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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 불안한 보금자리
    상준 이야기/이상한 사랑 2023. 9. 16. 17:14

     

     

     

     

     

     

     

     

     

     

     

     

     

     

     

     

     

     


    숙인 고개를 들지 못하고 멀찌감치 앞서 터벅터벅 걷고 있는 상준에게 민아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의 팔에 자신의 팔을 감았다.

     

    그녀의 적극적인 제스처가 싫지 않으면서도 그는 여전히 시선을 땅으로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민아를 보기가 너무 부끄럽군.


    오늘, 회사 안 나갔어. 낮에 여관 나오니까 어디 특별히 갈 데가 있어야지.

    영화 한 편 때리고, 카드도 찾을 겸 민아한테 가던 도중이었는데..


    왜 민아도 알잖아. 남자들 생리 구조가 여자랑은 천양지차라는 거..
    민아가 날 색안경 끼고 봐도 할 말은 없지만 말이야. 이번 일은 진짜 우발적이었다고..

     

     


    더 얘기 안 하셔도 돼요. 전, 오빠를 믿어요.,

     

     


    고.. 고맙군.

     

    오늘 민아한테 신셀 너무 많이 진 것 같아. 민아가 보탠 그 많은 돈은 다 어디서 난 거야? 급여라도 받았어?

    마지막 그 기자 놈한테까지 줄 필요는 없었는데.. 이십만 원씩이나..

    빠른 시일 내로 갚을게. 걱정 말고 있어.

     

    하여간 너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수백 번 감사해도 모자랄 지경이야.

    저녁이라도 푸짐하게 대접하고 싶은데 보다시피 현재는 무일푼이니..

     

     

     


    민아가 팔짱 낀 팔에 힘을 주며, 걷는 것마저 힘겨운 상준을 리드하였다.

     

     

     


    오빠, 오늘 아무것도 안 드셨죠?

     

     


    그걸 어떻게 알지?

     

     


    오빠 걷는 폼이 "나 하루 세끼 굶은 사람이오!"라고 얘기하는걸요.
    제가 오히려 저녁 사 드려야겠네요.

     

     


    아냐. 그럴 필요 없어.

     

     


    오빠, 그러지 말고 우리 집에 가요.

    저도 지금은 주머니 사정이 그렇고 하니 외식은 좀 어렵겠구요..

    마침 저 사는 곳이 이 근처고 하니깐 저랑 같이 가면 따뜻한 밥 지어 드릴게요.

     

     


    민아가 나한테 밥을 다 해 준다니..

     

    내가 꼭 네 남편이 된 기분인데? 하하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훈훈한 밥 한 끼를 머릿속에 떠올리자 겨우 마음의 여유가 생긴 걸까.

    그는 비로소 얼굴을 마주 보며 조금은 부자연스러운 너털웃음을 그녀에게 지어 보였다.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아까 경찰서에서..   
    우리가 부부 사이인 줄로 다들 감쪽같이 속아 주더라. 그 와중에도 그게 놀랍고 한편으론 좀 웃겼어.


    너도 그렇지 않았니? 와 보니까, 난데없이 내 마누라가 되어 있어 황당했을 거야. 흐흐..

     

     


    글쎄요, 난다 긴다 하는 형사 분들인데 설마 몰랐으려고요. 알면서도 속아 주신 거겠죠.

     

    그나저나 태평도 하셔라. 저 같았으면, 얘가 발뺌이라도 하면 어쩌나 마음을 졸였을 텐데..

     

     


    우리 착한 민아가 그럴 리 있겠어?

     

     


    흥, 나 너무 믿지 마세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요!

     

     

     


    내용과는 상관없이 민아의 귀엽게 꺼내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자괴감에 젖어 우울과 절망으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던 상준에게 안도와 희망의 다스한 빛으로 다가왔다. 그는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어 민아의 손을 꼭 쥐어 주었다.

     

     

     


    손이 얼었구나. 장갑이라도 끼고 다녀야지..

    장갑은 있니?

     

     


    그래야겠네요. 밤이 되니까 기온이 많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참, 오빠 결혼하셨다 그랬죠?

     

     


    내가 그런 얘기도 너한테 했었니?

