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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 구원의 손길
    상준 이야기/이상한 사랑 2023. 8. 25. 09:13

     

     

     

     

     

     

     

     

     

     

     

     

     

     

     


    유흥주점 안은  이미 초상집 같은 분위기였다.

     


    불 같은 성격의 업주는 애들 교육 똑바로 못 시켰다고 얼굴 마담에게 고함을 지르며 일차로 분풀이를 하였고

    이내 대기실로 들어와, 돈을 세고 있는 이 양으로부터 우악스럽게 돈봉투를 가로챘다.

     

     

     


    이런 뻔뻔한 년들을 봤나! 너희들 때문에 오늘 손해가 얼만 줄이나 알아?!

     

     

     


    봉투를 머리 위로 흔들며 사장은 말을 잇는다.

     

     

     


    이것까지 합쳐도 오늘 손해 본 술값엔 턱도 없어! 나머진 너네 둘 급여에서 깔 테니깐 그런 줄 알아!

     

     


    에이, 치사해서 정말.. 그만 두던가 해야지.
    지금 당장 경찰서 가서 그 새끼 폭행죄로 처넣을까 부다, 씨발..

     

     


    이년이 그래도 정신 못 차리고..

    오 양 니가 우리한테 진 빚이 얼만데 누구 맘대로 그만둬?!
    오늘 술값이 문젠 줄 알아? 좌우지간 오늘 일로 우리 가게 일등 단골 발걸음 끊어지게만 해 봐.
    아주 반 죽여 놓을 테니깐!!

     

     


    왜 우리만 갖고 난리예요!? 그 진상이 먼저 밟았는데..

     

     


    그냥 말로 넘어갈까 했더니..

    이거 안 되겠구만.

     

     

     


    언제 들어왔는지 그의 뒤편에 서 있는 (한 어깨 하는) 깍두기 지배인에게 업주가 눈짓을 보낸다.

     

     

     


    저희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 테니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아직 입가에 피도 마르지 않은 민아가 일촉즉발을 감지하고 사장의 발 아래 엎드려 다리를 잡고 사정하였다.
    주먹 쥔 손가락에서 우두둑 소리를 내며 앞으로 한 발짝 나서는 지배인을  손짓으로 제지한 사장이
    자세를 낮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한다.

     

     

     


    학생이라 머리는 잘 돌아가는군. 암, 그래야지.
    한 번 더 이런 일이 있을 시엔 단단히 혼날 줄 알아! 학생!?

    마담한테 교육 잘 받고 다음번엔 같은 실수 하지 않도록! 고객님께서 감사하게도 네게 기회를 또 주신다 하니 말이야.

     

     

     

    네에..

     

     

     


    저 애 얼굴 망가진 거는 안 보이세요? 최소한 치료비는 줘야 될 거 아녜요?!

     

     

     


    고분고분한 민아 덕에 어느 정도 화가 누그러진 사장은, 이 양의 앙알거림을 더 듣고 있기가 귀찮았는지

    봉투에서 수표 몇 장을 꺼내 민아의 가슴 사이로 찔러 넣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풀 죽은 마담이 들어와 민아를 표독스럽게 꼬나보며 말한다.

     

     

     


    얘, 전화 왔어.

     

     


    누구한테서.. 요..?

     

     


    상준인가 뭔가 하는 남자야. 또 뭔 일 저지른 건 아니지?

     

     

     


    상준이란 말에 얼굴이 다소 밝아진 그녀는, 대형 거울 앞에 놓여 있는 수화기를 재빨리 집어 들며 대꾸하였다.

     

     

     


    아니에요, 제 남자 친군 걸요..

     

     

     

     

    이런 상황에서 천연덕스럽게 "남자 친구"란 단어를 입에 올릴 줄이야..

    본인이 뱉어 내고도 스스로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마담의 터무니없는 속단에 항거하기 위하여

    제 딴엔 임기응변으로 생각해 낸 것이 왜 하필 로맨스 프레임이었을까.

    단지 난처한 순간을 모면하기 위함만은 아닌 게, 전혀 예상치 못 한 뜻밖의 남자가 연락을 해왔는데도

    놀랍고 황당하다라기보단 마치 기다렸던 전화가 온 것처럼 자연스러운 반응이 유발되어서였다.

