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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천국을 거니는 고독 3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4. 1. 16. 12:08
(9)
맑은 하늘 꼭꼭 씹어라 그냥 삼키지 말고.
바다가 고마운 늙은 어부들, 고마운 만큼만 울고 웃네.
너 없으면 안 되는 바다다. 꼭꼭 씹어라 그냥 삼키지 말고.
꼭꼭 씹기에 배부르지 않은아가야,
너 없으면 안 되는 나 꼭꼭 씹어라 그냥 삼키지 말고.
- 소화(消化)
(10)
네 살배기는 사랑과 정욕을 구별하지 못한다.
백지(白紙)는 사랑하는 사람을 엿보지 않는다
네 살배기가 보고 싶으면 네 살배기한테 바로 다가가
어린 처녀의 조숙한 미소로 네 살배기의 넋을 빼놓는다
네 살배기는 무명의 여인 품에 안길 준비가 되어 있다.
백지 속에 거침없이 파고들 준비가..
백지는 사랑하는 사람을 엿보지 않고, 네 살배기는 여자의 보이는 모습만 그리워한다.
백지의 텅 빈 유혹은 네 살배기까지 흥분시킨다
정액이 나오지 않는 네 살배기의 정욕은 처녀의 속살에 몽글몽글 광기(狂氣)를 쏟아낸다.
보고 싶으면 바로 다가오는 백지는
연인이 부재중인 고향을 지키는 하얀 기쁨보다
순결을 유린하는 철부지의 사랑스러운 몰아(沒我)가 더 좋다
다리 벌린 백지 위에 네 살배기가 올라타면
백지는 흰 꼬리들을 지우고, 젖내 나는 사랑으로 둔갑한다
- 낙서
(11)
입으로 들어가 입으로 나오는, 사랑을 해 볼까. 정상(正常)은 언제나 지겹지만 그래도.
항문으로 들어가 항문으로 나오는, 사랑을 해 볼까. 두려운 비정상이 언제나 유혹하니까.
항문으로 들어가 항문으로 나오는, 사랑을 하려는 건
그의 항문을 헤집어 그녀를 찾으려는 몸부림. 비정상인 그녀를..
입으로 들어가 항문으로 나오는, 탐욕의 순환이 사랑을 키운다. 식도를 막을 만큼 크게..
정상에 붙어 꼼지락대는 비정상을 올라타 누르고 정상적인 사랑으로 기절시킨 다음
그녀의 입 안에 들어가 볼까. 그녀의 항문으로 들어가 볼까. 사랑하는 그와 함께..
그는 열심히 비축한 사랑을 도금하여, 세상을 구걸하는 그녀에게 먹여라.
그녀를 키우고 가꾸면 세상은
널려 있는 비정상과 교합하여 아름다운 정상을 낳으니까.
- 음양(陰陽)
(12)
너를 사랑한 핼쑥한 사내가 아이의 손을 잡고 놀이터에 갔다.
너는 가고 없어도, 귀여운 아이는 고사리손으로 사내의 손바닥을 간질인다.
네가 남겨 준 어여쁜 아이..
아이의 까만 눈망울 속엔 네가 있다.
휴가를 내어 찾아온, 평일의 놀이터. 코끼리 열차에 몸을 싣고 아이처럼 부푸는 가슴.
너와 함께 오고 싶었는데..
너를 닮은 가냘픈 몸으로 흥분하는 아이. 무엇이 급한지 팔을 흔들며 재촉한다.
번쩍 들어 무동 태우고 성큼성큼 걸으면 사내의 발걸음에 맞춰 아이도 춤을 춘다.
아이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대로 걷는다.
아, 어쩌면 너보다 이 아이를 더 사랑한다.
롤러코스터의 굉음이 머리 위로 쏟아지고, 원심력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얼굴은
"지상에서 기다리는 불안"을 훔쳐본다.
너와 함께 백마를 타고 싶었다.
메리고라운드는 언제나 제자리를 맴돌며 "아이를 위한 너"를 기다린다.
아이를 품에 안고 살구 같은 볼에 입맞춤하리라. 그리고 너에게 보여 줄 사진을 찍어야지.
환하게 웃자, 귀여운 아가.
너는 가고 없어도 우린 이렇게 행복하자.
앞장서 가는 아이야, 허한 순수에 또렷한 발자국을 남겨다오.
평일의 놀이터에서 아이를 잃어버려도 사내를 탓하지 않을 너.
"놀이터 어딘가에서 울며 헤매일 아이"를 단념하면 그제야 다가올 너.
- 나르시시즘, 그 "닮음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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