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천국을 거니는 고독 4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4. 1. 28. 17:11
(13)
밤이면 맞이하여 선비의 시름 다소곳이 듣는 조강지처는
그의 물오른 시름이 안쓰러워 속으로 흐느끼며 여위어갑니다.
훤한 분단장(粉丹粧)이 미처 가리지 못한 검버섯을 보일까 조바심 내며 그녀는 종종걸음,
상스러운 삶으로 돌아가야 하는 선비의 뒤를 쫓습니다.
그가 서면 저도 서고 그가 가면 저도 가고..
겉으론 웃기만 하는 조강지처. 그녀의 아쉬운 마음이 그리움의 살을 찌웁니다.
선비의 난처한 눈길에도 수줍어 고개 숙이는 안타까움이, 고개를 넘어가는 봇짐에 얹혀
숨소리 죽여가며 자꾸만 따라옵니다. 첩(妾)의 마을은 점점 밝아오는데..
- 달 1
밤에 하늘을 올려다보면흐리지 않는 날엔 달이 내려와 한마디 건네더라고요
나까지 초대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네요 흠
달은 달이 사랑하는 사람들로 언제나 만원(滿員)임을 내가 잘 아는데..
우주선이 없어 못 가겠다는 어수룩한 핑계에 달이 웃습니다그려
두 팔을 벌리고, 달려드는 달을 안기만 하면 된다나요
싱거워서 나도 웃습니다
그렇게 같이 웃다 보니 둥글게 떠 있는 지구가 보입니다그려
- 달 2
(14)
맑은 당신이 맑음 속에 누워 있습니다.
뜨거울수록 커지는 할머니는, 늘어난 손을 깊숙이 뻗어
상공에 편재한 차가운 당신을 만집니다. 그리고 미지근한 구름을 만듭니다.
구름을 만질 만큼만 손을 뻗어 따뜻한 비를 만드는 어머니.
그 비가 키우는 나는 짤막하게 자라 대지에 빽빽이 찹니다.
그리고 발을 비벼 뜨거운 안개를 만듭니다.
안갯속에서 뛰노는 딸은, 맑음이 밀릴 만큼 늘어나
당신의 얼음장 같은 목을 뜨겁게 껴안습니다.
딸이 매달려 무거워진 당신이 구름과 비와 안개를 걷고 대지로 내려와 서면
빨갛게 달아오른 손녀는 당신의 맑음에 배앓이를 합니다.
당신이 바삐 가르쳐 차게 정제된 손녀를, 다른 맑음 위에 앉히어 높이높이 올려 보내려고,
당신의 희생은 당신답지 않게, 대지에 깔린 맑음을 휘저어 놓습니다.
- 대류권(對流圈)
류
(15)
유유자적 울부짖는 귀뚜라미들 중 하나가 살그머니 덤불을 빠져나옵니다.
홀로 치열하게 침묵하며 겨울을 기다리려는가 봅니다.
생명의 수맥(水脈)을 찾아 저공 비행하는 얄미운 가미가제들 중 하나가
침을 접고 흡혈을 거부합니다.
"착륙이 사라진 신세계"로 무한 선회하는 생떽쥐베리 같은 모기인가 봅니다.
(뱃속에서 부글거리는) 복제된 가려움을 배설하러 엄선한 분뇨를 파고드는
황금빛 집착들 가운데 하나가, 배설물은 물론 음식 위에도 앉지 않는군요.
바글바글한 수구초심들과 일찍이 결별하고
돋아나는 악취들을 연방 비벼대며 자란 결벽이 차마
정갈한 밥상 쪽으론 눈길도 못 돌리고, 숭늉의 훈김에 투명한 날개만 적시는 파리로군요.
군주제를 고수하는 강박적 충성으로 경쟁하듯 꽃술을 핥는 꿀벌들 중에 하나가
반듯한 육각형 너머 기이한 세상을 동경하는군요. 걸리버처럼 말입니다.
여왕의 추상같은 페로몬을 거역하고, 거목이 귀띔해 주는 별천지를 찾아 비상(飛上)하면서
정보 전달과 무관한 춤사위로 무아지경에 도달하려는가 봅니다.
거추장스러운 로열 젤리를 허공에 내갈기면서요..
- 돌연변이
'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45. 고독을 거니는 고독 2 (0) 2024.04.08 44. 고독을 거니는 고독 1 (1) 2024.03.24 42. 천국을 거니는 고독 3 (0) 2024.01.16 41. 천국을 거니는 고독 2 (0) 2024.01.01 40. 천국을 거니는 고독 1 (0) 2023.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