    한 발 더 나아가, 그의 이름이 호명되었을 때

    절망적인 나락의 현장을 뚫고 다가와 "만신창이가 된 자신"에게 유일한 위로를 건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면, 이것은

    젊디 젊은 이 여인의 아직은 착하고 때 묻지 않은 순정이 조심스럽게나마 발동하였다는 증거이리라

    표면적으로는 엉뚱하게 보일지라도.

    "심층 심리의 오묘하고 복잡한 내막"이 살포시 풀어놓은 필연인 양..

     

     

     

     


    당돌한 년 좀 봐, 벌써부터 손님하고 사귀는 거니? 일도 제대로 못 하는 생초짜가 어디서 그런 건 또 배워 갖고..

     

     

     


    뭐 어때?  단골손님 확보되고 좋은 거지.


    일하는 데 지장 없는 범위 내에서 손님들하고도 잘 어울리고 공사도 치고 하는 게 맞긴 한데..

    그걸 잘 아는 애가 오늘 같은 사고를 쳐?

     

    하여간 초보고 나발이고 뒷구멍으로 가게에 손실이나 끼치는 연애질 하다가 나한테 걸리면

    그땐 국물도 없을뿐더러 눈물이 쏙 빠지게 혼쭐나는 거다!?

     

     

     


    "신경이 날카로워져 민아에게 화풀이하려는" 마담을 말리는 척하면서 오히려 한 술 더 뜬 으름장을 드세게 던진 업주가

    오늘은 이 정도만 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지배인과 함께 순순히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서로 짜기라도 한 듯 여기저기서 동시에 안도의 한숨들이 튀어나왔다.

     

     

     

     

     


    수화기를 귀에 대자마자, 무척 떨리는 상준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민아니? 그냥 듣기만 해. 여기 양명 사거리 경찰서야. 내가 좀 곤란한 지경에 빠졌거든..


    긴 얘기는 만나서 하기로 하고, 지금 좀 와 줄래? 너 일하는 중이라는 건 알지만 사정이 좀 급하게 돼서 그래.

    그리구, 내 카드 가지고 있지?   
    오는 길에 근처 현금인출기 들러서 남은 잔액 몽땅 빼 오고 현금 서비스도 한도까지 다 찾아 줘. 부탁한다!

     

     

     


    그는 자기 할 말만 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대체 무슨 일이지..? 여기와는 비교도 안 될 큰일이 일어난 걸까..'

     

     


    불길한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진 민아는 주위의 눈치도 보지 않고 서둘러 평상복으로 갈아입는다.

     

     

     


    얘 좀 봐? 아직 근무 시간인데 어딜 가려는 거야??

     

     


    저어.. 마담 언니, 두 시간만 나갔다 오면 안 될까요? 급한 일이 생겨서..

     

     

     


    호출을 받고 룸으로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던 이 양이 그녀를 위해 나섰다.

     

     

     


    그래라. 너 오늘 그 꼴로는 어차피 손님 받기 글렀으니까, 병원이나 가서 치료받고 일찍 들어가 푹 쉬도록 해.

     

    그래도 되죠?  왕언니?

     

     


    야! 니가 마담이니? 어딜 마음대로..

     

     

     


    평소 마담 앞에서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던 숫기 없는 민아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그녀의 손을 부여잡고 재차 부탁하였다.

     

     

     


    더도 말고 두 시간만이라도 시간을 주시면 고맙겠어요, 마담 언니. 갔다 와서 두 배로 열심히 일할게요.

     

     

     


    그녀의 부어오른 입 언저리를 보며 마음이 약해진 마담이 못 이기는 척 허락을 한다.

     

     

     


    이 양 말이 맞겠네. 그 꼴로 룸에 들어갔다간 손님들 술맛만 떨어뜨리지.
    앗사리 이 길로 퇴근하도록 해. 몸조리 잘해서 내일 근무 지장 없도록 하고!

     

     


    고맙습니다, 언니. 정말 고맙습니다..

