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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비참상준 이야기/이상한 사랑 2023. 7. 21. 22:48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가 쩌렁쩌렁 저녁 공기를 가르며 상준의 뒤통수를 때렸다. 바지를 추스를 경황이 없어 외투자락만 꽁꽁 움켜쥐고 있던 그가 여인에게 머리카락을 잡힌 채 고스란히 봉변을 당하는 동안, 구경거리에 약한 행인들은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머리가 당겨져 순간적으로 젖혀진 상준의 얼굴에 여인은 더럽혀진 손을 마구 문질러대었다. 옜다! 니 꺼 너나 실컷 먹어라! 너희 같은 새끼들 땜에 내 옷이 대체 몇 번이나 더러워지는 거야!? 그의 입장에선 재수없게도, 비슷한 수모를 이미 서너 번 당해 가뜩이나 치를 떨며 복수를 꿈꾸던 히스테리컬한 여자를 선택한 것이 화근이었다. 고의성은 없었고 불가피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남성적 본능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실수였음을 강변하기엔 때가 너무 늦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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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문학을 아는 척 2 : 적(赤)과 흑(黑)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3. 7. 15. 22:52
"욕망 (적)은 의지 (흑)으로 다스릴 수 있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중력의 영향을 받는 지구상 인류 중 어느 누구도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성인( 동서고금을 통하여도 그러한데, 하물며 고대 성인(聖人)들조차도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이상 이 욕망의 메커니즘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과 자비 지복의 유토피아와 조화로운 평화 순간의 영원성과 신성한 창조를 끌어오고 동시에 확산시킨 "절대 실존"들에게 득도의 과정으로서 인간적 열정은 필수불가결한 것이었으며, 여기서의 "열정"은 욕망 또는 의지와 다름 아닙니다. 다만 구도자들은 열정적 의지를 활용하여 역설적으로 그것을 버린 셈인데, 욕망으로부터 비롯되는 의지, 의지가 추구하는 욕망, 이러한 순환 고리를 끊고 의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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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엉뚱한 애착지수 이야기/이상한 누나 2023. 7. 13. 17:20
아얏!! 아야야! 아파, 이 자식아!!! 화숙이, 가슴을 물고 늘어지는 지수의 머리를 쥐어뜯는다. 머리카락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는 듯한 통증이 두피를 찌르는 순간, 그는 해일에 휩쓸려 육지로 밀려와 있었다. 파도에 쓸려 돌 투성이 황무지로 다시 돌아온 그를 반겨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엉큼한 녀석 보게? 얌전한 거시기가 뭐 어쩐다더니.. 아이고 젓탱이야! 지수의 입과 손에 시달려 시뻘게진 양쪽 가슴을 손바닥으로 비벼대며, 그녀가 초라한 화장대 앞에 앉는다. 그다지 볼품없는 그것들을 거울로 열심히 살피면서, 흠집이라도 났나 싶어 애지중지 마사지를 하는 등 유난을 떤다. 한편, 그 난리통에 제정신이 돌아온 지수는 자기가 한 짓이 창피하고 두려워 구석에 서서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만 있다. '내가 왜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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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의심월광 프로젝트 (판타지) 2023. 7. 10. 20:37
우주선 안은 하나의 도시였다. 첨단 기계화(?) 도시의 복잡한 구조를 눈에 익혀두는 과정이 필요했으나 상준을 제압한 모종의 파워는 이를 허락지 않았다. 각 층마다 기능별로 전문화되어 있는 구역들을 다시 수직으로 수 킬로미터 통과하여, 모선의 상층부에 위치한 메인 제어 구역으로까지 솟아올랐다. 중/고층 아파트 높이는 족히 될 만한 반경 십여 미터의 전자 모듈이 (단순히 대형 컴퓨터라 부르기엔 너무 정교하고 세련되었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다른 구역들과 연계된 초 거대 자동제어 기기의 일부라 여겨졌기에 이렇게 칭함.) 삼십여 미터 높이의 천장과 완전히 맞닿은 채 중앙에 버티고 있었다. 위로 올라갈 수록 반경이 좁아지는 원뿔 모양의 장치로서 모선 전체를 통제하는 중앙 제어 시스템의 일종인 것 같았다. 오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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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루시드 드림Letters to D.J. (지수 외전)/FRIDAY THE 13TH 2023. 7. 6. 16:36
