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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 설익은 도취
    상준 이야기/이상한 사랑 2023. 11. 13. 18:43

     

     

     

     

     

     

     

     

     

     

     

     

     

     

     

     

     

     

     

     

    벽에 걸린 시계에서 뻐꾸기가 나와 열 번을 울고 들어갔다.


    두툼한 이불 속에서 한 번 더 몸을 섞고 나서야
    녹초가 된 두 사람은 형광등 불빛이 다스리는 천장을 보고 나란히 누웠다.

     

     

     

     


    민아야, 너 정말 나 사랑하니?

     

     


    그럼요.

     

    이런 말 하면 웃을지 모르겠지만, 아까 경찰서에서 아저씨들이 나 보고 오빠 부인이냐 물어봤을 때

    속으로 싫지가 않았어요.
    그 아저씨들 눈엔, 조금의 의심도 없이 내가 오빠의 아내처럼 보였다는 얘기잖아요?
    내가 오빠하구 그만큼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남들도 인정해 주는 것 같아서 오히려 기분이 좋던데요?

     

     


    흐흐, 순진한 녀석..

     

    너도, 가만 보면 엉뚱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영양가 없는 유부남 좋아해서 얻다 쓰려고 그래?

     

     


    그러면 오빠는 나 사랑하지 않아요?

     

     


    글쎄다..

    사랑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쳇, 그냥 내 몸이 고파서 만난단 얘긴가요?

     

     


    그렇게 직설적으로 나오면 난 딱히 할 말이 없어.
    그래, 그런 측면도 물론 있겠지. 그런데 그게 전부는 아냐.

     

     

     


    상준의 이어질 말을 기대하는 민아의 눈이 유난히 빛을 발하고 있다.

     

     

     


    룸살롱에서 널 만났을 때 흡사 전기에 감전되는 것 같았어.
    분명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거든. 이런 걸 데자뷔라 하던가? 아무튼, 네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봐도 널 이전에 어디서 처음 접했는지는 도통 모르겠더라고.


    민아 너도 스스로를 잘 알고 있겠지만, 솔직히 네가 예쁜 축에 드는 건 아니잖아?
    그런데도 자꾸만 정이 가는 건 바로 그 데자뷔 때문인 걸까..

    꼬시는 멘트가 아니라 진짜로 묘한 기분이 들기는 했어.

     

     


    내가 예쁘지는 않아도, 그렇다고 아주 못생긴 것도 아니잖아요?

     

     


    그야 그렇지.

     

     


    이렇게 평범한 듯하면서 매력을 온몸으로 발산하는 여자 있으면, 나와 보라 하세요!

     

     


    민아, 삐쳤어? 허허, 그렇다고 본인 입으로..?

     

     

     


    그녀는 대답 대신 돌아눕는 것으로써 불편한 심기를 표현하였다.
    토라져 모로 누운 민아의 어깨를 잡아당기면서 그는 자신의 팔을 베게 하였다. 그리고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네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민아 네겐 남자가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여자로서의 매력이 있어.
    평범한 가운데 너만의 독특한.. 뭐랄까, 부담 없이 정을 줄 수 있는 소박한 섹시함이라 할까?

     

     


    흥! 비행기 태우지 마세요. 멀미 나요.

     

     


    오늘, 날 위해 정말 많은 걸 해 주었다. 네가 날 구해 준 거야. 너 아니었으면 난 지금쯤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을지도 몰라.

    네가 와 준 건 다행을 넘어 기적과 다를 바 없어.. 어느 술집 종업원이 내 심부름에 충실히 응할 거며

    또 어찌어찌 왔다 쳐도 이렇게까지 자기 일처럼 대응해 줄 사람 누가 있겠니.


    널 사랑하냐고 물었지? 바로 대답해 줄게.
    보잘 것 없는 나, 한심하기 짝이 없는 나를 이처럼 아껴 주고 존중해 주는 너를 사랑하지 않고

    그 누굴 사랑한단 말이니. 사랑한다, 민아..

     

     

     


    그녀가 다시 머리를 돌려 상준의 품으로 파고든다.

     

     

     


    그리 말해 줘서 고마워요, 오빠.


    근데 참 이상하죠? 저도 오빠를 처음 봤을 때 오빠하고 비슷한 감정을 느꼈거든요.. 어디서 만나 본 듯한 얼굴..
    유치하지만, 흔히들 말하는 운명 같은 만남이 이런 게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니까요?!   
    물론.. 오빠의 건장한 체격과 잘생긴 얼굴에도 뿅가긴 했지만요, 헤헤..