     

     

     


    민아는 몇 번이나 허리를 굽혀 감사의 뜻을 표한 다음

    조급하기 그지없는 마음을 발걸음에 실었다. 그에게서 위로받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험난한 하루였지만,

    어쩌면 그를 먼저 위로해야 할 혼란스러운 상황이 그녀를 절실히 기다리는 곳으로

    그녀의 낯선 그리움은 기껍게 달려가고 있었다.

     


     

     

     

     

     
     
     
     

     

     

     

     

     

    경찰서 문을 밀며 막 들어서려는 민아를 거의 충돌하듯 제끼고 웬 건장한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그와 스치는 순간 - 그녀에겐 민감한 - 술 냄새가 콧속으로 강렬하게 파고들었다.


    가무잡잡한 피부에다 눈 옆엔 꿰맨 흉터까지 있는 (언뜻 봐도 험상궂은 인상의) 고수머리 남자가

    자기 와이프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며, 걸을수록 증폭되는 듯한 분노에 비례하여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는데, 작위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꽤 넓은 경찰서 사무실 공간을 순식간에 쓰나미처럼 압도하고도 남았다.

     

     

     


    어떤 놈이야?! 어떤 새끼가 남의 귀한 마누라 엉덩이에다 자지를 문질렀어?!!

     

     

     


    문 옆 책상에 앉아 있던 경관이 부리나케 달려와 그를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는다.

     

    떡대에 있어서는 그자에 결코 뒤지지 않는 삼십 대 초중반쯤의 중고참 형사가

    짜증이 역력히 묻어나는 표정을 굳이 숨기지 않고 그자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언성을 높인다.

     

     

     


    아저씨! 어디서 약주깨나 드시고 오셨나 본데 흥분 좀 가라앉히시고 저희 얘길 우선 들어 보세요!

     

     

     


    대기자용 나무 의자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걸치고 있던 창백한 안색의 상준이 벌떡 일어나 남자에게 다가서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힘겹게 말을 꺼낸다.

     

     

     


    죄송합니다. 전혀 고의성은 없었습니다.

    만원 버스 속에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자제하려 애썼는데도 그만..

    여하튼, 변명은 그만두고  백배 사죄 드립니다.

     

     


    뭐? 여하튼?? 이런 짐승 같은 새끼가..!!

     

     

     


    분노가 제어되지 않는지 사내는 욕설과 함께 구둣발로 그의 배를 힘껏 밀어 버린다.


    상준은 힘없이 뒤로 나가떨어지며, 어안이 벙벙하여 서 있던 민아의 종아리에 머리를 찧었다.


    경관과 젊은 의경이 동시에 달려들어, 이성을 잃은 지 오래된 듯한 사내를 앞뒤로 붙잡았다.

     

     

     


    이것 보세요! 경찰서 안에서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런 식으로 폭력을 행사하시면, 폭행 현행범으로 체포하겠습니다!

    업무 방해하지 마시고 마음을 좀 가라앉히세요.

     

    어이, 박 의경, 이분 물 한 잔 갖다 드려.

     

     

     


    큼직한 사무 공간의 중앙에 자리한 육중한 철제 책상 앞에 비스듬히 턱을 괴고 앉아 이 소동을 관망하던

    (수사반장으로 보이는) 중년의 형사가, 이제는 관여할 때가 되었다 느꼈는지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흥분에서 쉽사리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고수머리를 "크진 않지만 굵직한" 음성 하나로 제압하는 중이었다.

     

    다소 배가 나온 걸 제외하면 스포츠머리에 다부진 체형만으로도 예사롭지 않은 포스를 발산하기엔 충분해 보였다.

     

    부부(?)를 번갈아 쳐다보기만 했을 뿐인데, 산전수전의 경력에서 뿜어져 나오는 노련한 기(氣)가

    범상치 않은 무언가로 자신들의 냄새나는 의중을 꿰뚫는다고, 지레 겁이라도 먹은 것일까.

    짙은 향수 및 화장품 냄새를 사방에 풍기고 있던 삼십 대 초반의 피해 당사자 여인조차

    눈치가 보이는지 마지못해 사내의 팔을 잡아 만류하며, 남편(?)의 등장으로 잠시 다물고 있던 입을 다시 열었다.

     

     

     


    여보, 진정해요. 저런 인간은 때릴 가치도 없다고요!

