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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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마지막이 기다리는 곳지수 이야기/이상한 누나 2023. 10. 27. 14:36
애기야, 나 왔다. 어머, 교수 오빠 왔네? 요즘 왜 이리 뜸했어? 그래도 명색이 이년 비공식 기둥서방인데 너무한 거 아니야 오빠? 그렇게 됐어 인마. 근데 너도 말 진짜 안 듣는다. 내가 오빠 앞에 교수는 빼라 했어 안 했어? 널 안 지 한 일 년 다 돼가는데 그 소린 씨부랄 아직까지 적응이 안 되네.. 너 자꾸 그딴 식으로 부르면 나 발 끊을 거야!? 대학에서 학생들 가르치면 그게 교수지 뭐야? 이 화숙이 아무리 무식한 년이지만 그 정도도 모를까 봐? 간판만 대학이라 걸어 놓은 다 쓰러져 가는 학교에서 시간 강사 짓 하며 겨우 입에 풀칠하는데 교수는 얼어 죽을.. 하여간 이 유식한 오빠는 너무 겸손해 탈이야. 것도 적당해야지 나 같은 무식쟁이 기죽이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뭐야?! 허허, 이년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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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엄마를 떠나 엄마 곁으로지수 이야기/이상한 누나 2023. 9. 23. 01:37
화숙이 누나를 만나러 선아리 베가스를 일주일에 서너 차례씩 내 집 드나들 듯한지도 벌써 삼 주째. 자기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으며 시간을 보내던 약골 아들이 웬일로 - 친구와 어울리겠다며 - 외출하는 빈도가 잦아지자, 처음에는 바깥바람을 자주 쐬고 몸을 많이 움직여 주는 것도 성장하는 아이에겐 바람직할 것 같아서, 또 너무 내성적이라 탈인 아이가 친구들과의 교류에 부쩍 신경을 쓰게 되니 이 역시 반가운 현상인 듯싶어서 아들의 잦은 나들이를 크게 개의치 않던 어머니였으나, 오후 여섯 시만 넘으면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괜한 조급증을 내고 차려 놓은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허겁지겁 대문을 나서기 바쁜 지수의 행동이 평소의 자연스러움을 상당 부분 상실하였기에, 그리고 하루가 멀게 만나야 할 정도로 가까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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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 섬 안에서지수 이야기/이상한 누나 2023. 9. 2. 23:32
방범 아저씨의 세력권으로부터 일단 벗어나야겠다는 결심이 선 이상 그녀를 발견하였다고 해서 달리기를 멈출 순 없었다. 화숙이 누나를 반드시 만나야 한다는 집념과 보고픔의 갈망이 그녀와 눈을 마주친 시점에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졌고 지수의 행동을 한층 침착하고 주도면밀하게 바꾸어 놓았다. 다시 도로변까지 나온 그는, 아까 잠시 스치며 바라본 그녀의 자태를, 곧 있을 만남에의 기대로 기쁘게 펄럭이는 "희망의 보자기"에 꼭꼭 싸서 마음속 깊은 곳에 소중히 품었다. 그리고, 그것이 떨어져 깨질까 봐 내딛는 발걸음마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사창가 둘레를 멀찌기 도는 원거리 코스를 선택하여 천천히 걸으면서도, 그녀의 품에 안기는 "즐거운 평화"를 상상하자니 상큼한 긴장감은 발바닥으로 몽실몽실 빠져나와 부력을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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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위험한 연모(戀慕)지수 이야기/이상한 누나 2023. 8. 5. 11:34
두 녀석의 집 앞까지 중간 기착지를 꼼꼼하게 경유한 택시가, 마지막으로 지수의 대문 앞에 도착한 시각은 밤 11시 5분. 돈 관리를 한 민호가 야무지게(?) 택시 요금을 삥땅한 관계로, 지수는 하는 수 없이 기사를 기다리게 해 놓고 초인종을 눌렀다. 지수니? 네에.. 잠시 후 육중한 성(城)문이 열리자, 일단의 무리들이 (그의 어머니, 아버지, 큰형, 유모, 그리고 그의 전용 운전기사인 김기사까지..) 우르르 몰려와 그를 에워싸며 법석을 떨었다. 너 인석! 지금껏 어디서 뭐 하다 온 거야? 더구나 오늘 같은 날은 집에 얌전히 있어야지. 어머니가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알아?! 바쁜 볼일 때문에, 친척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뜨는 무렵이 되어서야 그들과 합류한 큰 형. 부모님 앞에서 오랜만에 맏이의 위엄을 과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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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엉뚱한 애착지수 이야기/이상한 누나 2023. 7. 13. 17:20
