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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 변의(便意)
    Letters to D.J. (지수 외전)/FRIDAY THE 13TH 2024. 9. 29. 21:18

     

     

     

     

     

     

     

     

     

     

     

     

     

     

     

     

    Another stories of Jisoos in parallel universes : 2. Friday the 13th (원본) (32)

     

     

     

     

    상준이 형이 혼잣말로 구시렁거리며, 그새 많이 어두워져 걷기조차 힘들어 보이는 공간을 익숙하게 휘젓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봐란듯이, 낡아 빠진 침낭 하나를 찾아서 나오더군요.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것은 둘째 치고, 푹 쉰 듯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러 저절로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데다

    군데군데 찢기고 뜯어져 거의 넝마 상태가 된 "하자"투성이었는데, 문제는

    이 거적때기만도 못한 불량 침낭도 달랑 한 개밖에 없다는 사실.

     

    하기야 조금이나마 소용에 닿을만한 물건들은 이미 오래전에 저들 수중으로 들어갔겠지요.

     

     

    도저히 사용 못할 거 같아서 여기다 처박아 둔 거라, 보다시피 상태가 이렇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을 테니 사용해 보시던가.

     

    그는 더러운 것을 얼른 놓아 버리겠다는 듯이 그것을 툭 던지면서 말했고, 그 바람에

    바닥에서는 켜켜이 쌓인 먼지가 풀썩하고 올라왔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오랜만에 느낄 수 있는 무거운 정적이 한동안 이어졌습니다.

     

    "해가 뜨고 지는 현상이 현실의 속도로 유지된다는" 사실에 안도가 될 만치 이곳은,

    곧 뒤집어질 것 같은 불안과 불안정이 팽배한 곤죽의 공간이었습니다.

     

     

    마스터님 주무세요?

    ............

    꿈속에서 밤에 잠을 자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게 맞는 건가요?

    불안하여 잠이 안 오는 심정 알겠네만, 분투해야 할 내일을 위해 눈을 좀 붙여두는 것도 나쁘진 않아.

    마스터님도 저처럼 잠 못 이루시면서..

    삼매에 든 본령의 분신은, 자각하는 꿈계에서 잠들지 않는다네.

    명상을 할 따름이지.

    저도 이 정도면 자각에는 웬만큼 이골이 난 듯한데 굳이 잘 필요가 있을까요?

    피곤하고 자고 싶다는 생체 반응이 이 안에서는 착각에 지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는데 말이죠.

    너는 그러하나, 네가 담겨 있는 이 어린 드림바디와, 이 아이를 만든 직계 꿈주, 그리고

    이 복합 드림바디 안에 깃들인 평행 드림바디들과 비교적 온건한 혼령들은

    아직 자각의 수준에서 너에 비해 한참 떨어지는 존재들이므로, 이들이 너를 도와 이곳을 탈출하려면

    얼마만큼의 휴식은 필수적이란다.

    잠시 잊고 있었네요.

    난 정식 꿈주가 아니라 얘한테 빌붙은 불청객임을..

    지금 자신을 낮추는 것인가? 그리 생각할 필요는 없지.

    네가 이 어린 지수에게 입식함으로써 이 아이와 중첩된 모든 존재들이 엄청난 기회를 얻게 된 셈이니까.

    꿈계를 자각하고 명상몽계로 진입할 기회 말일세.

    금번의 시련을 무사히 잘 넘긴다면 너는 해탈의 여정을 지속할 한 차원 높은 추진력을 얻게 될 것이고,

    이들 또한 꿈에 갇힌 신세를 탈피하여 선경으로 도약할 에너지를 획득할 테니, 서로 윈윈 하는 관계라는 게 맞겠네.

    제가 맡은 책임이 막중하단 걸 또 한 번 일깨워 주시는군요. 휴우..

    부담이 가중되는 말씀 감사합니다. 그리고,

    졸리지 않아도 억지로 잠을 청해야 하는 이유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다가 꿈을 꾸면 이거야말로 꿈속 꿈일 테지요?

    "내가 있는 지구"로 귀환하는 꿈이라도 꿨으면 좋겠습니다.

