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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정과잉 증후군위선자들의 사랑 (상준 외전) 2024. 3. 10. 16:06
여(女) : 권태기에 접어든 삼십 대 중반 기혼녀.
결혼 육 년차.
이름 나오미.
미혼 시절 업소녀 경력 있음.
업소 손님 중 착하고 단순한 순정남이자 성실한 기술직 일인이
그녀를 일방적으로 좋아하여 여러 번의 대시 끝에 결혼에 성공한 케이스.
딱히 그녀의 스타일은 아니나 그녀를 진심 사랑하는 것 같아
업소 생활에 진력이 나던 차에 크게 고민하지 않고 청혼을 수락함.
즉, 현시점에서 죽고 못 사는 관계는 아니라는 뜻.
동갑내기인 그와의 사이에 네 살배기 딸 하나 있음.
자기 아이에 대한 애착도 아주 강한 편은 아님.
전업주부이길 바라는 남편의 의견을 무시하고 서비스 직종에 알바로 근무 중.
육아는 당연히 남편이 맡다시피 함.
어려서부터 외지로 떠돌며 가족의 도움 없이 홀로 살아온 탓에 독립심과 사회적 생존력이 강한 데다
마인드가 개방적이고 융통성과 사교성이 돋보임.
한마디로 조강지처 타입은 아니며 오히려
여성의 끼를 본능적으로 발산하는 요부형에 가까우나 노골적으로 그런 기질을 티 내고 추구하지는 않음.
그렇다고 일부러 억누르지도 않으며, 좋게 표현해 긍정적인 사고로 자신의 끼를 합리화하거나 미화하는 편임.
성격이 화통하고 서비스직에 특화된 달변을 갖춤.
본인의 활달한 성격과 다르게 독서를 즐기며 고로 잡지식에 해박한 편.
반면 지고지순한 여성성과 (남녀 간의) 희생적인 사랑에 대한 로망을 항상 갖고 있으며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그러한 캐릭터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음.
그러나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오는 실망감을 상대에게 자주 투사하며, 따라서
자신이 그리는 사랑의 성숙도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현실적인 상대와
그럴 수밖에 없는 그의 현실적 한계로 인한
우울감 내지는 절망감 때문에 감정의 기복이 심함.
이는 그녀의 언밸런스한 사고 패턴에서 기인한 심리적 혼돈과 맥을 같이하는데, 소녀적 감성으로 앞뒤 재지 않는
몽환적 의식의 제스처가 "달콤하고 아름다운 불륜"을 꿈꾸며 도피적 행각을 시작하지만,
태생적 단순함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고답적인 로망을 - 체형에 맞지 않는 겉옷처럼 - 부자연스럽게 둘러
결국에 가서는 그 가상의 무게에 스스로 짓눌리고 마는 형국이랄까.
처음의 보기 좋던 단순함, 담백함과 솔직함의 즉흥성 딱 거기까지가 좋은데
그러한 즉물적 가벼움에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임.
육욕을 위한 일회성 만남은 유치하고 무가치하고 비도덕적이라 여김.
"다분히 그런 목적의 지배하에 있고 그래서 접근하는 남성성"과 결합할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는 환경과 처지임에도
본인의 욕망에서 비롯된 후끈한 초심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대신, 나중엔, 도덕을 논하는 이율배반에 갇혀
스스로를 혼란케 함과 아울러 상대방의 진을 빼고 심히 난처한 지경에 빠뜨리는
(굳이 쓸데 있을까 싶은) 멜랑콜리한 무거움으로 즐거이 무장하게 됨.
여성치고는, 감상적인 "관념의 유희"에 몰입하기 쉬운 성향.
학력 콤플렉스를 그런 식으로 해소하는 듯도 하나 입증된 바 없는 추정일 뿐임.
남(男) : 삶이 권태롭기만 한 서른 살의 무직.
세속적인 의미에서 철이 덜 든 사내.
이름 전상준.
본인이 착하다고 착각하며 그것으로 무능력을 포장함.
쓸데없는 방면에서 인텔리한 룸펜.
생활을 초월한 척 으스대며 캥거루족의 상대적 빈곤감과 열등감을 합리화함.