     

     

     


    대충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조금은 알게 된 민아였으나, 아픔보단 수치에 짓눌려 - 바닥에 엎드린 채 - 일어날 줄 모르는 그를 내려다보는 시선엔 약간의 놀라움 외에 어떠한 경멸의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지 않았다.

     

    그녀는 상준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힘겹게 일으키면서, 마구 헝클어진 정수리 부위를 보고 또 한 번 놀라야 했다.

    한 움큼까지는 아니지만 꽤 많이 뜯겨나간 자리의 두피 위로 빨간 핏방울들이 점점이 맺혀 굳어 있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아주 짧은 순간임에도, 시력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닌 그녀의 눈에 그것은 마치 돋보기로 확대된 듯

    강렬한 이미지를 선사하였다.

     

     

     


    민아.. 와 주었구나.

    이런 모습 보여서 정말 미안하다..

     

     

     


    민아와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계속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그가 사과로 대신한 인사를 전했다.


    그녀를 뒤늦게 발견한 중고참 형사가 민아를 손짓해 부른 후, 작성 중인 조서를 보여 주었다.

     

     

     


    저분 부인 되시죠? 당황하실 만도 한 상황인데 무척 침착하시군요.

    부인이라도 냉정함을 유지해 주시니 저희야 다행입니다만, 정작 부인께선 속으로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습니까.

     

     


    예?? 아.. 예..

     

     

     

    부인 아니세요? 본인이 와이프를 부르겠다 해서 그리 알았는데..?

    그러고 보니 와이프라 하기엔 굉장히 앳되시군요. 동생분이신가..?

     

     

     

    아니요, 와이프 맞아요. 저이하고 나이차가 좀 많아요..

     

     

     


    수사 업무에 잔뼈가 굵은 반장급이면 - 적어도 수사선상의 인물들에 대해선 - 말을 섞지 않아도

    그들이 대략 어떤 사람이고 어떤 꿍꿍이를 지니고 있는지 정도는 동물적 감각으로 캐치한다는데, 

    "반(半) 무당이 다 된 베테랑"의 촉으로 느긋하게 이쪽을 주시하는 그에게 이들 두 쌍은 아마도

    쌍방이 경쟁하듯 어설픈 "부부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였으리라. 그만큼 이들은,

    진짜가 아니라는 단서들만 부주의하게 줄줄 흘리는 초보 용의자들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추리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웬만한 형사라면 그냥 바로 간파할 수 있는 수준이랄까. 그러므로

    뒤에서 뒷짐 지고 있는 반장뿐 아니라 직접 조서를 꾸미고 있는 형사도 이런 정도의 파악은 당연히 마쳤겠으나,

    사건 해결을 위한 혹시 모를 도구로만 간직할 뿐, 자칫 프라이버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는 "이에 대한 추궁"은

    꼭 필요한 때가 아니고는 굳이 하지 않겠단 입장이었고, 특별히 따져야 할 경우가 아닐 시

    이를 문제 삼지도 않겠다는 주의인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알면서 모르는 척 넘어가 주는 것일 테지..

     

     

     

     

    남편께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잘못인 데다 깊이 반성하시고 계시니 가급적이면 검찰에 송치하지 않고 저희 선에서

    처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피의자 피해자 간에 합의가 우선 전제되어야 함은 잘 아시지요?

     

     

     

    그럼요, 어떻게든 합의를 보겠습니다. 부디 선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초범에다 순순히 범죄 사실을 시인하고 계시니 합의만 원만하게 이뤄진다면

    부인이 원하시는 대로 잘 해결될 듯합니다. 그런데.. 부인 얼굴은 왜..

     

     

     


    민아는 입 근처의 상처를 얼른 손으로 가리며 얼굴을 돌렸다.

     

     

     


    별일 아녜요. 어제 길 가다 빙판에 미끄러져서 그만..

     

     

     


    상준이 그녀의 남편이든 애인이든 간에 민아가 그에게 맞고 사는 건 아닌지 형사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가려는 순간

    그 틈을 주지 않고 피해자의 남편이란 작자가 끼어들었다.