    제 육신은 별 탈 없이 잘 자고 있을지..

    운송자들이 알아서 잘 조치하였겠지만..

    이 장대한 초우주적 여행이 언제 마감될지는 모르겠으나 어차피 시간을 초월하는 여정이라 하니

    "제 육신이 소멸한" 뒤에 돌아오는 불상사는 걱정할 필요 없겠지만서도..

    그러고 보니 운송자 양반들, 꿈계는 본인들 소관 아니라는 듯 마스터님한테 나를 맡겨 두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네요.

     

     

    참, 한 가지 의문이 있사옵니다. 아까 쟤들이 마스터님을 새파랗다는 표현까지 써가며 아주 젊게 보던데

    마스터님이 어떤 분인 줄 알면서도 겁대가리를 상실하고 퉁명스럽게만 굴던 녀석들이 새삼 입에 발린 소릴 할 리도 없고..

     

    제 눈에 마스터님은 영락없는 중년의 히말라야 도인이신데 저들한텐 또 다르게 보이기라도 하는 건가요?

    그리고 마스터님께서 분명 이렇게 응수하셨단 말이죠? "내 실제 나이를 안다면 놀라 자빠질 거다"라고요.

    제게 말씀하시기론 본래의 당신은 드림마스터 양성 학교 학생으로서 제 또래의 젊은이라 하신 것 같은데

    이십 대 초반이 그렇게 놀랄만한 나이인가요?

     

    허허, 상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모양이구나.

    연관되는 상념이 이어지다가, 금세 기억에서 사라질 무작위의 상념들이 함께 명멸하면서, 잠으로 접어드는..

    이것이 잠드는 순서이긴 하지.

     

    그렇다면 나의 말을 자장가 삼아 수면을 취해 보도록 하거라.

     

     

    먼저, 끄트머리에 나온 궁금증은 꿈계에서는 별것이 아닌 내용이니 길게 얘기할 것도 없겠다.

    저것들의 정체가 온전한 인간일 리 없다는 것쯤은 너도 충분히 짐작할 테지? 저리 대놓고

    위화감을 조성하는 언행들을 거침없이 하니 말이다. 인간이 아닌 것들의 시각에선 지금 내 모습도

    새파랗게 젊은 모습으로 비칠 수 있지 않겠나? 단순히 생각하거라.

     

    그리고, 너도 이젠 만물의 평행계 시스템에 어느 정도 적응하여 대략은 알고 있겠지마는

    "너와 내가 속한 차원"에서 "본디"와 "본디가 아닌 것"을 구별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느니라.

    이곳으로 소환되어 내 분령과 합쳐진 "나"는 (엄격히 구분하자면 "나의 드림바디"라 해야겠지..) 내 평행 꿈계 시스템 속

    명상몽계들 중 한 곳의 드림바디로서 나의 분신이자 동시에 본령이라 할 수 있는 지고하신 존재이니라.

    이런 대단하신 분이 "본인의 분신이면서 본체"인 이 드림마스터를 위하여 기꺼이 나의 부름에 응하신 게야.

     

    드림바디가 해탈하여 명상몽계라는 열반으로 들어가는 경우 그의 지나오신 세월을 우리가 헤아리기란 사실상 불가하다.

    즉, 이곳에서만큼은, 측량하기 어려운 나이를 가진 내가 되는 것이지. 

    우리의 억조 평행 드림바디들 가운데 이러한 지고의 존재들도 많이 계시므로,

    복잡계의 성격을 띠는 우리의 꿈계 시스템이 흩어지지 않고 이렇듯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거란다.

     

     

    ​너의 조력자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더냐?

     

    이왕이면 빛의 존재로부터 인도를 받았으면 더 좋았겠으나, 너의 지독한 업보와 그로 인한

    "이생에서의 용서받기 힘든 죄과" 때문에 에프엠 마스터가 네게 끄달려와 배치된 것이며, 이 역시 자연스러운 이치니라.