표면적으로는 고상함의 가면을 쓴 채 생존을 위한 저열한 영악함을 내면에 장착하고 있음.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함부로 판단한 후에는, 상대에 대한 인간적 배려나 연민을 이론적으로 풍부하게 유지할지언정
관계의 과정이 흐르고 나면 종국엔 그 상대를 철저하게 이용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됨. 그러고는 가증스럽게
자괴감으로 치를 떪.
헌신이나 박애의 정신을 추앙은 하지만 실천할 의지는 애초에 없어 보임.
그런 단어들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이기적이고 게으른 나르시시스트.
살아감에 있어 겁이 많고 소심하며 끈기가 부족.
그러나 가벼운 유희에 대해선 끈질긴 집착과 더불어 쟁취를 위한 인내가 상당한 편.
심리적 퇴행으로 인한 구순기적 애착이 있다고 스스로 유추하나
애정결핍의 징후가 뚜렷하다기엔, 자라면서 - 과잉보호하는 - 어머니와의 밀착이 남다르게 꾸준하였음.
(그게 결핍이라고? 그러니까 결핍인 거라고?)
여성을 향한 욕구가 보통의 그 시기 남자들보다 특별히 강하다고 볼 순 없으나,
보통 이상의 미모를 정상적으로 사귈 수 있는 여건과 배경 혹은 형편이 도저히 아니며
이는 사회적 공포증에 의한 현실 도피 성향이 끌고 온 자업자득.
현실의 환경을 탓하기 전에, 이른바 세속 적응 게놈과 특히 연애 유전자의 기형 또는 망실이 근본적으로
그의 여성을 대하는 전반적인 방식에 이상을 초래한 듯. (어디까지나 추측.)
연애에서 결혼으로 이어지는 일반적이고 통상적인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아니면 내밀한 본의가 작용하였거나)
멀찍이 이탈하였기에, 그럼에도 동물적 발정 욕구로 매춘에 의존하는 노골성은
성병에 대한 공포 및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 극도로 혐오하였기에,
인텔리의 추상성이 기획하는 플랜과 패턴에 입각하여 자신만의 사랑(?) 공식을 적용하는 기이한 행태를 보임.
욕정을 추구하는 단순한 목적을 위해 꽤 복잡한 방법을 동원한다랄까. 스스로도 사랑이라고 깜빡 속을 수 있게..
이런 점에서 나오미와 코드가 어느 정도 맞음. 표피적으로는 전혀 다른 부류인 듯 보여도..
자신조차 딜레마에 빠뜨리는 교묘하지만 어리석은 장치를 고안하여 투박한 욕망을 도금하는데
나오미와의 차이라면, 본인의 달콤한 꿈을 현실로 유도할 용의가 충분할 만큼 - 즉흥적인 그 순간만은 - 적극적이고
에너지가 충만한 그녀와 달리 그는
파국을 상정하여 언제든 "이번엔 현실"로 달아날 수 있게 간사한 한 발을 걸치고 있다는 점. 즉
그녀와 다르게 감정 파동의 고저 진폭이 무딘 톱니처럼 잔잔하여 침착한 편이며
초라하고 비루해진 삶이 주눅 들게는 하였으나 "어쨌든 소시오패스"적 증세가 그의 뇌리를 타고 스멀거림.
치기 어린 치정과는 상극인 포지션에 있으면서도
말초적 성애의 유혹에 성큼 들어서는 순간 말짱 도루묵이 되어 버리고 마는, 어설픈 냉혈한이기도 함.
도루묵의 원인은
망신살과 응징을 몹시 두려워하는 주제에 "임자 있는 여자"를 레이다 망에서 배제하지 않는 무모한 허술함 때문.
(선택의 폭이 많이 협소한) 그의 편력 스펙트럼을 대담한 유부녀로까지 확장한 것은 합방 성사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못난 남자의 고육지책인데, 남자의 외모가 그럴듯하면 능력이 좀 못났어도 대체로 관대한 그녀들이었으므로
그가 위험을 감수할 가치(?)는 있었다는 이야기.
여성의 모성 본능에 비굴하리만치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본인의 정서적 안락을 지속하기 위해
"상대 여성이 소유한 모든 것"과 나아가 그녀의 존재 자체를 이용하고 지배하려 드는
지극히 악마적인 속성이 잠재의식에 도사림.