     

     


    저번에 회사 사람들하고 술 드실 때, 나온 이야기들 대충 들었거든요.

     

     


    그걸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고?
    허허, 민아한테는 총각 행세 좀 하려고 했는데 다 틀려 버렸네!

     

    어때? 나 아직 총각으로 보여?

     

     


    그래요. 오빠는 되게 젊어.. 아니 어려 보여요. 아직 이십 대죠?

     

     


    몇으로 보이는데?

     

     


    스물여섯? 일곱?

     

     


    살짝 기대했는데 실망인걸? 거의 다 맞춰 놓고서 뭘 어리게 본다는 거야?! 그냥 접대용 멘트였구만..
    적어도 이십 대 초반으로는 봐 줘야지! 크크..

     

     


    호호, 욕심도 과하셔라.


    결혼을 일찍 하셨나 보다.

    집에서 부인이 오매불망 기다리고 계실 테니 오늘은 일찍 보내 드려야겠네요.
    혹시, 오빠 결근한 거 아시고 걱정하고 계시는지도 모르잖아요.

     

     


    회사에서 연락이 갔다면 그럴는지도 모르지..

    그 사람은 워낙 현실적이라 내가 걱정된다기보다는 아마 다른 쪽으로 걱정이 앞설 거야.


    그건 그렇고 난, 퇴근 시간에 구애받지 않아. 지금 와이프랑 시한부 별거 중이거든.

     

     


    어머, 왜요?  두 분 사이 안 좋으세요?

     

     


    꼭 집어 그렇다 할 순 없는데.. 일이 좀 그리 되었어.
    너무나 개인적인 사정이라 민아에게도 얘기하기가 좀 뭣하군.

     

     


    말하기 어려우시면 안 하셔도 돼요.

     

    결혼하셨으니 당연히 아기도 있으시겠다.. 그쵸?

     

     


    그럼.

    미운 네 살 귀여운 공주님이 계시지.

     

     


    어머나, 이쁘겠다! 누구 닮았어요? 어느 쪽을 닮았든 예쁘겠지만..

     

     

     

     


    하루도 안 지난 아니 불과 이십 분도 안 지난 전에 끔찍한 악몽을 겪은 사람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혼란한 의식의 지배하에서도 본능적으로 해맑음을 추구하는 두 청춘이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우며

    미로처럼 얽힌 골목들을 차례로 지나 어느덧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상준의 짐작대로 민아는, 남의 집 옥상에 자리한 작은 옥탑방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처지라고 동병상련을 느끼기엔 그녀의 방은 작지만 아주 깔끔히 정돈되어 있었고, 젊은 여자의 보금자리답게

    소박하지만 앙증맞은 장식물들이 포근한 공간 속에서 나름의 미를 충분히 과시하고들 있었다.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민아는 부엌으로 직행, 쌀을 씻느라 분주하기만 하다.

     

     

     


    오빠, 피곤하지? 금방 준비할 테니까 티브이라도 보고 있어.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자마자 상준은 통나무 쓰러지듯 방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빈혈 환자처럼 눈앞이 캄캄해지며 별들이 왔다 갔다 한다.  
    캄캄하던 시야가 이번엔 노랗게 변하면서, 천장 벽지의 올망졸망한 무늬들이 그의 몸으로 와르르 쏟아져 내린다.

     

     

     


    오빠! 오빠아!

    정신 차려!!

     

     

     


    민아의 목소리가 긴 터널 끝에서 나풀거리며 날아와 그의 귓바퀴를 타고 미끄러진다.


    몸을 흔드는 가벼운 충격이 반복되었으나, 무거운 눈꺼풀은 자꾸만 아래로 당겨졌다.

     

     

     

     

     

     

     

     

     

     

     

     


    그새 잠이 들었었나 내가?

     

     


    기절한 줄 알고 놀랐잖아요!

    오빠, 오늘 많이 힘들었을 거야.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잠깐이나마 눈 붙이시라고 더는 깨우지 않았어요.


    코까지 골고 주무시길래 어쩌나 했는데 식사할 때 되니까 용케 일어나셨네요, 호호..

    배고플 텐데 어서 드세요. 차린 게 너무 없어서 미안..