     

     

     

     

    이 여자가 저 인간 와이프인가?
    이렇게 새파란 여잘 부인으로 두고도 남의 여편네 엉덩이나 주무르고 말이야.

     

    여자가 밤에 어떻게 해줬길래..? 따지고 보면 당신 책임도 커! 이 여자야!!

     

     

     

    이 양반 안 되겠구만! 당신 지금 한 말 성희롱인 건 알아?

    경찰서 안에서 폭행에다가 성희롱까지.. 당신 지금까지만으로도 죄질이 가볍지 않아! 몹쓸 양반 같으니..

    좋게 말로 할 때 얼른 사과하시오!

     

     

     

    아니에요 형사님, 이분 말도 틀리지 않아요.

    저이가 이런 부끄러운 행동을 한 데에는 아내인 제 잘못도 없다고 볼 순 없겠지요..

     

     

     

    여보! 그러게 왜 외간 여자랑 말을 섞고 그래욧!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당신은 저놈한테나 뭐라 하라고! 폭력은 쓰지 말고..

     

    이봐 아가씨! 보아하니 저 짐승하고는 달리 말이 좀 통할 것 같은데, 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할 거야?!

    형사 나리들이 합의 어쩌고 하는데 난 그러고 싶은 맘 눈곱만치도 없걸랑?

     

     

     

    아니, 부부가 쌍으로 기차 화통을 삶아 자셨나? 공무 집행하는 신성한 곳에서 계속 이러시면 곤란하실 텐데..?

     

     

     

     

    형사의 핀잔 섞인 점잖은 으름장에는 아랑곳도 않고, 여인이 남편과 교대해서

    민아에게 손가락질을 해가며 닦달하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그녀에겐 재수가 옴 붙은 날인 듯하다. 남들이면 평생 겪을까 말까 한 날벼락 같은 일을

    하루에 두 차례나 당하고 있으니 참 기구한 노릇이 아닐 수가 없는데, 보통의 술집 종업원 같으면

    찾아온 돈과 카드만 건네고 혹시나 불똥이 튈까 달아나듯 뛰쳐나올 충분한 상황임에도, 민아는 그러하지 않았다.

    오히려, 술집에서 일하는 자신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천박한 여자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로 용서를 빌었다. 과연 상준이란 남자가

    "이렇게까지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이란 말인가.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랬던 것 같다.

    민아가 그리했어야 할 타당한 이유를 현실에서 찾는다는 건 불가능하리라. 현실 뒤에 숨어 그런 현실이게끔 조종하는

    형이상학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섭리가 작용하였다, 추측하는 수밖에..

    "사랑"이라는 진부한 해석을 무책임하게 끌어들여 남녀 간의 오묘한 조화를 단순화하는 게

    인간의 가장 게으른 작업이라 해도 어찌 인간을 비판할 수 있으랴. "인간을 초월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으로 인해

    인간이 낙인찍히는 것만큼 억울한 일도 또 없을 테니..

     

    신의 영역인 "신비"를 몽땅 끌어안아 비대해진 "인간계의 사랑", 이것의 힘이란 게 이런 걸까.

    이제 막 화류계에 뛰어들어 소위 술집 여자의 곤조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아직은 적당히 소심하고 적당히 숫기 없는 (갓 스물이 넘은) 어린 처녀가, 맹랑한 대담성을 발휘하여

    가짜 신부 연기에 본격적으로 몰입하는 것이었다. 흡사 빙의라도 된 듯이..

     

     

     


    정말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저흰, 결혼한 지 두 달도 안 된 신혼부부예요.  
    같은 여자로서 당신의 지금 기분 백 번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저를 봐서라도 이이를 부디 용서해 주세요.

     

    이인, 정말이지 착한 사람입니다. 거짓말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인데, 어쩌다 이리되었는지..

    요새 직장을 잃고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극심한 우울감에 아마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저 사람은 오늘 일로 평생을 괴로워할 거예요.


    이렇게 빌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주의할 테니, 제발..

     

     

     


    무릎을 꿇고 울먹이기까지 하는 민아의 모습에 정작 놀란 사람은 상준 본인이었다.