궁상스러운 현실이 습관과 행동에 짙게 배어 - 이성에게 잘 보이려고 - 고고한 체하는 억지 기품과
적잖이 부조화를 이룸.
이의 부작용으로서, 알량한 "남자의 자존심"마저 팽개치고 구질구질한 요구를 뻔뻔하게 일삼는
치졸한 자포자기가 불규칙하게 반복되기도 함.
백수의 전형적 특색인 낮은 자존감이 그로 하여금 여성의 외모에 둔감하게 만들었고 (유일한 긍정 효과?)
이로써 "여성성이라는 관념이 주는 추상적 관능"만으로도 은은한 오르가슴을 유지하는 경지에 오르게 됨.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실은 조작된 중독에 불과하며, 도태를 예고하는 서글픈 "존재론적 발기부전"일 따름.
이상한 성격의 "왜곡된 정욕"이 여성성의 육화들을 조달받을 수 있었던 확실한 창구는 인터넷.
곧 싸기 직전의 왕성한 포기가 쾌조의 적극성을 띠며 "선택해선 안 될 나오미"를 낙점한 곳도 싸이월드.
이리하여, 발화하기 직전의 두 위험인자 나오미와 전상준은 "끝이 정해진 치열한 사랑(?)"을 시작하게 되는데..
무거운 열정과 가벼우려고 발버둥 치는 냉정 간의 불꽃 튀는 전투라지만, 그것들을 둘러싸고 끈적한 멜로적 감상이
눅진하게 묻어나는 것은, 이 둘에게 있어 냉정과 열정은 건조하고 적대적인 대치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열정이든 냉정이든, 공히 넘쳐흐르는 감정을 (비 오듯 흐르는 색을) 주체하지 못하고 서로를 향해 경쟁하듯
"우수에 젖어 우쭐한 참회"와 "발랄하게 젠체하는 애증"을
사랑스러운 동작으로 열심히 투척하는 양상이랄까.
양쪽을 점령하던 각각의 세상들은 사라지고 무량한 진공 속에서 온전히 상대에게만 집중하는 무한대의 감수성,
그 가슴 벅찬 기적을 공유하며 하루만 살 것처럼 과감하게 우주의 스파크를 수용하려는 태세랄까.
상대의 영적 에너지에 기꺼이 스며들어 소멸하고자 하는 음과 양의 순수 욕망은 갑남을녀에게 저주와도 같은 것.
오나미와 전상준이 평범하지 않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본인들은 다르다고 과대평가하지만
해탈하지 않은 이상 찰나가 유지되긴 힘든 법. 열정과 냉정이 서로에게 스며들면 이도 저도 아니게 미적지근해질 뿐.
그러면 비이성적이던 "열정과 냉정"은 물러나고 미지근한 이성이 활개를 치는 법.
결국 범속한 생존을 위한 출구 쪽으로 그렇게 수렴하게 되어 있다. 그들은 이를 어렴풋이 알면서
서로가 그 앎을 눈치 못 채게 조심하며 아니 망각하며 아주 짧은 초반에 승부를 거는지도 모르겠다.
교과서에 나열된 진부한 정의와 해석들 말고 영육으로 짜릿하게 체험하는 참사랑. 육욕에 항복하여 요절할 그것.
환상 혹은 망상으로 화려하게 만개하다 이별의 뒤안길에서 낙엽처럼 떨어져 버릴, 빠르게 변질되는 그것을 위하여..
깨알보다 작은 동질적 요소를 발견한 후 그 작음 속으로 미친 듯이 몰입하고 천착하여
공통의 보석을 어떻게든 캐내려는 모습으로. (그러나 결코 성공하지 못할 안타까운 모습..)
완전히 다른 양 사이드에서 "본인들이 엉성하게 조립한 사랑"을 저마다 가슴에 품고
하나됨을 향하여 돌진하는 모습으로. (그러기에 더욱 하나될 수 없는 안쓰러운 모습..)
열정은 냉정의 작위적 사랑을 연민하지만 찬양하며, 그 미완성이 완성되기를 북돋우고 기도한다.