아얏!! 아야야! 아파, 이 자식아!!! 화숙이, 가슴을 물고 늘어지는 지수의 머리를 쥐어뜯는다. 머리카락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는 듯한 통증이 두피를 찌르는 순간, 그는 해일에 휩쓸려 육지로 밀려와 있었다. 파도에 쓸려 돌 투성이 황무지로 다시 돌아온 그를 반겨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엉큼한 녀석 보게? 얌전한 거시기가 뭐 어쩐다더니.. 아이고 젓탱이야! 지수의 입과 손에 시달려 시뻘게진 양쪽 가슴을 손바닥으로 비벼대며, 그녀가 초라한 화장대 앞에 앉는다. 그다지 볼품없는 그것들을 거울로 열심히 살피면서, 흠집이라도 났나 싶어 애지중지 마사지를 하는 등 유난을 떤다. 한편, 그 난리통에 제정신이 돌아온 지수는 자기가 한 짓이 창피하고 두려워 구석에 서서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만 있다. '내가 왜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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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상한 파라다이스지수 이야기/이상한 누나 2023. 6. 26. 17:44
새까맣게 먼지 쌓인 형광등은 미동(微動)에도 흔들거려 곧 떨어져 내릴 것 같고, 일어서면 머리에 닿을 듯 낮은 천장은 누렇게 색 바랜 도배지 무늬를 지수의 코 앞에 들이밀어 숨 막히는 착란을 강요한다. 여자가 상반신을 일으켜, 천장의 꾀죄죄한 무늬를 멀거니 바라보고 있던 그에게 얼굴을 바싹 갖다 대었다. 거친 말만 수다스럽게 뱉어 내는 "유령 같이 생긴 여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지수는 고개를 얼른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소박하게 생긴 화장대가 바로 눈앞에서 꾸벅 인사를 한다. 늘어서 있는 갖가지 화장품들을 이빨처럼 드러내고 싱긋 웃는 화장대의 숏다리 옆엔, 주인을 닮아 부끄럼을 잃어버린 생리대 뭉치들이 당당하게 쌓여 있다. 아직도 내가 무서워? 이거 순 겁쟁이 아냐?? 곱살하게 생겨가지고.. 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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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숙이지수 이야기/이상한 누나 2023. 6. 12. 20:57
벌렁 나자빠지면서 뒤통수를 벽에 찧었는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 오만상을 찌푸리는 도깨비의 입에서 성질 더러운 계집애의 앙칼진 목소리가 튀어나오자, 졸지에 컬트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지수의 경련하던 위장은 그만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엑소시스트"의 한 장면을 멋지게 재현하겠다는 사명감(?)으로 악마의 진액인 푸른색 토사물을 뿜어 올릴 절묘한 타이밍에 도달하였다. (이것은 비몽사몽의 환상 속에서 우쭐대는 위장의 소망일 뿐 실제로는 단순히 위액과 음식물 찌꺼기의 지저분한 콜라보가 현실을 망쳐 놓을 태세를 취하는 것에 불과했다.) 야! 너 왜 그래?! 어맛!? 얘 눈알 뒤집어지는 것 좀 봐. 야, 아직 안 돼! 여긴 내 방이란 말야. 조금만 참아! 알았지?! 여자가 미닫이문을 열고 후닥닥 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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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이상한 누나지수 이야기/이상한 사춘기 2023. 5. 19. 18:57
'얘가 어찌 된 일이야. 9시가 다 되었는데 들어올 생각을 않네?'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유모는 걱정이 되어 밀린 설거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평소에 거짓말을 하지 않고 어른과의 약속은 결코 어긴 적 없는 아이라 일찍 들어오겠단 얘기만 철석같이 믿고 - 몸이 두 개라도 모자를 만치 몹시 분주하단 핑계로 - 윗선에 보고하지 않은 것이, 이제 와서 뼈저리게 후회되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2차로 마련된 응접실 술자리에서 저마다 취기가 돌아 흥겹게 이야기꽃을 피우며 양주잔을 돌리고 있는, 지수의 아버지와 그 형제들. 안방에서는, 그들의 부인들이 따로이 모여 맥주 파티를 위한 한상을 거하게 차려놓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위태롭게 유지하는 가운데 자질구레한 잡담들이 활발히 뛰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