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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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고독을 거니는 고독 2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4. 4. 8. 15:42
당신을 퍼뜨린 비밀이 당신의 깊은 곳에서 소화불량으로 꿈틀거리다가 (블랙홀) 하품이 길어지는 당신의 입으로 다른 하늘 멋지게 토하려 합니다 (화이트홀) 내가 모르는 사람은 나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만큼만 깨끗하고 솔직하다 샹들리에처럼. 나를 모르는 사람과, 그를 모르는 나는 각자의 우주에 존재하지 않고 우주 너머 그리움의 영역에 존재한다 얼음처럼 차고 칼날처럼 예리하게 부서지는 유리의 파편처럼 따갑게 아름답게. 천장에서 떨어져 부서지는 샹들리에처럼.. 모르는 타인의 반들반들한 가슴에는 엿가락처럼 녹아내리다가 아무 데나 들러붙는 구질구질한 정이 없다. "투명한 냉엄함이 영원히 발산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으면서, 찰나를 주유(周遊)하는 그것의 찬란한 일별(一瞥)을 소심하게 기대해 본다. 찰나의 무중력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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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고독을 거니는 고독 1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4. 3. 24. 21:16
거울을 봅니다. 눈이 울어요 코가 울어요 입이 울어요 거울 뒤에 당신이 있군요. 당신 뒤에 하늘이 있군요. 꽃병을 봅니다. 봉오리가 웃어요 잎사귀가 웃어요 줄기가 웃어요 꽃 속에 당신이 있군요. 당신 속에 하늘이 있군요. 미풍(微風)에 나뭇잎이 떨립니다. 나뭇잎의 긴장에 미풍이 떱니다. 무엇이 미풍과 나뭇잎을 당깁니다. 미풍과 나뭇잎이 무엇을 밉니다. 살랑이는 것은 미풍이 아닙니다. 움직이는 건 나뭇잎이 아닙니다. 영화감독의 지휘하에, 회전하는 송풍기가 "제작된 나뭇잎"을 흔듭니다. 미풍은 불고 나뭇잎은 떱니다. 미풍 때문에 떱니다. 누가 천사를 보았답니다. 누군가 유령을 만났답니다. 천사를 본 게 아닙니다. 유령을 만난 게 아닙니다. 영화 속에서 천사가 날아다닙니다. 유령이 스크린을 가로지릅니다.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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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천국을 거니는 고독 4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4. 1. 28. 17:11
(13) 밤이면 맞이하여 선비의 시름 다소곳이 듣는 조강지처는 그의 물오른 시름이 안쓰러워 속으로 흐느끼며 여위어갑니다. 훤한 분단장(粉丹粧)이 미처 가리지 못한 검버섯을 보일까 조바심 내며 그녀는 종종걸음, 상스러운 삶으로 돌아가야 하는 선비의 뒤를 쫓습니다. 그가 서면 저도 서고 그가 가면 저도 가고.. 겉으론 웃기만 하는 조강지처. 그녀의 아쉬운 마음이 그리움의 살을 찌웁니다. 선비의 난처한 눈길에도 수줍어 고개 숙이는 안타까움이, 고개를 넘어가는 봇짐에 얹혀 숨소리 죽여가며 자꾸만 따라옵니다. 첩(妾)의 마을은 점점 밝아오는데.. - 달 1 밤에 하늘을 올려다보면흐리지 않는 날엔 달이 내려와 한마디 건네더라고요 나까지 초대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네요 흠 달은 달이 사랑하는 사람들로 언제나 만원(滿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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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천국을 거니는 고독 3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4. 1. 16. 12:08