냉정은 열정의 불안하고 위험한 사랑에 번민하지만 찬양하며, 불길로 뛰어드는 무분별을 가라앉히려 애씀과 동시에
그 원초적이고 순진무구한 작위를 격려한다.
의식적인 작위와 무의식적인 작위가, 충돌하듯 합일하고 합일하듯 분열하며
서로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무던히도 분투한다.
그토록 부족한 "사랑의 그림자"에 고무되어 끼리끼리 각자의 그것을 보듬어 주고 있다.
이러는 가운데 (나름대로 애욕이 세속을 벗어나 순정의 영역에서 잠시나마 뛰노는 가운데)
찰나의 순간 진실한 무엇이 이 둘의 마음에 닿은 듯 스치고 지나갔을 테지만
인간 군상에 휩쓸려 갈 뿐인 이들은 그것을 캐치하여 내면화하고 의지와 행동으로 구체화할
능력도 용기도 애당초 갖고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이 둘의 만남이 맨 처음 의도하던 바 그 불경한 불결,
솔직할 필요성을 폐기하고 서로에게 협조하며 순수한 사랑의 이야기를 공동 집필하기로 합의한 때로부터 줄곧
철저히 외면하고 있던 그 미니 원죄의식이
정작 이들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방치하고 황홀과 행복을 가공하여 미래를 장식해 봤자
점점 운명의 미로 속으로 끌려 들어가 미혹의 돌풍에 정신을 못 차릴 터인데,
어찌 명징한 상태를 갖추고 진리를 오롯이 취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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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4. 17
알 것 같다..
하나부터 끝까지..
그냥 느껴져..
네 말대로 모든 게 환상일지 몰라.
네가 보내준 음악파일에서 깜찍하게 튀어나온 싸한 기억.
오래전 휴대폰 너머로 나지막이 들려오던 CD음과
그것에 맞춰 정성껏 팝송을 불러 주던 너의 가느다란 목소리.
수십 킬로미터 전파를 따라 흐르던 소박한 감동.
잊고 있던 멜로디를 타고 불현듯 피어오르는 설렘의 정한.
내 따분한 일상 속의 소소한 반란, 이 작은 떨림..
이게 다 환상인지도 몰라...
사랑이란 어쩌면,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무엇일 거야. 사랑한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임에 틀림없지만..
사람이 사람에게 사랑을 주는 것. 이보다 어려운 것들이 세상엔 널려 있다지만 난 이게 제일 어려워.사랑은 생각만큼 달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얼마든 시련을 안겨다 줄 수 있는 게 사랑이지.
(너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가?)
남녀의 사랑을 두고 과연 위대한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사랑이란 것에 휘둘리는 "사랑 초심자"의 사랑을 두고 우리는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한때는 자산처럼 여겼던, 내 젊은 날의 연애사들..상대의 정신과 육체를 기어이 소유하려 하는 탐욕스러운 애착과
빼앗김을 용납 안 하는 고집불통 자의식이
한 데 어우러져 부글거리는, 광기의 사랑이었다.
보고프면 성에 찰 때까지 봐야 하는, 떼쓰는 어린애 같은 사랑이었다.
행여 다투고 분한 마음이 일면 속으로 독을 품어 앙갚음하는, 표독스러운 사랑이었다.어리석어 서글프기까지 한 사랑은 나에게 안온한 잠을 보장하지 않았고,
이러한 사랑의 당연한 결과로서
온갖 근심과 불안들은 얼음이 되어 때로는 불이 되어 집요하게 나를 괴롭혔다.영혼이 멍들고 몸이 허물어져도 모르는 (오직 나이 드는 것만이 두려운) 맹추 같은 사랑이었다.
가버린 임의 자취를 지우기가 고통스러워
박제된 슬픔을 간직한 채 살아야 하는, 융통성 없는 사랑이었다.
"상호 간 합의" 없는 이별은 절대 인정 못하고 작별의 주도권을 결코 양보 안 하는,
독선적이고 편견에 가득 찬 사랑이었다.
(그래서, "잠적한 임"의 독단적 이별은 집행이 유예되고
완결되지 않은 석별은 맹목적인 그리움으로 남는다. 꿈에서도 재회를 갈구하는 애절한 회한이 된다.
