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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혼종Letters to D.J. (지수 외전)/SUPERMAN 2022. 10. 18. 14:10
Another stories of Jisoos in parallel universes : 1. Superman (원본) (16)
하아, 이 아저씬 또 뭐지!? 이러면 정말 곤란한데..
아무리 나의 상념계라지만 한 공간에 이처럼 모여 있는 건 또 뭐람.
해괴한 체험의 연속이 내 만성 불안과 우울감을 잠시나마 덮어주었는데.
더 큰 불안과 거대한 두려움의 쓰나미는 내 황폐해진 정신의 윤활유가 되어주었는데.
숨죽이고 있던 아픈 기억이 이 아저씨 때문에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어.
휴면 상태에 있던 죄의식의 폭풍이 기다렸다는 듯 다시 몰아치기 시작했어.
그분의 남편이었던 남자.
법정의 맨 앞자리에서 자주 마주쳐야 했던 사람.
가끔은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앉아 있을 때도 있던 젊은 아버지.
분노의 표정이 아닌 공허한 시선으로 체념한 듯 판사를 응시하던 그 사람.
기억하기 싫지만 기억에 남아 있는 얼굴이 왜 여기서 보이는 걸까. 원래 그러했던 인간인 것처럼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어째서 태연하게 저런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일까. 악몽에나 가끔 등장하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저 남자가 여기 있다는 건 이곳이 꿈계라는 의미인가. 아니야. 평행 지구의 대기권 아래는 현실의 역사가 도도하게 흐르는 3차원 사건계라 하지 않았던가.
운송자들의 노림수가 바로 이런 거였나.
저 사람에겐 도저히 접속하지 못하겠다. 그랬다가는 내 정신이 무너져내릴 것 같아.
모습만 같고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다른 인물일 확률이 높지만, 만약 우리 세상의 잔상이 미세하게라도 남아 있는 영혼이라면 나는 그의 데이터를 대면할 자신이 없어.
그냥 이대로 정연이의 행동이나 예의주시해야겠어.
아저씨 내가 그렇게 좋아?
어쭈 왜 갑자기 호의적이 되셨나? 내가 너무 적극적이라 좋아하고 싶어졌니? 그렇다면 나야 땡큐지.
무슨 꿍꿍이인지 몰라도 그딴 거 나한텐 안 통해. 허튼 궁리는 집어치우고 마음을 열어보라고.
나 나쁜 놈 아니야. 멋지고 잘 생긴 남자니까 두려움 따윈 개나 줘버리고 오늘 우리 화끈하게 즐겨 보자구.
보아하니 일행이라고는 아까 그 멍청한 녀석 하나인 것 같은데 설마 애인은 아니겠지? 저런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는 버리고 나랑 오늘 찐한 데이트 오케이?
저 봐, 여기까지 뚫고 들어올 힘도 없잖아. 제깟 놈이 또 이리로 오면 어쩔 건데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것이..
그리고 너, 이거 처음 보는 것도 아니지? 몇 번은 더 와 봤을 텐데 그때마다 거추장스럽게 저딴 놈들 달고 다닌 거야? 표 살 돈 없으면 이제 이 아저씨한테 얘기해. 이제부터 내가 네 찐 애인이니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다고 흐흐.
아니다, 넌 분명 처음 왔을 거야. 저거 달고 온 게 그 증거고 요렇게 앙큼 떠는 것도 증거지. 이 영화의 진가를 모르는 것들이 꼭 달고 오더라고. 아편 같은 영화 감상에 방해되는 것도 모르고.
이 꿀같은 영화에 대해 자자한 소문은 익히 들었을 텐데 여태껏 뭐 하느라 끝물 다 돼서 이런 삼류 극장엘 왔어? 덕분에 나야 횡재했지만. 흐흐..
