 자와 불행한 자
부지런한 자와 게으른 자
살고 싶은 자와 죽고 싶은 자가,
부자들 중에도 있네.
빈자들 중에도 있네.
병자들 중에도 있네.
특별한 자들 중에도 있네.
평범한 자들 중에도 있네.
산 자들 중에도 있네.
죽은 자들 중에도 있네.
공평한 기쁨이 아우르는 이 처절한 조화(造化)를 보라!
아름답지 않은가.
당장 죽어도 좋지 않은가.
그러나 확률의 지배에 초연(超然)할 수 없는 난
부지런히 일하여 부유해져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데.
특별해져서 착하고 건강하게 살아야 하는데..
지은아, 너도 내가 그리 살기를 원하니? 아니지?
잘 살라고 한 마지막 인사가 그런 의미였니? 아니지?
우연히 만난 타인한테 사랑한다고 당돌하게 말하는 넌,
그리고 미련 없이 만남을 떠나, 관계 이전으로 돌아가 버린 넌,
거나하게 미쳐 보여서 좋았어.
미친 여자가 정상적인 인사말을 할 리는 없잖아. 그렇지?
소통 가능한 광녀를 만나 사랑을 고백하는, 미친 정취.
이 상쾌한 기적은 소멸에의 열망을 마취하고
맹목적인 호흡을 끈질기게 북돋워 주웠다.
마음대로 살아지지 않아도 그대로 살아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여도 그저 살아라.
어떻게 죽어야 할지 모르면 그냥 살아 있어라.
짧게 스쳐간 "사랑해"의 감흥이,
다음을 기약 않는 짜릿한 한 마디가,
잔인한 "지금"을 선사하였다.
미친 덕분에 "기쁨"을 느끼고 있으니
내일, 모레, 글피에도 나는 계속 숨을 쉬어야겠지?
세상을 구동하는 냉철한 기쁨이 다스하게 나를 품으면
나는 숨이 막혀 미친 듯이 가쁜 숨을 내쉬겠지?
그것이 품에서 내어놓기 전에는
죽어도 죽는 게 아니겠지?
서투른 완벽이 엉성하게 죽음을 쌓아 올리지 말며
죽기도 전에 죽음에 체하지 말며
힘을 뺀 죽음이 죽은 듯 산 듯 살랑살랑 나부낄 때까지
나의 생명 "지은이"들이 어딘가 살고 있을 세상에서
수려한 고난이나 애무해야겠네.
천국이 따로 없을 테지.
사랑해 지은아.
가슴은 안 뛰지만 안식같이 사랑해.
황홀한 자각몽아
애잔한 유령아
사랑해.
나를 데려갈 어여쁜 영원아
사랑해.
사랑해..
조금은 가벼워진 몸으로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 눈을 의심해야 하는 상황을 곧바로 직면해야 했다.
앉아 있던 자리 옆에,
가고 없어야 할 지은이가 그대로 누워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종일 굶은 탓에 기가 약해져 헛것이 보이는 건가.
멀어지는 모습까지 확인했는데 어떻게 여기 다시..?
사고(思考)가 잠시 정지되는 황당함에
앞뒤를 가리지 않고 섣부른 행동을 하고 말았다.
그녀를 세게 흔들어 깨운 것이다.
지은아! 일어나 봐!
가누지 못하는 몸을 안다시피 일으켜 앉히며 상체를 흔들었다.
악! 아저씨 뭐야!?
사.. 사람 살려!!
부스스 헝클어진 머리를 들어 게슴츠레한 눈으로 한참을 보더니,
이내 위기감을 느꼈는지
벤치 아래로 미끄러지듯 내 손길을 뿌리치며
야심한 시각에 다짜고짜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이.. 이런!
아가씨, 나 나쁜 사람 아니야.
지나가다 너무 위험해 보여서 깨운 거라고!
이런 데서 자면 위험하단 걸 이리 잘 아는 여자가..?
내 직감은 이 아이가 그 아이가 아님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분명 같은 외모인데 그녀의 말투 몸짓 어디에도 지은이는 없었다.
도와주려던 것뿐인데 심하게 오해를 하니 어쩔 수 없군.
나에겐 폰이 없으니, 아가씨 폰으로 당장 경찰을 불러.
젊은 아가씨가 조심해야지..?!
춥거나 무섭거나 둘 다거나
좀처럼 진정을 못하고 바들바들 떨기만 하는 그녀가
안쓰럽긴 하였지만,
이 이상의 액션을 취하였다간 무슨 봉변이 떨어질지 몰라,
그녀를 놔두고 냉정하게 돌아섰다.
다행히,
치한 취급하며 뒤통수에 대고
"어딜 도망가냐" "경찰 올 때까지 꼼짝 마라" 등의
악다구니를 퍼붓지는 않았다.
그녀의 성정이 무던해서가 아니라
숙취가
앙칼진 그녀를 누른 때문이겠지.
너무 피곤해 여기 앉은 채로 깜빡 졸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러면서,
(이 광경을 이상하게 볼) 행인 한 명 지나가지 않을
아주 짧은 몇 분 사이에,
이처럼 생생한 꿈을 내가 꾸기라도 했다는 얘긴가.
아니면..
이걸 두고 신비 체험이라는 걸까.
시공을 초월한 혹은 시공이 멈춰진 뭐 그런..?
신경이 극히 예민해져 과도한 각성이 지속되는 가운데
일종의 환각을 잠깐 경험한 것일 수도..
무엇이 되었건,
창조의 기쁨을 아는 지은이가
사라지려는 나를 막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경한 시도를 중지하고
지은이에게 기도를 드리며
그녀와의 "예정된 조우"를 글로써 찬양하는 내가,
하늘 아래 존재하는 것일 테지.
'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11. 아이를 거니는 고독 : 동물원에서 1 (1) 2023.01.18 10. 욕망을 거니는 고독 : 사랑 옆에서 1 (0) 2023.01.15 8. 그녀를 거니는 고독 (지은이) 2 (0) 2022.12.25 7. 그녀를 거니는 고독 (지은이) 1 (1) 2022.12.23 6. 꿈 곁을 거니는 고독 2 (0) 2022.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