다시 만나 머리를 맞대고 "결별의 명분"을 정립하기 전까지는..)사랑!
사랑할 줄 모르는 자격 미달자가 사랑하는 척을 하였다.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랑은 아무것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으며, 아무도 미워해선 안 되는 것이 사랑이었다.
성(性)이란, 경우에 따라 괴로운 것이 되기도 한다. 육체적 쾌락의 부작용은 정신적 고통이다.
육체의 탐닉에만 집착하면 궁극에는 지독한 허무를 맛보게 될 뿐이다. (진부한 논리인가?)
그러나 육체의 쾌락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지. 사랑의 필요악적 수단으로 평가절하하고 싶지도 않다.
섹스의 오용과 남용에만 주의한다면,
남녀 간 사랑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첩경으로서 육욕은 명예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전제로 한 정당한 쾌락이라면 과감하게 정욕을 발산해도 무방하리라.
사랑하는 이의 육체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쌍방이 최선을 다 하는 (본인들의 사랑에 책임을 지는)아름다운 연인의 모습일 테니까.
뒤늦게 사랑을 배운다.
하늘에서 땅까지
창조주 절대자에서 하찮은 미물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아무것도 미워하지 말아야 함을 배운다.
내가 환상이고 세상도 환상이면, "나와 세상은 하나"라는 의미가 된다.
내가 나를 미워하면 세상이 미워지는, 이치이리라.
세상을 미워함이 곧, 나 자신을 미워함이리라.
같은 맥락에서,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으리.세상을 사랑할 줄 알아야 자기 자신도 사랑할 수 있으리.
고로, 남녀 간의 사랑 또한 가벼운 감정 유희를 초월하여 우주로 확장될 수 있다. 아니 자연스레 그리 된다.
사랑이 얼마나 중요하며 소중한 것인지 저절로 입증되는 순간이다.
정신적인 사랑이니, 육체적인 사랑이니 하는 것. 이는 우주를 오해한 인간이 편의를 위해 구분한 개념일 뿐.
따라서 나뉜 이것들도 환상에 불과하다.
세상이라는, 우주라는 현상은
"오로지 하나인 무엇"이 무수한 환상들로 무한하게 나투는, 과정이자 결과.
그러므로, 정신과 육체가 둘이 아니고 "너"와 "나"도 실은 둘이 아니리라.
"온전히 하나인 무엇"이 사랑의 본체라면 우리가 곧 사랑 자체란 얘긴데, 그럼
우리가 오랫동안 밖에서 구하려 했던 사랑은..?
자체로 충만한 사랑이 사랑을 찾아 헤맬 리 없지.
불완전한 사랑이니까, 부족한 사랑이니까, 완벽한 사랑 그 미지의 차원을 열망하는 것이리라.
"불완전한 사랑"은 환상이며, 환상이 꿈꾸는 사랑도 환상이므로
우리의 소유격 사랑이란 건 실존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것.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우리의 상대성 사랑이란 고작 길고 짧음의 사랑이었고, 크고 작음의 사랑이었다.
이미지의 나열일 따름이었다.
비교 우위를 점하려는 환상들의 투쟁일 따름이었다.
사랑하겠다는 의지가 잠잠해져야 환상을 재울 수 있다.
우리라는 환상이 잠을 자야 우리 속의 사랑이 일어난다.
그래야, 욕망과 의지 이전의 "무엇"이 비로소 사랑을 지휘하게 된다.
이것은, 나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영혼의 저편에 있는) "궁극의 실체"가 조화를 부려야 가능하다.
환상 속의 우리가 은밀하게 그러나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을 위대한 사랑은
이처럼 우리를 죽여야 (환상이 깨어져야) 이루어진다.
사랑을 포기해야 사랑이 이루어지는 논리이며, 우리를 죽이러 오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인 것이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랑을 난 늦게나마 배우려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가!
너무 일찍 알아 버린 사랑 그 몹쓸 환상에 중독된 것을 깊이깊이 참회한다.
너무 늦게 깨달은 (깨달았다 착각하는) 이런 사랑..
너무도 인간적인 (너무도 환상적인) "나의 한계" 때문에 이 역시 환상으로 판명될지라도
일단 시도는 하련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시작이 중요하지 않은가.