     

     

     


    밥상을 보니, 그 말이 겸손의 표현만은 아님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빈약한 상차림인 게 사실이었다.


    아담한 둥근 소반 한가운데에 놓인 볼품없이 낡은 냄비 안에서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두부김치찌개가

    뜨거운 김을 피워 올리고 있을 뿐 그것 외에는 밥 두 그릇과 물컵 두 개가 전부였다. 그러나

    뱃속에서 계속 꼬르륵 소리가 나던 차라 참을 수 없는 찌게 냄새만으로도 상준에게는 충분히 진수성찬이었다.

     

     

     


    이야, 정말 맛있겠다.

    다른 반찬이 뭐가 필요해? 이렇게 맛있는 찌개 하나면 됐지..

     

     


    빈말이라도 그리 말해 줘서 고마워요, 오빠. 다음에 정식으로 초대할게. 오늘만 봐줘, 헤헤..
    다음번엔 미리 장도 보고 맛있는 거 많이 준비해서 실력 발휘 할 거야. 기대해요.

     

     


    너 요리깨나 하나 보다? 아주 자신만만인데? 내가 한 입 떠먹어 보면 금방 들통나니까 긴장해 후후..

     

    가난한 자취생은 집에 있을 땐 대충 이런 식으로 때우는 게 정상 아닌가? 미안할 거 없어.
    나 봐라. 학생은 아니지만 나도 자취하잖니. 자취하는 남자가 보기엔 이것도 과분하다 야.
    난 말이야, 혼자 있는 날이면 그냥 라면으로 때우고 어떤 땐 그것조차 귀찮아 빵 조각이나 뜯고 지내는 날도

    부지기수란다.

     

    그래도 넌 여자라 그런지, 혼자서도 야무지게 잘 챙겨 먹는구나. 밥도 잘하고..

    그게 좋은 거다. 잘하고 있네.

     

     


    밥은 전기밥솥이 한답니다 아저씨.

    상에 침 떨어지겠어요! 수다는 그만 떠시고 빨리 드시기나 하세요 호호..

     

     

     

     

    그는 시장을 반찬 삼아 밥과 찌개를 허겁지겁 입 안에 욱여넣었다.

     

     

     


    체하겠어요. 물도 좀 마셔가면서 천천히 드세요.

     

     


    캬아, 찌개 맛 진짜 죽인다! 이게 얼마 만에 먹어 보는 예쁜이표 찌개냐!? 시집가면 사랑받겠어?!

     

     


    아이 참, 오빠도..

     

     

     


    못난 남자의 아부성 칭찬이 싫지만은 않은지 민아는 방긋 웃음을 굳이 감추려 들지 않았다.

     

     

     


    어?? 너 그 얼굴..

    어떻게 된 거니. 입술이 터져 있잖아?! 멍도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고..

    대체 어떤 놈이..? 누구야? 빨리 말해 봐! 내가 가만 안 두겠어!

     

     

     


    상준이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만지며 짐짓 놀란 표정을 짓는다.


    자신에게 닥친 일에만 경황이 없어 애써 모른 척하다가 아는 체할 타이밍을 놓치고 어찌어찌 예까지 이르긴 했으나,

    밥까지 얻어먹고 있는 "둘만의 공간"에 머릴 맞대고 있으면서 염치없이 계속 무시하는 것도 민망하여,

    그제서야 민아의 아픈 상처가 눈에 띈 듯이 적당히 호들갑을 섞어 그럴듯한 연기를 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별일 아니라는 듯 바쁘게 수저를 놀린다.

     

     

     


    으이그, 참 빨리도 알아보시네요.

    아까 낮에, 일하러 가던 도중에 넘어져서 다친 거예요.

     

     


    나쁜 놈이 때린 게 아니고? 미친놈이든가..

     

     


    누가 날 때려요? 나 다른 사람한테 맞을 짓 한 적 없어요. 
    그리고, 실없이 아무한테나 얻어맞고 다닐 여자 아니라는 거 오빠도 잘 알잖아요?

     

     


    그야 그렇지..

