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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지(未知)와의 조우월광 프로젝트 (판타지) 2023. 1. 11. 03:17
서기 1999년 11월 26일 온실 효과로 인한 녹녹함을 타고 하늘의 가장자리를 포근히 감싸고 있던 희뿌연 스모그가, 갑자기 내려온 시베리아 기단에 밀려 눈에 띄게 사그라지고 있었다. 마치 대기권으로 접근하여 지구를 노리는 (영화 속) 사악한 외계인의 모함(母艦)처럼, 살을 에는 바람으로 클로킹한 기단은 거대한 모습을 상공에 숨긴 채 도시의 골목들 구석구석까지 "타이 파이터"같은 작은 냉기들을 출격시켰다. 차가운 바람에 씻겨 오랜만에 투명해진 하늘에는 별이 - 셀 수 있을 정도로 - 드문드문 빛났고, 그들을 다스리는 여왕인양 휘황찬란한 보름달은 그녀의 하얀 얼굴을 뽐내며, 절망에 허덕이는 상준을 유혹하고 있었다. 매스미디어의 그물망으로 지구를 옭아매는 데 성공한 에프엠(F.M.: Free Mason)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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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폭풍 전야Letters to D.J. (지수 외전)/FRIDAY THE 13TH 2023. 1. 6. 23:00
Another stories of Jisoos in parallel universes : 2. Friday the 13th (원본) (3) 오늘 며칠이냐. 9일이요! 그러면 9번 10번부터 둘씩 해서 69, 70번까지 총 열네 명, 종례 마치자마자 사열대 앞에 집합한다. 새마을 부장 선생님의 사역 인원 차출 요청이 계셨어. 각 학급마다 모두 참여하는 일이니 한 명 열외 없이 집합하도록. 만에 하나 도망가는 놈 나오면 너희들이 무서워하는 부장 선생님뿐 아니라 나한테도 죽는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나머지 인원도 딴 데로 새는 일 없이 바로 귀가하도록. 어제 미처 카네이션 달아드리지 못한 녀석들은 오늘이라도 달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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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설상가상지수 이야기/이상한 사춘기 2023. 1. 4. 15:51
박 주은. 지수에게 호감을 가지고 틈만 나면 그에게 말을 걸려고 애쓰는 여학생이다. 덕망 학원 이사장이 대기업 총수인 지수의 아버지 나회장에게 잘 보여 두둑한 후원이라도 받아내 볼 요량으로, 심약해 보이는 왜소한 체구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머리가 뛰어나고 공부도 잘하는 지수를 전교 학생회장 자리에 앉히려 하였으나, 교사들과 학생회 간부들에게 은근한 압력을 가하는 등의 편법에도 불구하고, 지독하게 내성적인 성격의 지수가 - 활동적이고 적극적이며 강한 리더십을 필요로 하는 - 학생회장의 자격에 턱없이 미달됨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들의 반대는 완강했으며, 우선 지수 본인이 죽어도 못하겠다고 하여 섭섭하던 차에, (담임의 강제적 지시로) 학급 내 학습부장 자리를 마지못해 떠맡은 지수와의 접촉을 자주 갖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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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저씨Letters to D.J. (지수 외전)/FRIDAY THE 13TH 2022. 12. 28. 22:34
Another stories of Jisoos in parallel universes : 2. Friday the 13th (원본) (2) 저 아저씨가 바로, 비참해진 저를 여태껏 돌봐주고 계시는, 저만의 충직한 집사이자 보디가드랍니다. 국민학교 때부터, 제 개인 기사로 시작하여 줄곧 저를 밀착 마크하다시피 보호하고 관리해 주신, 제게는 친한 삼촌과도 같은 고마운 분이시죠. 네에, 첫 번째 사연의 서두에서 제가 보호자라고 칭한 분이 이분 맞고요. 하긴 이토록 저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분이니 꿈에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닐 테지요. 이왕 이리 등장하셨으니 잠깐 소개 좀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는 키 백 팔십 오가 넘고 몸무게도 백 킬로를 상회하는 건장한 거구이며, 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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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페스티발지수 이야기/이상한 사춘기 2022. 12. 27. 23:02