이제부터 사랑을 배우련다. "사랑"을!
사랑은 소유하지 않는 것임을 일깨워 준 너에게 감사한다.모든 고통은 집착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일깨워 준 너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나를 홀로 두고 사라져 버린 너에게..
'05. 5. 19
내가 외롭다 할 때 정말 그런 줄 알아주면 난 그걸로 됐었어. 누나..내가 절망적이다 할 때 정말 그런 줄 알아만 주면 난 그걸로 됐었다고.
세상의 잣대로 엄연히, 난 인생 실패자야.
아니라는 궤변을 늘어놓거나 구태여 항변하고 싶지 않아. 자존감 세우고픈 의욕도 없고..
나 혼자 얼마나 쓸쓸하고 두려웠을지 누나가 조금만 알아 줬어도....초탈한 듯 태연한 척하다가도
지극히 인간적으로 불안을 하소연하고 신세를 푸념할 때, 나약한 인간의 본성이 드러날 때,
남자에 대한 실망과 환멸은 잠시 접어 놓고 그냥 말로라도 다독여 주었다면 난 그것으로 족하였을 텐데.
그러나 고마웠어..
가망 없이 이대로 쭉 살다가 이대로 허무하게 갈지라도,
지독한 어리석음이 참으로 어이없는 바보짓을 할지라도,
괴팍한 성정이 그답잖게 세인의 비웃음과 손가락질은 못 견뎌 고립무원의 도피를 끊임없이 추구할지라도,
그리하여 그나마 부족했던 사회성과 인간미가 고갈되고 무기력에 찌들어 기이한 괴물로 변할지라도,
그렇게 나잇값 못하고 남자 노릇 못하다 세상으로부터 영원히 잊힐지라도,
누난 변함없이 내 편이 되어 준다 해서 고마웠어.
내 유일한 인맥이 되어 준 누나라서 고마웠어. 나의 껍데기뿐인 체면을 세워 줘서 고마웠어.
(이제는 그마저도 필요 없고 다 부질없는 것들이지만..)
난 누나에게 못 해주는 걸 누난 기꺼이 내게 해 줄 거란, 믿음을 줘서 고마웠어.
누나니까 그게 가능할지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줘서 고마웠어.
"누나가 있음"으로 해서 생기는, 그 믿음 그 희망이면 되었어. (그것들이 가져다 줄 성과는 바라지도 않았어.)
여기로 오지 않아도
그냥 거기에서 나를 의미하고, 거기에서 나를 보듬고, 거기에서 나를 구원하는 일관성이면 돼.현실은 필요 없어. "내가 손짓할 때 누나가 다가오는" 꿈이면 돼. (실제로 다가오지 않아도 서운하지 않아.)
거기 멀리 있어도 괜찮아. "나를 잊지 않는 누군가"이면 돼. 그것이 곧 내게는 "누나의 다가옴"이니까.
내가 손짓하지 않아도, 누나가 나를 찾지 못해도,
나를 향해 항상 이어져 있는 "누나의 살가운 상념"이면 난 그걸로 충분해.
날 그리워하고, 날 기억하고, 날 생각하고, 날 염려하고, 날 배려하는 누나가 바로 나의 숨이야.
내 호흡이 곧, 누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이야.
오지 않아도 거기 멀리서 내 코에 후욱후욱 숨을 불어 넣는 존재가 누나라고!
그런데 이렇게 누나가 날 찾아낸 마당에 조금 더 욕심을 내 봐도 될까?거기 먼 곳에 머물며 마치 푸근한 와이프처럼 "애정에 굶주린 불쌍한 영혼"에게 사랑의 향기가 되어 준다면,
그 은은한 희생이 무척 고마울 거야.
거기 먼 곳에 머물며 "결혼이 불가능한 남자"의 아내가 흔쾌히 되어 준다면, 그 활달한 포용이 고마울 거야.