     

     


    이 상처 덕분에 오빠한테 올 수 있었던 거라고요. 
    얼굴이 이 모양이니 손님들 술맛 날 리 없지 않겠어요?

     

     


    허허, 딴은 그렇군..

    요 상처한테 고마워해야 할 사람이 나란 말이지? 그건 그렇다 치고,

    조심성 많은 우리 아가씨가 얻다 정신을 빠뜨려서 이 지경이 되도록 넘어졌을고?

     

     

     


    그는 민아의 얼굴과 입 주변을 자꾸 어루만지며 안쓰러워 못 견디겠다는 애틋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나 때문에 치료도 제대로 못 받은 모양이네.. 이를 어쩌나..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제가 더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이따 자기 전에 약 바르면 돼요.


    찌개 식겠어요, 신경 쓰지 말고 식사나 마저 하세요.

     

     

     

     


    한동안 침묵이 흘렀고, 다시 시작된 "두 사람의 음식물 넘기는 소리"만

    TV 연속극 주인공들의 음성과 뭉쳐져 방 안을 거닐었다.

     

     

     

     

     

     

     

     

     

     

     

     

     


    부엌이라 해 봤자 두어 평 남짓의 반(半) 입식 주방으로, 필요에 따라 시멘트 바닥은 간이 욕실을 겸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간단한 설거지를 끝내고 그녀가 양치를 하는 동안, 상준은 그녀의 베개를 베고 누워 뉴스를 시청했다.

     

     

     


    민아야!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될까?

     

     


    ................

     

     


    썰렁한 방에 기어들어 가기가 왠지 싫어서 그래.
    민아랑 같이 있어 그런지 여긴 천국처럼 아늑하구나..

     

     


    무슨 천국씩이나..

    진짜 천국 가 보셨음 그런 말 안 나올 텐데요?

     

    그러면 그렇게 하세요. 나도 요즘 들어 혼자 자기 좀 무섭고 쓸쓸했었는데.. 잘 됐다.

     

     


    큭큭, 이 늑대랑 같이 자는 건 안 무섭고?

     

     


    오빠야 뭐..

    경찰 아저씨들도 인정해 준 내 남편이니까요. 호호..

     

     

     


    민아의 농담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는 옷을 벗어 던지고 팬티 차림으로 부엌과 방의 경계 앞에 섰다.

     

     

     


    그 거짓말 참말이지?!

     

     

     


    문지방에 서 있는 상준을 본 그녀는, 약간의 오버액션을 취하며 손으로 황급히 눈을 가리는 시늉을 하였다.

     

     

     


    아이, 망측해라. 옷은 갑자기 왜 벗고 난리예요!?

     

     


    양치질 다 했으면 그 칫솔에다 약 묻혀 줄래? 나도 좀 씻어야겠다.

     

     


    오빠, 여긴 부엌이라 외풍이 심해요.

    겨울에 춥지도 않으세요? 옷 입고 간단히 세수만 하세요.

     

     


    노노. 오빤 추위 별로 안 타.
    약식으로라도 샤워를 해야겠어. 몸이 너무 찌뿌둥해서 말이야..

     

     

     


    민아는 살짝 눈을 흘기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에잇, 엉큼도 하셔라..

    알았어요. 나 세수 금방 할 테니깐  잠깐만 기다려.

     

     

     


    그녀야말로 추위를 안 타는지 깡똥한 나시에 짧은 반바지만 입고, 부엌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긴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 올린 다음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민아 넌, 목욕 안 할 거야?

     

     

     


    하얗게 드러난 허벅지와, 반바지의 얇은 천을 밀치며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한 실한 엉덩이가 움직일 때마다,

    팬티 속에서 피곤을 달래고 있던 상준의 물건은 다시금 용을 쓰려 한다.

     

     

     


    난 내일 아침 일찍 목욕 갈 건데요?

    오빠도 그러지 말고 저랑 같이 목욕탕 가요, 네?

     

     

     


    얼굴에 비누칠을 잔뜩 한 민아가 무방비 상태로 세면에만 전념하고 있을 때였다.

    상준은 거추장스럽다는 듯 팬티마저 훌렁 벗고 살금살금 도둑고양이처럼 부엌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최대한 조용조용 다가가 뒤에서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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