말이 연소자 관람가 가족 영화지, 처음엔 온 가족이 손잡고 왔다가 나중엔 뿔뿔이 개인플레이로 오게 되는 게 이 영화야. 심지어 예닐곱 살 꼬마도 혼자 온다니까. 집중하고 싶어서 말이지. 내 말 못 믿겠으면 둘러보라구 친구나 가족 단위가 많은가 싱글족들이 많은가. 어차피 오늘 저 스크린을 쳐다본 이상 너도 앞으로 최소 두세 번은 혼자 온다에 - 네가 지금 조물락거리는 - 내 붕알 두 짝 건다.
봐봐, 일 초도 안 놓치려고 눈알이 벌게져서 스크린이 뚫어져라 바라보는 저들을.
즈그들끼리 조잘대고, 뭐 처먹겠다고 소란 떠는 것들은, 열이면 열 처음 보러 온 것들이지.
그런데 저거 오래 못 가. 결국엔 영화에 갇혀서 옴짝달싹 못 하게 되지. 담뱃재가 바지에 떨어지던, 씹던 오징어가 바닥에 밟히던, 관심은 오직 저 빌어먹을 영화!
이 영화에 일단 맛 들이면 아가씨들 혼자 오는 건 일도 아니라니까. 특히 요즘 같은 여름이면 대충 헐벗게 입고 오는 년들 차고 넘치지. 흐흐, 뒤에서 뭔짓거릴 해도 저거에만 정신 팔려 헤벌레하고 있으니, 나 같은 놈들이 극장에 출근 도장 찍는 것이고.
영화가 곧 막을 내린다 해서 우린 아쉬워할 필요도 없어. 앞으로 슈퍼맨 2탄, 3탄 줄줄이 개봉 대기하고 있으니까.
그래요? 그런 거 극비 사항 아니었나요? 아저씨가 어떻게 알고 있죠?
후후, 다 아는 수가 있어요.
2탄은 개봉일도 확정이고 3탄은 비밀리에 촬영 중이란다. 나 이런 사람이야 얕봐다간 큰일 나!
와아 대단한 아저씨구나. 든든한 외계인 빽이라도 있으신가 봐요.
게다가 잘생기기까지? 나 잘생긴 사람 좋은데..
얼굴 보면서 하고 싶다. 아앙..
이 자리에서 하자고? 히야아, 요런 음탕한 년을 봤나.
낄낄 얌전한 괭이가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더니 내 손가락 놀림에 아주 뻑이 가셨군. 듣던 중 반가운 소리.
통로는 콩나물시루고 인간들은 영화에 홀려 있으니, 못 할 것도 없지.
나 그럼 뒤돈다? 손 좀 빼줘.
정연이 이거 보통내기가 아니었네. 무서워죽겠다던 애는 어디 갔나?
이 아저씬 헤벌쭉해져서 금세 무장 해제 모드가 된 것 같고. 여기까진 일이 척척 풀리고 있긴 한데 그다음은 어쩌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때맞춰 온다는 보장이라도 있나?
아 그렇군. 지수가 지금 인파를 헤치고 다가오는 중이니까 그와 눈이 마주칠 수 있겠네. 고막이 휘청거릴 만큼 영화 소음이 큰데도 아까 지수가 부르는 소릴 용케 듣고 대답까지 했었지 참.
이 인간도 좀 전에 지수가 정연을 찾느라 잠깐 소란 피우는 걸 목격한 모양인데 무슨 배짱으로 저러는지..
마치 장 내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편이라고, 단단히 착각하는 것 같다. (아니 착각이라고 단정 지을 순 없다. 이 필름의 요사스러운 파워를 나조차 실감하고 있으니까..)
그녀의 예측 대로 정말 못 말리는 열성 혼혈종이라 이성을 잃고 막가파 식 폭주를 하는 것일까.
열성이라도 명색이 혼종이니, 외계인이 심어 놓은 (일반인보다는 우월한) 모종의 소소한 능력만 믿고 저렇게 까부는 것일까.
안티 인디고와는 다르게 범죄에 특화된 추잡한 능력이 일찌감치 발현되고 있어서 지수 정도의 보통 인간들은 가뿐히 무시할 수 있다 이건가.
정욕에 들떠 어떻게 한 번 해 보려고 금방 탄로날 뻥카를 날리는 건 줄 알았는데 의외네. 진짜로 멀쩡하게 생긴 아저씨였어!