    자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나서 주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걸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팡질팡하는 상념 속에서 잠시 망설였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인간의 간사함은 아니 그의 간사함은

    얼떨떨한 표정 안에 계산기를 숨기고 열심히 두드리는 것이었다. 그녀의 - 엉뚱하지만 - 희생적인 내조(?)가

    (어쩌면 생전 처음 당해 보는) 이 난관을 무사히 넘기는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고 가당찮은 희망을 품으면서 말이다.

     

     

    자기보다 열 살 이상이나 어려 보이는 어린 신부(?)의 (나이답지 않은) 헌신적인 사과와

    남편을 대신하여 절절하게 용서를 구하는 그녀의 진정성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의외였던지

    피해자는 팔짱을 낀 채 턱을 쳐들고 간간이 헛기침을 할 뿐 벼르던 얘기를 마저 끄집어내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러자, 사내는 그것이 답답하고 못마땅하다는 듯이 한통속인 여자를 짧게 쳐다본 후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번에는 형사를 비롯한 주변의 직원들에게 삿대질을 해 가며

    버럭 소릴 지르는 강수를 두기에 이른다. 이렇게라도 해야 자신들이 목표하는 바가 간신히 달성될 것 같은

    조바심이 반영된 무모한 행동이었으나, 이에 대한 우려는 그의 안중에서 진작에 사라지고 없는 것처럼 보였다.

     

     

     


    요즘처럼 살벌한 세상에 저런 파렴치한 놈 잡아 처넣지 않으면, 당신들 직무유기하는 거야!  알아?

     

     


    알았어요, 알았어. 내가 보기엔 아저씨가 더 살벌하네요..

     

     


    뭐요?! 이 사람이..

    지금 공무원이 세금 꼬박꼬박 내는 국민의 충고를 개무시한다 이거지?

     

     


    예, 예, 알겠습니다.
    자 그럼, 직접 피해를 입으신 아주머니의 결단에 달려 있는 문제니까 아주머니의 의견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이때까지도 구석에 떨어져서 - 사건의 핵심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 강 건너 불구경하듯 진행 상황만 살펴보던 상준이

    이윽고 민아에게 두 번째로 말을 걸었다.

     

     

     


    저기, 돈은..?

     

     


    아.. 예, 여기 가져왔어요.

     

     

     


    코트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어 그에게 건넨다.

     

     

     


    현금 서비스까지 총 육십만 원이에요. 자투리는 빼고요. 통장엔 이십만 원밖에 안 남아 있더라고요..

     

     


    어 그래, 고마워..

     

     

     


    그는 머뭇머뭇 여인에게로 다가가 최대한 공손히 돈봉투를 내밀었다.

     

     

     


    저.. 이거, 얼마 안 됩니다만.. 세탁비에라도..

     

     

     


    고수머리가, 결국 이걸 기다렸다는 듯이 봉투를 낚아채 그 속에 든 돈을 세어 본다.

     

     

     


    뭐야 이거!? 당신 아주 운 좋아야 깜빵 대신 벌금인데 그게 얼마인 줄이나 알아?

    벌금만도 못 한 고작 육십 가지고 어떻게 해 보시겠다?

     

     


    이것 보세요! 육십만 원이면 세탁비 치고 과할 만치 큰돈인데 뭘 그러십니까?
    자꾸 이러시면 공갈죄에 해당됩니다!

     

     

     


    그를 마크하듯 계속 옆에 서있던 경관도 그 노골적인 행태가 많이 마뜩잖았던지 남자에게 한 소리 내뱉는 걸 잊지 않았다.

     

     

     

     

    형사 양반도 가만있는데 당신이 왜 끼어들어?!

    아니 그러면, 듣도 보도 못한 외간 놈이 버스 안에서 마누라를 겁탈했는데 남편이 돼서 이 정도도 못한단 말이야?

     

     

     

    겁탈은 아니지! 댁의 부인도 인정한 사실을 왜곡하진 맙시다.

     

    그래, 천 경장이 나설 일은 아니야.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사태 진전에 고무된 민아가 핸드백을 열고

    아까 사장에게서 받은 십만 원짜리 수표들 중 네 장을 재빨리 꺼내어 여인의 재킷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백만 원으로 맞춰야겠다"는 즉흥적 의지가 강하게 발동한 셈인데 이 또한

    평상시의 그녀라면 상상하기 힘든 "사랑의 순발력"이었다.