Another stories of Jisoos in parallel universes : 2. Friday the 13th (원본) (18) 솔직히 두려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곳이, 가망 없는 꿈계가 될 것만 같아요. 이러면 안 되는데 자꾸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드는 건 왜일까요. 여기 포켓 시공은, 네 자각 역량을 극대화해 주는 구조화된 에너지 영역이기도 하다. 일종의 결계적 성격이 집약된, 화이트 포스의 기하학적 구현체랄까. 이 안에서 네가 그렇게 느낀다면 그것이 맞다. 나 또한 그리 예상하고 있었느니.. 정말 큰일이로군요.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진다는 얘기죠? 여기가 정녕 안전하다면 이대로 대기하고 있다가 상황 봐서 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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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문학을 아는 척 1 :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3. 7. 2. 19:14
엄석대. 너는 "영웅"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넌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한 반의 질서를 나름대로 일사불란하게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 과장하여 전성기의 나폴레옹 같은 영웅에 비유될 수도 있겠으나, 기실 네가 생산하는 권력은 더욱 크고 절대적인 권력을 상징하는 담임의 묵인과 비호하에 혹은 그것에 편승하여 휘두르는 것이기에 전혀 창조적이지 못하며, 약자의 희생이나 구조적 부조리에 대하여도 관용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너는 주류 지향의 "맹목적이고 살벌한 긍정"과 체질상 궁합이 맞는 권력형 인간이다. 그런 네가 학교의 타성을 유지하는 제도적 큰 틀을 인정하고 그것에 자연스럽게 영합함으로써 약자인 또래 급우들 위에 군림하는 절대 권위를 일종의 혜택처럼 부여받은 셈인데, 이렇듯 큰 권력에 기생하여 유기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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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본격적 일탈상준 이야기/이상한 사랑 2023. 6. 28. 21:23
다음날 상준은 공장에 나가지 않았다. 비록 술기운을 빌리긴 하였으나 상사와 동료들에게 속내를 솔직히 드러낸 셈이었고 그것으로 사표를 대신하였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무책임하고 비겁한 처사라는 비난을 피할 수는 없겠다.) 종업원이 올라와 흔들어 깨우고 나서야 뒤숭숭한 악몽으로부터 겨우 벗어난 그는, 오후 한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에 쫓기듯 숙박업소를 빠져나왔다. '이제 어디로 간다? 이대로 연지한테 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지갑을 열어 보니, 오천 원짜리 달랑 두 장. 버스 정류장 근처 도로변에 세워진 간이매점으로 가서 담배 한 갑을 샀다. 어제의 과음으로 속이 몹시 쓰려왔지만 뜨거운 국물 한 그릇 사 먹고 나면 빈털터리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 주점이 문 열자면 아직 대여섯 시간이나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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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상한 파라다이스지수 이야기/이상한 누나 2023. 6. 26. 17:44
새까맣게 먼지 쌓인 형광등은 미동(微動)에도 흔들거려 곧 떨어져 내릴 것 같고, 일어서면 머리에 닿을 듯 낮은 천장은 누렇게 색 바랜 도배지 무늬를 지수의 코 앞에 들이밀어 숨 막히는 착란을 강요한다. 여자가 상반신을 일으켜, 천장의 꾀죄죄한 무늬를 멀거니 바라보고 있던 그에게 얼굴을 바싹 갖다 대었다. 거친 말만 수다스럽게 뱉어 내는 "유령 같이 생긴 여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지수는 고개를 얼른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소박하게 생긴 화장대가 바로 눈앞에서 꾸벅 인사를 한다. 늘어서 있는 갖가지 화장품들을 이빨처럼 드러내고 싱긋 웃는 화장대의 숏다리 옆엔, 주인을 닮아 부끄럼을 잃어버린 생리대 뭉치들이 당당하게 쌓여 있다. 아직도 내가 무서워? 이거 순 겁쟁이 아냐?? 곱살하게 생겨가지고.. 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