거기 먼 곳에 머물면서도 "죽고 못 사는 부부애"를 애틋하게 연기해 줄 수 있겠어?나 또한 즐거운 무명 배우가 되어 누나가 원하는 (누나를 위한) 연기를 하고 싶어.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렇게 멀리 떨어진 거기 그 자리에서 때로는 조강지처같이 때로는 첩같이"무능한 사내의 가당치도 않은 로망"을 원격으로 실현해 준다면, 구미호 같은 깜찍한 둔갑술에 난 몹시 감동할 텐데.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누나한테 다가갈 수 없음에 내 누더기 양심은 죄스러운 욕정을 거세한 지 오래야.그리고 "내가 버린 한 여인"에게 감히 순애를 바치려 해.
무책임한 플라토닉 러브 뒤에 숨은 이 뻔뻔한 가짜 남편을 군소리 안 하고 마음으로 안아 줄 수 있겠어?
우리 연애 초기의 사무치던 정염은 고이 보내드리고누나의 허술해서 좋았던 "관념 놀이", 투박한 사변에 다시금 코드를 맞춰 봐도 될까? 누나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관대한 박애가 활성화되도록..
다시 활활 타오르지 않아도 좋으니 차분하게 용기와 만남을 모색하고 싶어.
달뜬 두근거림을 더는 피하지 않고, 무모한 사랑의 대가를 미리 계산하지 않고 그저 가까이에서,
누나와 나 사이 견고하게 가로막은 지긋지긋한 공포를 부수고 싶어. 누나가 허락해 준다면 말이야.
그러고 나면 우리의 관계도 모호함을 탈피하게 되지 않을까?
이쯤에서 누나는 묻겠지. 자신 있냐고.
내 우유부단과 겁쟁이 기질에 델 만큼 덴 누나로선 당연히 할 수 있는 질문 맞아.
결론부터 말하면 잘 모르겠어. 속 시원한 답변이 아니어서 우선 미안해.
그런데 같은 질문을 누나한테 해도 돼? 누난 어때? 자신 있어?
내가 누나 열정에 한참 못 미치는 것 같으니, 누난 나보다 더 사랑에 근접한 상대적 우월감에서
날 비판할 수 있는 입장을 언제나 선점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만일 누나보다 훨씬 사랑에 열정적이고 앞뒤 재지 않는 소위 "사랑의 종결자"가 누나 손을 잡아 끈다면
누나는 머뭇거리지 않을 자신 있어?
여자한테 책임을 전가하는 비겁한 논리라고 비난받을 각오하에 물어본 거야.
우리는 이전보다 솔직해질 필요가 있어. 앞으로 더 진실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라도.
남과 여에 대한 각자의 편견을 되도록 버리고 근본적인 견지에서, 도덕과 양심의 볼모가 되기 쉬운 인간의 약점이란 측면을
통찰해야 해. 우리가 두려워하는 도덕과 양심이 과연 절대적 가치이자 잣대인지부터 고찰하고 대략으로나마 결론지어야
우린 행동하는 단계로 진입할 수 있어. 철학자들도 못하는 걸 우리가 어떻게 하냐고?
이 판국에 학문을 하자는 게 아니야. 목마른 자가 우물을 찾듯이, 우리의 사랑이 절실하다면 각자의 내면에 대고 물어보면 돼.
악법도 법이듯 현재 우리를 지배하는 도덕과 양심을 도저히 거스를 수 없다면,
시대의 도덕이 왜곡되고 양심이 오염되었다 외치며 우리의 얄궂은 사랑을 강단 있게 밀고 나갈 최소한의 기개가 없다면,
세상의 지탄을 초극하고 법적 사회적 응징을 의연하게 감내할 자신이 없다면, 우린 마땅히 헤어져야 해.
이별이 죽을 만큼 힘들다면 차선책으로 "관계의 순화"를 도모하던가.
우리 좋자고 용기 아닌 만용을 주위에 흉기처럼 휘두를 순 없잖아?
우린 어쩌면 스스로를 중대한 갈림길로 내몰고 있는지 몰라.
불장난 같은 짓궂은 욕망이 우리가 추구하는 사랑을 잠식하도록 내버려 둘 순 없어. 시초가 어떠했든 우린 이 시점에서
관계를 순한 맛으로 대폭 조정해야 해. 우리의 상호 끌림이 고차원으로부터 정당성을 부여받으려면
우린 뜨거운 정열을 우정의 수준으로까지 식혀야 해. 그것이 재미없고 밋밋하고 심심한 또 다른 권태기로 느껴진다면
이는 순전히 우리의 마음이 비틀린 탓이겠지.