     

     

     


    죄송합니다. 저이의 실직으로 살림이 넉넉지 못 한 형편이고 이미 빚도 많이 진 상태라

    이 이상의 융통은 힘들 것 같습니다. 부디 양해해 주세요.

     

     

     


    받은 수표들 가운데 하나를 꺼내어 0이 몇 개인지 흘깃 확인한 후

    여인은 만사가 귀찮아졌다는 듯 태도가 돌변하여 형사에게 말한다.

     

     

     


    저 인간 콩밥 먹이려고 단단히 별렀었는데..
    이거 정신적 피해 보상으론 턱없이 모자라지만, 내, 새댁을 봐서 이번만 참겠어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부인.

    자, 그럼 여기에 서명 좀 해주시겠습니까?

     

     

     


    형사는 합의문 양식의 비워진 칸을 타이프로 신속하게 채워 넣은 뒤 그것을 여인에게 보여 주었다.

     

     

     


    여보! 당신 뭐 잘못 먹었어? 당신답지 않게 왜 이래?!

     

     

     

    아 몰라! 나 피곤하니까 말 걸지 마!

     

     

     

     

    지옥을 빠져나온 듯한 안도감을 느낀 상준과 민아는 정말로 부부인 양 일심동체가 되어

    속물 부부(?) 및 융통성 넘치는 담당 형사에게 연신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며 진심으로 감사를 표현하였다.

     

     

     


    내 마누라가 봐주지만 않았어도, 네까짓 건 그냥 확 마..! 아오!!

    당신, 길거리에서 칼 맞기 싫음 앞으로 인생 똑바로 살아! 알았어?

     

     

     


    마지막 으름장을 빠뜨리지 않은 무데뽀 남자의 뒤를 따라, 육덕진 부인이

    문제(?)의 히프를 경박하게 씰룩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전상준 씨! 신원도 확실하고 초범에다 재범의 우려도 없고 해서 이 정도로 봐 드린 겁니다.

    저들이 처음부터 돈을 뜯어내려는 의도가 다분했던 걸 당신은 차라리 다행으로 생각해야 해.

    당신 정말 오늘 재수 좋았다고.

    저들이 분탕질 좀 쳤다 해서 당신의 그 더러운 죄질이 희석되는 건 아니란 말이오! 저들이 저러는 건

    너무도 당연한 반응이지. 사실 저건 약과야. 알아요?

     

     

     

    네, 맞습니다. 잘 알고 말고요.

    말씀 명심해서,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깊이 반성하며 살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피해자측이 단순한 분들이라 운이 좋았는 줄 아세요. 합의가 되었다는 게 기적인 것이죠.


    성추행 사범에 대해선 근래 들어 죄질을 무겁게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상습범들에겐 가차없이 중형을 내리는 추세지요.

    전상준 씨도 앞으로 항상 조심하시고, 웬만하면 만원버스나 승객이 꽉 찬 지하철 등은 이용을 삼가 주세요.

     

     

     


    반장의 악의 없는 훈시가 길어질 기미를 보이자 처음엔 기꺼이 귀를 기울이다가도 제 버릇 개 못 주고 점점

    따분함을 느끼기 시작하는 상준이었다. 이런 그의 속도 모르고, 사람 좋게 생긴 천 경장이 한 마디 거드는 것을

    잊지 않는다.

     

     

     


    젊은 아주머니 안 오셨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밤새 유치장 갇히는 신세를 면한 건 전적으로

    와이프분 덕이라 생각하세요. 와이프분을 지금보다 열 배만 더 사랑해 주시면, 오늘 같은 불상사

    다시는 생기지 않을 겁니다. 하하하!

    그런데.. 젊은 아주머니가 어딜 가셨나?

     

     

     


    때마침, 잠깐 자리를 비운 민아가 무언가 들어 있는 비닐봉지를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드링크 한 박스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 정도로 밖에 보답할 수 없어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에요.

     

     

     


    인원수대로 손수 드링크를 돌리는 그녀를 보면서, 자괴감으로 인한 서글픔이 가슴에서 복받쳐 콧등이 시큰해 왔다.