    네 마음에 흡족하지 않더라도 어찌 되었건 이는, 지옥에서 벗어날 마지막 기회를 네게 주려 하신 하늘의 크나큰 배려이니,

    더는 불평하지 말고, 악조건 속에서 스스로 깨달아가는 현명함으로,

    "네가 합일할 근원"과 널 위해 끝없이 기도하는 조상들 그리고

    너에게 유리한 "우주의 기운"을 배치하기 위해 애쓰시는 보호신령과 천지신명께 보답할지어다.

    나 "화이트 드림마스터"는 성스러운 빛 존재들과 상보적 관계를 맺고 그들과만 연대하게 되어 있으나, 이번에

    오로지 지수 너를 위하여 특별히 에프엠 마스터와 전략적 제휴를 한 것이니만큼,

    네가 나를 도와 맡은 바 책무를 완수하고 나면, 너를 안전한 상태로 네 안내자들에게 다시 인계할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나는 근원 섭리의 계획에 차질이 없도록 일조하는 셈이며,

    "드림 마스터의 진화된 임무를 구현하는 진일보"에 기여한 선구적 마스터로서 자부심을 갖게 되리라.

     

    마스터님에게도 숨길 수 없는 야망이 있으셨네요.

    이것을 너는 야망이라 표현하는가.

     

    위대하신 근원 의식과 대(大) 우주를 위하여 성스러운 섭리를 보조하는 봉사와 희생.

    우리의 완성을 지향하는 이 거룩한 행위가 말이지?

    단어를 잘못 선택했다면 죄송합니다. 솔직히

    마스터님의 신념과 의지가 조금은 교조적으로 느껴져서요..

    그랬나? 내가 아직 많이 부족한 모양이로군.

     

    너도 예까지 오면서 알게 모르게 많이 각성하였을 테고 이 정도 지적할 자격 충분하지. 암..

    마스터님 말씀이 아무래도 자장가로서는 부적격인가 봅니다.

    제 말똥한 의식을 더욱 날카롭게 자극하셔서요, 헤헤.

    제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고향을 그리는 꿈을 꾸겠습니까.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제 육신. 행성에 갇혀 있는 제 본령, 저의 카르마. 다 부질없어요.

    그리워할 가치가 어디 남아 있겠습니까.

    제가 살 길은 현 위치에서 뒤돌아보지 않고 전진하는 것뿐.

    나를 둘러싸고 조여오는 겹겹의 우주들을 뚫고

    그렇게 견고한 환상들을 격파하고

    신성한 중심으로 도약하는 것뿐.

    저 불쌍한 드림바디를 위해서라도 그만 상념을 내려놓고 깊은 휴식을 취하게나.

     

    마스터는, 낡고 더러운 침낭 속에서 - 여전히 정신을 잃고 -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영미를 눈짓으로 가리켰습니다.

     

    예, 지금 제 곁에 있는 (저의 하나뿐인) 여자 친구니까 제가 지켜야겠죠.

    어린 녀석이 여자를 다 사귀고 기특하네요. 기특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이 녀석 나이 때, 또래의 여자애들을 보면 부끄러워 고개도 못 들고 피하기 일쑤였는데..

    그녀로선 일생일대의 난관일 테죠.. 어쩌다 이런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는지..

     

    제 얄궂은 꿈의 불쌍한 희생자라는 생각에까지 이르니

    앳된 미소녀의 창백한 얼굴로부터 연민의 눈길을 도저히 거둘 수 없었습니다.

     

     

     

     

     

    윽!

    아 이거 참, 하필 이 시점에 배가 살살 아파 오는 건 무슨 조화람..

    마스터님, 꿈에서 느끼는 생리 현상이 이처럼 실감 나는 건 또 처음이네요.

    꿈에서 대소변 보는 경우야 비일비재하나 이렇게 변의가 실제처럼 생생하게 전해 오지는 않거든요 보통.

     

    현실에서 자다가 마려울 때 흔히 꾸게 되는 "배설 꿈"이라 해도, 똥오줌이 진짜처럼 배출되는 것과 별개로

    그냥 배설을 연기하고 흉내 내는 수준이 대부분인데, 이런 경우는 처음인 것 같아 당황스럽네요.