이때, 교실 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우리의 "사이코"가 등장하신다. 하이고, 이런 땟국물들 보게나. 김선생!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죄송합니다. 이 녀석들 단체 기합 좀 주고 있는 중입니다. 겨우 이 정도로 기합이 되겠어? 요 상태 고대로, 여자애들 반 앞에다 꿇려 놔야지!? 안 그래도 그럴 작정입니다. 다시 한 번 웅성웅성. "싸이코"의 번득이는 눈알이 "엎드려뻗쳐" 하고 있는 철용이를 놓치지 않는다. 슬금슬금 그에게로 다가오는 "싸이코". 헤이! 차철요이.. 또, 너냐? 나한테 그렇게 두들겨 맞고도 아직 철이 덜 든 모양이지? 그는 손바닥으로 철용이의 큼직한 궁둥이를 두어 번 철썩철썩 때리더니 아래로 손을 뻗어, 중력의 법칙에 순응하여 바닥을 보며 능수버들처럼 늘어져 있는, 사춘기의 성징이 제법 거뭇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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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녀를 거니는 고독 (지은이) 3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2. 12. 26. 22:41
여자와의 사랑 말이니?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지는 못하였다. 상대 탓만 하는 내게 사랑을 알 기회가 오지 않는 건 당연하지. 남녀 간의 상식적인 사랑에도 난 무지하였다. 그것은 저주와 다를 바 없었지. 응보로서 따르는 고독 때문에 저주라 여긴 것은 아니다. 원인을 모르는 답답함이 실존을 갉아먹는 것 같아서였어. 누가 봐도 게으름과 이기심 그리고 성격적 결함 때문인 게 명확한데, 무엇이 답답하다는 건지.. 뚜렷한 이유를 인정하기 싫어 괜히 숨 막혀 하며 사회 탓, 카르마 탓을 하였다. 고치려 노력 않는 느긋한 도태가 철부지처럼 생떼를 부릴 수 있었던 것도, 명백한 이유는 이유가 아니라는 현학적 모호함 때문이었지. 젠체하는 모호함이 명료하게 펼치는, 복잡한 인생들. 푸근한 모호함이 명료하게 만개하는, 화사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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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그녀를 거니는 고독 (지은이) 2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2. 12. 25. 01:48
무슨 그런 야무진 착각을..? 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것도 두려운 사람이야. 아저씬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는 분 아닌가요? 그렇게 보여요. 사는 것을 포기한.. 그런 분이 내가 걱정돼서 걸음을 멈추었죠. 강도나 불량배를 만나 곤욕을 치르는 중이었어도 아저씬 그랬을 거예요. 용기가 아닌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날 지켜줬을 거예요. 이러나저러나 죽는 건 마찬가지라는 심경으로.. 타인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 무모한 희생에 다가서는 것이지요. 망설임 없이. 어린 게 제법이네. 세상을 일찍 알면 다 너 같을까? 추워요. 따뜻한 곳에 들어가서 한 잔씩만 해요. 우리.. 나의 시선은 정면 차도 쪽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그녀가 예의 당돌한 표정으로 또 빤히 주시하고 있음을, 또렷이 느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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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못 말리는 애수(哀愁) : 고질병상준 이야기/어느 기쁜 성탄절 2022. 12. 23. 22:28
옆에 누워 잠이 든 연지를 상준은 연민의 눈길로 내려다본다. 새근거리는 숨결을 따라 너울처럼 일렁이는 싱그러운 갈색 머리는 베개 가득 풍성하였지만, 전기스탠드의 빨간색 꼬마전구가 희미한 불빛을 드리우고 있는 고운 어깨선이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여, 마음이 아팠다. '이 순간이 꿈이 아니길.. 아니, 차라리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꿈이었으면...'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동네를 주유(周遊)하는 천진한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흐트러진 이불을 가지런히 여미어 주고, 머리맡에 팽개쳐진 구닥다리 워크맨을 당겨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새벽은 아름다워] 2부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성탄절. 밖에는 지금 흰 눈이 펑펑 내리며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