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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녀를 거니는 고독 (지은이) 1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2. 12. 23. 17:28
대교 아래에는 노숙자의 꼬질꼬질한 외투가 흘렀고
그 위로 초췌한 여인의 들뜬 화장이 야경을 이루었다.
여기가 좋을까 아니면 지방의 한적한 구석이 더 나을까
사라짐이 시작되는 곳으로.
상대성에 의존하여 생존 자체를 위안하는 것도 이제 지쳤어.
살고자 발버둥 치는 가련한 아니 씩씩한 인생들 앞에 죄스러운들
막연한 가책은 더 나아갈 동력과 무관해 보였다.
의미와 희망이 빠져나가 이대로 놔두어도 사라지고 말 삶이,
부풀려진 치욕의 농간에 쫓겨 도망치듯 종말을 고하려 하였다.
어둠으로 뛰어들 모진 의지는 채 숙성되지도 아니한 주제에.
다시는 건널 수 없는 다리가 되지 못하고
다시는 볼 수 없는 서울이 되지 못하고
다시는 살 수 없는 삶이 되지 못하여
지겨울 뿐이었다.
도심에 짙게 깔린 봄이 아스라한 향불 냄새를 머금고 살랑거렸지.
터덜터덜 걸을 수밖에 없었어 죽을 만큼 다리가 아프도록.
흐드러진 벚나무의 교태에도 아랑곳 않고 꼿꼿하게 도열한 나트륨 등(燈).
성실한 의욕들이 가속 페달을 밟아대는 차도.
그 사이의 자전거 도로가 주는 어색한 조화(調和).
실용과 미 어느 쪽도 충족시키지 않는 부자연스러움을 따라 걸었어.
"자전거가 아니어도 괜찮은" 관용이 아픈 걸음을 받아 주었다.
가로수 밑 으슥한 공간을 차지한 벤치 위에 여인이 누워 있었다.
자정을 넘어가는 밤, 무서운 줄 모르고
짧은 치마의 여인이 홀로 누워 괴로운 듯 뒤척였다.
저러다 봉변 당하기 십상이지. 요즘 아가씨들 참 겁이 없네.
헝클어진 파마, 진한 화장이 어린 나이를 숨기지는 못하였다.
진달래색 투피스의 흐트러진 매무새는 숙녀로의 치장에 실패하였고.
이봐요 아가씨, 일어나 봐요. 여기 이러고 있으면 큰일 나.
살짝 흔들었을 따름인데 감았던 눈을 말똥하게 뜨고 올려다보는 모습이
만취한 여자 맞나 싶었다.
아저씨 신경 끄시고 그냥 가던 길 가시지..
혀 꼬부라진 몇 마디에, 섞어 마신듯한 술 냄새가 역하게 올라왔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내가 여기서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너, 내일 신문에 나기 싫으면 당장 일어나.
포기가 무관심을 합리화하기에는 상황이 무척 위태롭긴 했지만,
취객이 남자였어도 과연
호기로운 참견을 주제넘게 구사하였을까.
걸맞지 않은 친절을 어쭙잖게 시도할 수 있었을까
비극을 동경하던 무책임이.
모르겠어. 하지만 음탕함 때문은 정말 아니야.
욕망이 실성하였는데 욕정인들 온전하랴. 다만..
미숙한 절망의 서글픔은 겸연쩍은 자비라도 펑펑 쏟고 싶었다.
왜요, 내가 죽기라도 할까 봐? 술 깨면 알아서 갈 거니까
괜히 걱정해 주는 척 껄떡대지 말고 비키시죠.
아저씨만 꺼져주시면 난 안전해.
지금 나한텐 아저씨가 젤루 위험한 사람이야. 맞죠?
허허, 맹랑한 아가씨로군. 산전수전 다 겪은듯한 말투 하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보다.
적어도 바보같이 당할 여자는 아니란 것이 확인됐으니
이쯤에서 낯 뜨거운 오지랖을 접어야겠어.
나 원래 그다지 친절한 사람 아닌데..
귀신에 홀린 기분이야.
미련 없이 돌아서서 보란 듯이 가 버리고 싶었으나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 다리는 생각만큼 재게 놀려지지 않았다.