    음, 단순히 넘길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너처럼 꿈을 자각하는 능력이 출중해진 자일수록 꿈속 세상의 중력과 법칙을 초월하게 마련이거늘

    꿈계에 지배당하는 인간들과 다름없이 3차원적 본능을 행사하다니..

    역시 이곳은 너를 구속하기 위해 기획된 거대한 트랩답구나.

     

    아윽! 곧 나올 것 같은데 어쩌죠?

     

    아까 아저씨가 - 변소 가고 싶으면 - 막사 밖에 파 놓은 구덩이를 이용하라 했는데, 아무래도 다녀와야 할 듯요!

    무섭긴 한데 그렇다고 이 안에서 해결할 순 없는 노릇이잖아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제가 이 아이한테 들어온 이후로 무얼 먹은 기억이 없는데 왜 이리 마려운지 모르겠어요.

    먹는 건 고사하고 아까 그쪽에서 똥물까지 탈탈 토해낸 아이인데 말입니다.

    그것을 이 심상찮은 이상(異常) 현상의 증거로 대지는 말거라.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

    네 지나온 상념들을 뒤적여 그대로 복기해 보마.

    "꿈주는 무의식의 바다에서 꿈의 주요 내용들만을 건져 인지하기 때문에

    의식의 스위치를 자유자재로 온 오프 하며 꿈을 꿈답게 압축하여 체험하지만,

    꿈이 그의 세상 전부이자 인생인 드림바디는

    자신을 창조한 꿈주 - 의 있고 없고 - 와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삶을 살아간단다.

    시간에 철저히 종속되어 사는 이 세상 인간들처럼.

    주요 사건이 아닌 일상의 흐름은 - 꿈주에게 무의미하여 - 기억의 영역에서 제외되지만,

    드림바디는 착실하게 그 미싱 링크 안의 흐르는 시간을 밟아 생활이란 걸 영위하여 왔다."

    예, 기억납니다!

    "운송자들이 언젠가 해 준 이야기"를 떠올린 적이 있었죠. 그때가 하필

    얘가 시신들과 합체된 막사를 보고 마구 게울 때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 미싱 링크와는 상관없이 - 저의 의식이 유지되는 동안에도 만 하루 가까이는 위가 텅 비어 있었음이 분명하기에

    배가 아픈 게 이상하고 이해가 안 간단 말이지요.

    그건 네 입장일 뿐이고 네가 곧 이 아이는 아니지 않으냐.

    너의 상념이 인식하고 있듯이, 드림바디는 그의 세상에서 자신의 생활 습관대로 일생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꿈계라 일컫는 그 세상에서, 인과율과 운명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지.

    그의 시간 속에서 그만의 패턴대로 행동하기에

    그의 영육은, 그곳 "시간의 퇴적"이 주입하는 특유의 고착을

    "그에게 주어진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단다.

     

    자라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긴 "심신의 건강 문제"라는 관점으로

    이 갑작스러운 배탈을 바라봐야 한다는 뜻이다.

    더구나 넌 이 아이의 세상을 펼쳐 놓은 직계 꿈주도 아니므로

    얘와의 동일시에 필요 이상 매달리는 것은 금물.

    알겠느냐?

    꿈계의 독립된 역사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엄연한 타인으로 이 애를 보라는 말씀이시군요.

     

    객관성을 잃지 말아야 하는데

    이렇듯 저의 의식이 변의를 심하게 느끼고 있으니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네요.

    얘의 체질상 습관처럼 찾아오는 배탈일 수 있다는 것까진 이해하겠는데,

    그게 왜 꼭 지금이어야 하는지가 참..

    그래, 그건 내가 딴지를 걸 수 없는 합리적인 의심인 게 맞다.

    너를 어디론가 자꾸 몰아가는 설계가 은밀히 작동되고 있는 느낌이구나.

    내가 같이 가 주마.

    정말 그래 주시겠어요?

     

    그랬으면 하는 마음 굴뚝같아도 감히 부탁드릴 엄두가 안 났는데

    이렇게 먼저 배려해 주시니 그저 황송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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