삼류 극장에 숨어서 아녀자들이나 추행할 더러운 찌질이로는 안 보이는데 왜 이런 짓을..
역시 사람은 외모로만 판단해선 안 되겠구나.
연식은 얼추 삼 십대 초반?
나이만 보면, 대 실험 시대 에일리언의 씨앗으로 강제 잉태된 베이비 부머인 듯 하군. 혼종이라는 심증이 강하게 들긴 해, 하는 짓거리가 부작용자의 극단적 발광이라기엔 조금 약한 감이 들어도.
너무 직접적이라 위험 부담이 있지만 본인에게 물어보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겠어.
지도부의 혼혈종 공식 인정 후 커밍 아웃이 유행처럼 전국을 휩쓸었으니, 이 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인지하지 못할 확률은 아주 적을 거야.
이게 다 케랄터인의 민낯을 까발린다며 동분서주한 청령 민병대 덕이긴 하지. 콧대 높은 외계인 엘리트들이 스스로 실토하고 무릎을 꿇은 것도 그들 때문이고, 그들이 은하 연합의 혼종 판별 시스템을 도입하여 배포한 것도 연합과의 긴밀한 유대가 있어 가능하였지.
아으 아저.. 씨! 아무리 관객들 신경 쓸 필요는 없다 하셨지만 이건 좀..
적당히 살살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무튼 여긴 침실은 아니잖아요. 저도 아저씨가 맘에 드니까 급하게 서두르진 말자고요.
어허. 넌 그냥 내가 하는 대로 따라오기만 하면 돼. 어딜 감히 훈수야!?
아저씨, 저 좋다면서 왜 이리 퉁명스러우세요? 잘 생기신 얼굴과 어울리지 않아요. 제발 젠틀하게 다뤄주세요. 아저씨 범죄자 아니잖아요.
뭐 범죄자? 이제야 속에 있던 본심이 튀어나오는군. 그런 말 하면 듣는 범죄자 기분 나쁘지. 조심하라고 크큭.
농담도 잘 하셔. 이렇게 제 말도 잘 들어주시는데 범죄자일 리 없잖아요.
소문에 듣기로는 혼혈종 남성들이 그렇게 훈남에다 여자들한테 잘 해줘서 인기가 많다던데..
저, 혼종 남자 만나 보는 게 꿈이었거든요. 아저씨도 혼종이었음 좋겠다. 혹시 맞으세요?
이 아가씨 눈썰미가 있군 단번에 알아 보다니. 외나무다리에서 혼종 남자를 만나니 아랫도리가 벌렁벌렁한가?
오 역시 그랬구나! 이 영화에 대해서 깊이 알고 계실 때부터 뭔가 일반 사람과는 다른 포스가 느껴졌어요.
후훗, 뭘 그 정도를 가지고..
이거 이거 오랜만에 연애다운 연애를 해 보겠어. 솔직히 요 근래 내가 손가락 좀 쑤셔 본 여자들 중에는 네가 제일 맘에 든다. 외모도 내 스타일이고.
이 허접한 곳에서 짐짝처럼 떠밀리며 대충 범하기엔 넌 좀 아까운 구석이 있어.
어때, 이 좆같은 영화는 집어치우고 나랑 나갈까? 저 새끼 바람 맞추는 건 일도 아니잖아 안 그래?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휴우 고비는 넘겼다.
이놈한테 납치당하기 전에 빨리 와야 할 텐데..
이것들은 뭐 하느라 이처럼 꾸물거리는 거야.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었어. 안티 인디고의 저력을 보여 준 것인가.
그건 그렇고, 이 아저씨는 도무지..
내가 할 말이 없네. 지가 당하는 줄도 모르고 희희낙락하는 꼬락서니라니 쯔쯧.
아니지. 평행 우주의 그가 아무리 형편없어도 난 그를 비꼬거나 멸시할 자격이 없어 백 번 천 번 용서를 빌어도 부족할 판에.
불쌍한 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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