(9) 맑은 하늘 꼭꼭 씹어라 그냥 삼키지 말고. 바다가 고마운 늙은 어부들, 고마운 만큼만 울고 웃네. 너 없으면 안 되는 바다다. 꼭꼭 씹어라 그냥 삼키지 말고. 꼭꼭 씹기에 배부르지 않은아가야, 너 없으면 안 되는 나 꼭꼭 씹어라 그냥 삼키지 말고. - 소화(消化) (10) 네 살배기는 사랑과 정욕을 구별하지 못한다. 백지(白紙)는 사랑하는 사람을 엿보지 않는다 네 살배기가 보고 싶으면 네 살배기한테 바로 다가가 어린 처녀의 조숙한 미소로 네 살배기의 넋을 빼놓는다 네 살배기는 무명의 여인 품에 안길 준비가 되어 있다. 백지 속에 거침없이 파고들 준비가.. 백지는 사랑하는 사람을 엿보지 않고, 네 살배기는 여자의 보이는 모습만 그리워한다. 백지의 텅 빈 유혹은 네 살배기까지 흥분시킨다 정액이 나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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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천국을 거니는 고독 2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4. 1. 1. 17:58
(4) 길을 걸으면 하늘 끝이 코에 걸리네요. 하늘 끝에는 아이를 잡아끄는 손이 있네요. 태어남이 없는 곳에 숨어 아이를 부르는 소리가 있습니다. 혼자인 아이의 고단함이 끌리는 음률이네요. 리듬에 배인 그녀의 기침을 온전한 그녀라 믿고 아이는 멜로디를 만듭니다. 선율이 좋아 선율에 미치면 아이는 그녀를 잊지만 아이의 멜로디에서 그녀의 체취가 나네요. 그녀를 부정하고 화음에만 매달려도 그 속에는 그녀의 미열이 있네요. 고단함을 이끌고 기침과 체취와 미열이 모퉁이를 돌면 귀 막은 첨탑들의 야단스런 웅크림 위에서 하늘의 끝이 내려와 혼자인 아이의 코를 간질입니다. 아이의 시원한 재채기가 하늘 끝 너머로 퍼질 수 있게. (5) 그녀를 사랑한다면 시를 써도 시인이 아닙니다. "유치하지 않고 완성도 높은" 문학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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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천국을 거니는 고독 1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3. 12. 18. 17:02
(1) 먹구름 한 번 스쳐도 휘청이는 바람이 수줍게 기대어 와도 연약한 그를 품으며 발갛게 물드는 그대. 구름을 호령하는 늠름한 바람이 위풍당당 다가와 거칠게 껴안는 순간 그대의 모든 그리움들은 간절히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로 날아가 안깁니다. 성장한 바람은 자신이 연모하던 그대의 모든 것을 그렇게 앗아갑니다. 너무 기뻐 그대는 비명을 질러대는군요. 자기들끼리 부딪치며 즐거운 희생을 속삭이다가, "차갑게 얼어 기어 다니는" 소망들을 향해 희희낙락 투하됩니다. 그것들의 발 밑으로 기꺼이 뛰어들어 아름답게 증폭될 "그대의 비명들" 말입니다. 이렇게요.. 사그락 사그랑 사라라랑.. 사그랑 사그랑 사랑 사랑.. [늦가을의 가로수 아래에서] (2) 난쟁이 광대는 평지보다 외줄 위에서 안정감을 느낍니다. 가느다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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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면회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3. 10. 11. 20:24
야, 지지난 주 휴가 나갔을 때 우리 실컷 봤잖아? 그러면 됐지 별안간 면회를 또 오면 어떡해!? 왜? 오면 안 돼? 우리 연인 사이 아니었어? 봐도 봐도 보고 싶은 걸 나더러 어쩌라고.. 그건 알겠는데, 요즘 훈련 기간이라 소대원들 눈치가 보여서 그렇지. 미리 연락이라도 좀 주던가.. 멀리 부대까지 와 준건 고맙지만 미안하게 됐다. 이번엔 외출 외박이 안 될 것 같아. 6시간 걸려서 온 사람한테 정말 이러기야? 그러게 누가 사서 고생하래? 안타깝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고. 아쉬운 대로 여기 면회소에서 얘기나 나누자. 2시간 뒤면 들어가 봐야 돼. 훈련 때는 원래 이래. 전에 말해 줬잖아.. 그래, 잘 알아. 그것 때문이 아니라 나를 대하는 네 태도가 참 섭섭하구나. 하나뿐인 애인이라면서 어떻게 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