    그러나 이런 제멋대로의 센티멘탈리즘은, 대상에게서 받는 정서적 감동보다

    자기연민이라는 지분을 더 많이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적어도 상준에게는 그러했다.

     

     

     


    어이쿠, 별말씀을요. 안 그래도 갈증이 났었는데..

    잘 마시겠습니다.

     

     


    전상준 씨, 참 좋은 부인 두셨습니다. 부러운데요?

     

    부인, 그럴 리 없으시겠지만 들어가셔서 남편분 너무 닦달하지는 마십시오.

    진심으로 반성하신다니까, 앞으론 절대 부인 마음 상하게 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장담은 못하지만요, 하하!

     

     

     

    저 그럼, 저희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고들 하세요.

     

     

     

     

     

     

    아, 잠시만요!

     

     

     


    인사를 마치고 - 어깨가 축 늘어진 - 상준의 등을 감싸듯 밀며 출입문을 향하는 민아의 등 뒤에서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음을 황급히 알리는 반장의 굵직한 목소리가

    사그라지고 있는 상심의 회오리를 다시 부추기며 두 사람의 불안을 증폭하고 있었다.

     

     

     

     

    또 무슨..?

     

     

     

    다름이 아니고.. 이런 말 드리기 좀 그렇긴 한데..

    저희 서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는, 사건일보의 김 기자라고 있습니다. 두 분은 경황이 없어 눈치 못 채셨겠지만

    방금 전까지도 우릴 주시하며 상황을 기록하고 있었지요. 지금은 담배 한 대 태우러 민원인 대기실에 들어가 있는데

    아무래도 김 기자를 직접 만나 보셔야 할 것 같네요. 사안이 사안인지라 본격적인 취재를 하려는 듯하니 협조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취재요? 그 얘긴 오늘 제가 한 일이 신문에 오른다는 뜻인가요?

     

     

     

    말하자면 그렇지요.

    뭐.. 이름을 비롯해서 댁의 정보가 다 밝혀지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만요..

     

     

     

     

    겨우 갠 하늘에 다시금 먹구름이 몰려들고 이를 망연자실 바라봐야 하는 이재민의 막막한 심경을 느끼며

    상준은 도로 창백해진 낯빛을 감출 여력도 없이 낭패감 속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마음 한 구석에 왠지 모를 찝찝함이 사라지지 않더라니..

    끝난 줄 알았건만 끝난 게 아니었어. 진짜 큰일은 이제부터구나..'

     

     

     

    허허, 처음 겪는 거라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신 모양이네.

    쯧쯧, 그러게 점잖은 양반이 왜 그런 짓은 저질러 가지고..

    단지 형식적인 절차니 크게 부담 갖지 마시고 몇 가지 질문에만 응해 주시면 될 겁니다.

     

     

     

    네, 그건 알겠는데.. 혹시라도 나중에 발각될까 너무 염려가 되는군요.

     

     

     

    정 그러시면 당사자끼리 잘 협의해 보시죠.

    김 기자도 꽉 막힌 양반은 아니니, 잘 되고 말고는 당신이 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이 경우에도 합의가 가능하단 의미인지요..?

     

     

     

    나는 여기까지만 언급하겠습니다.

     

     

     

     

    저기.. 여보..

     

     

     

    네, 무슨 얘긴지 알겠어요. 제가 곁에 있으니 당신은 아무 걱정 마시고

    먼저 들어가서 말씀 나누고 계세요. 곧 따라 들어갈게요.

     

     

     

     

    본인이 그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뿌듯한 민아는, 더욱 자신감을 가지고

    대외적인 "착한 아내" 역할에 있어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하여 침착하게 핸드백을 열었다.

     

    자신을 좋은 아내로 믿어 의심치 않는 듯한 주위의 시선을 이제는 여유롭게 즐겨가며,

    상준을 최후까지 괴롭히려 하는 끈질긴 위기를 당당히 물리치고자 또 한번 핸드백을 열고

    "타락한 현실이 갈구하는 만병통치약"이 얼마나 남아있나 담담하게 확인하는 그녀였다.

    그를 위해서라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퍼주겠다는 심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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