세월이 흐르면 사그라질 갈망인데 지금으로선 이를 여여하게 바라보고 다스린다는 게 참으로 힘들구나..
누나, 내 마음은 이러한데 누난 이러는 나를 이해할 수 있겠어? 내가 여전히 비겁한 남자로 보여?
만사 제치고 달려가 안고 싶지만 그럴수록 멀리 떨어져야 하는 이 모순된 심정,
지금은 누구보다 누나가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행간에서 느껴져. 씁쓸하지만 한편으론 다행이야.
까놓고 말할게. 우리의 사랑이란 건 첨부터 불순했잖아. 이제 와 누가 불순함의 원인을 제공했는지 따지는 것도
쓸모없는 일이고.
이것이 우리 사랑의 태생적 한계이자 족쇄라는 것.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빨려들 수밖에 없는, 늪이라는 것.
아직은 절절함이 남아 있지만, 그래서 이 절절한 감정을 미화하고픈 유혹에 수시로 시달리지만,
누나와 내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리의 한계를 직시하기 시작했으므로 냉각의 가속화는 예정된 것이나 마찬가지.
우리의 이 알알한 체험을 과대 포장하지는 말자.
이별의 연착륙을 위해 가늘고 긴 결별의 과정을 억지로 선택하였다고,
그러지 않으면 - 벌써 한번 겪었듯이 - 애끊는 비통을 견디기가 너무 고통스럽기에 그리 택한 거라고
착각하지도 말자.
인정하긴 싫어도, 편지의 내용들이 이리 장황해진다는 건 누나나 나나 이미 냉철한 냉각기로 서서히 접어들고 있다는 뜻.
(적어도 우리 사이에선) 앞으로 또 난감한 헤어짐이 찾아온다 해도 저번과 같은 뼈저린 아픔을 겪을 일은 없을 거야.
그러므로 굳이 연착륙을 의도적으로 시도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
누나와 나, 한가한 관념과 추상 속을 여유롭게 자맥질하다 보면 현실의 언덕에 어느덧 발이 닿아 있을 테고
각자의 세계는 아무 일 없었던 양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자신들의 골칫덩이들을 너그러이 품어 주겠지.
누나가 세상 모든 것을 환상으로 치부해도, 우리의 시간은 엄정하게 흐르고 있어.
누나의 역사 그리고 나의 역사가 영원의 일부로서 시간 속에 녹아들고 있어.
이러한 흐름이 환상 같은 현실이든 현실 같은 환상이든 난 아무래도 좋아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사랑 때문에 존재하는 거라면.
삼라만상이 사랑 속에 안주하는데, 무지한 일상조차 사랑으로 작동되는데, 나는 대체 무엇이 잘나서
사랑 밖으로 툭 비어져 나와, 멋대로 사랑을 재단하려 하는가. 매사에 이리 복잡하니
모두가 물 흐르듯 향유하는 사랑을 나만 길들이지 못해 어색해하고, 어깃장 놓듯이 사랑과 멀어지려는 게지.
멀쩡하게 사랑하기가 쉽지 않으면 먼저 멀쩡해지려 노력을 하든가, 왜 유유상종의 기형을 고집하여
히스테리컬한 광기에까지 사랑을 갖다 붙이고, 살얼음을 밟는 불안정한 "욕구 충족"에 매달려
"이게 나의 사랑이다"라고 정당화하는 것인지..
이처럼 푸념하면서 우린 늙어가고 있구나! 누나도 인정하지?
안정되게 뿌리내리지 못한 (존재를 의심 받는) 사랑이라서 불안과 두려움 속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던 모양이야.
이제 우리, 속 좁은 애착 훌훌 털고 애증의 고뇌로부터 해방되자. 그리하여 편안해지자. 치정의 무게를 그만 내려놓고
편안하게 사유하자. (누난 그렇게 마음먹은 지 오래라고? 그럼 나만 노력하면 되겠네 그치?)
하여간 편하고 보자. 마음 편히 "우리가 만든 사랑"에서 물러나야 비로소, "우리를 만든 사랑"이 늘 함께하여 왔음을
우린 깨달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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