호의를 무시당한 불쾌감이 꽤 드는 것으로 봐서
생에의 집착을 완전히 끊지는 못한 모양이다.
생면부지의 무개념에 발끈하는 것도
꼴 난 자존심이 어지간히 질겨서겠지.
나의 비탄은 아직 멀었나 보다.
아저씨 겨우 고 정도에 삐친 거야?
그녀가 말을 걸었다. "스러져가고픈 의미"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싸가지 없다 욕할 테면 해. 세상이 워낙 험한 걸 어떡해..
그녀의 적당히 새된 목소리가, 세상 앞에 움츠러든 어깨를 때렸다.
미안해 아저씨. 오해해서..
술 깬 것 같은데 어서 집에 들어가.
진짜 삐쳤나 보다. 사과도 안 받아 주고..
이건 대체 뭘까. 갑자기 백팔십 도 바뀐 이 태도는..
낯선 남자와 굳이 대화를 이어가려는 저의는?
외로워서..?
타인과의 대화가 부질없어
내면에 나를 가둔 지도 여러 해.
들러붙으려는 외로움을 깔보고 구박한 내가
그녀의 곱지 않은 음성에도 핑그르르 도는 건 왜일까.
집이 어디니. 바래다 주마.
그녀는 어느 결에 몸을 일으켜 조신하게 앉아 있었어 다행스럽게도.
온종일 걸어 부은 다리가, 조르는 어린애처럼 나를 이끌어
그녀 곁에 앉게 하였다.
손가방에서 박하향 담배를 꺼내어 무는 동작이 자연스러웠다.
아저씬 안 피워? 한 대 주까?
방심하는 사이
담배를 혐오하는 내 입에 그녀의 담배가 물려져 있었다.
그녀의 연기가 내 연기를 안고 하늘로 참 쉽게 올라가는구나.
아저씨 나랑 술 한잔할래?
..........
빈털터리란 거 알아. 내가 살게. 가자.
알았으니까 조금만 더 있다 가.
하루 종일 쏘다녔더니 다리가 아프구나.
몰골이 말이 아니다 싶더니 그런 사연이 있으셨군.
이 좋은 봄날 혼자 청승이란 청승은 다 떨면서 돌아다니셨단 말이죠? 더구나 남들 일하는 평일에.
불쌍한 백수 아저씨..
까불지 말고.
그러는 넌 이 시각에 여자가 혼자 취해 이러고 있니?
저야 오늘이 휴일이니까
모처럼 친구들 만나 회포 좀 풀었죠 뭐.
오늘이 쉬는 날이라면..
서비스업 계통에서 일하는 모양이구만.
하하, 척 보면 아시나 보네.
혹시 제 몸에 술집 아가씨라고 쓰여 있나요?
이런! 실례를 했다면 사과하지. 난 그저..
실례는요 무슨..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걸요.
놀고먹는 아저씨보다야 내가 훨 떳떳하잖아요?
누가 뭐라니?
나 아가씨 직업 갖고 왈가왈부할 만큼 속 편한 사람 아니야.
지은이라 불러 주세요.
통성명까지 하자고? 그러고 싶지 않은데..
저만큼 까칠하시네. 아까 당한 거 되갚아 주심?
염려 마요. 내가 아저씨 이름 알아 뭐 하겠어요? 난 단지
아가씨라 불리는 게 싫을 뿐이라고요.
지은이도 어차피 본명은 아니랍니다.
그런 줄 알았어.
강풍이 황사를 씻어낸 하늘에서, 은근히 많은 별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강에 미끄러진 밤바람이 이곳까지 굴러와,
그녀와 나 사이를 장난스럽게 파고들더군.
아직 술이 덜 깬 모양이네. 나같이 시시껄렁한 놈과
이처럼 말을 길게 섞는 걸 보니..
아니요! 확실히 취한 만큼 깰 때도 저는 확실해요.
그냥 심심해서라면 너무 성의 없는 이유인 것 같고..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좀 있어서"라고 해두죠.
아저씨는 날 위해 죽을 수도 있어요.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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