     

     


    그랬구나.

     

     


    오빠 와이프는 어떻게 생기셨나요? 나보다야 당연히 예쁘겠죠?

     

     


    뭐 그렇기는..

    저기 그런데.. 우리, 적어도 이 자리에선 와이프 얘기 꺼내지 말자.

     

     


    아, 알았어요. 전 그저, 오빠 와이프가 부러워서요.
    내가 몇 년만 더 일찍 오빠를 만났다면 혹시 알아요? 지금쯤 오빠의 아내가 되어 있을는지..

    후훗 망상인가요? 그래도 오빠가 싱글이면 현재진행형으로 꿈은 꿔 볼 수 있는 거잖아요.

    이젠 가망이 없으니 아쉬울 뿐이지만..

     

     

     

     

    민아를 꼭 껴안으며 그가 말을 이었다.

     

     

     


    나폴레옹이 그랬던가?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말은 없다고.

    미리 낙담하지는 마.

     

     

     


    고개를 쳐들어 얼굴을 상준의 턱 밑에 바짝 대고는, 사랑이 듬뿍 담긴 눈망울로 말똥말똥 올려다보는 그녀였다.

     

     

     


    그 말은.. 아직도 내가 오빠와 맺어질 가능성은 있단 얘기죠?

     

     


    지금도 이렇게 한 이불 속에 같이 있잖니. 이러면 다 맺어진 것 아닌가?

     

     


    남몰래 이러는 거 말고요. 떳떳하게 같이 사는 그러니까 오빠의 아내가 될 수도 있냐는 거죠.

     

     

     


    민아, 조급하게 생각할 것 없어. 넌 아직 어리지 않니?
    나보다 훨씬 잘나고 훌륭한 남자들, 이 세상엔 널렸단다.


    지금의 이게 사랑인지 그렇다면 이 사랑이 진짜인지는 세월이 증명해 주겠지..
    너나 나나 언제 서로에게 싫증 내고 다른 이성을 찾아 좋아하게 될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니,

    지금의 감정이 진실이라 속단하여 천년만년 갈 것처럼 위선적으로 행동하지는 말자. 그러기엔 우리는

    솔직함을 미덕으로 갖춘 순수한 젊음들이니까.


    사랑과 결혼은 낭만과 현실의 차이만큼이나 별개의 문제라는 건, 너도 잘 알지?

     


    너한테 미처 얘기는 못 했지만 난 사실 너무도 부조리한 인간이란다.
    핸디캡이나 콤플렉스, 감정적 불균형 등이 얽히고설켜, 바윗덩이 만한 무게로 날 짓누른 지 오래야.
    매일매일을 가공할 불안과 스트레스 속에서 고통받으며 기괴하게 변해 가는 나를

    감당할 여자는 아마 이 세상에 없을지 몰라. 나도 나 자신 감당이 안 되는데 다른 어느 누가 감당하겠니.
    민아 너라고 해도 별수 없을걸? 아무쪼록 현실을 직시하고 환상에서 깨어나길 바란다.


    피폐한 무의식이 내 의식을 지배하는 한, 언제 어느 때 오늘과 같은 이상행동이 또 일어나게 될지 난 예측 못해.

    그래서 난.. 나 자신이 너무 무서워!

     

     

     


    민아의 푸근한 유방에 얼굴을 묻으며 그는 독백하듯 그리고 흐느끼듯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이런 얘기, 실은 내 아내에게도 대놓고 하지 않았어. 이실직고할 엄두가 나야 말이지.
    나만 바라보며 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그녀에게, 더구나 내 아이까지 낳아준 그녀에게

    책임 있는 가장으로서 어떻게 이런 무책임한 넋두리를 늘어놓을 수 있겠니. 
    자격지심인지는 모르겠지만, 백 번 양보해서 서로의 고통을 분담하는 것이 부부간의 마땅한 도리라 하더라도

    내 경우는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나 스스로가 잘 알거든.
    털어놓는다고 해결될 일이 있고 그리 되지 않는 일이 있다면 내 문제는 분명 후자에 해당한단 말이지.
    이것은 업보로서 죽는 날까지 나 혼자 짊어지고 갈 형벌이 분명해. 어쩌면 난 태어나기 전부터

    "이러한 삶이 형벌로 내려질 정도의" 큰 죄를 저지른 존재는 아니었을까.

     


    네 눈을 보니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구나. "그렇담 왜 나한텐 얘기하는 거죠?"

     

    맞지? 망설이지 않고 답할게. 너니까!

    다시 오지 않을 지금 이 시각 날 안아 주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하는 얘기야!

     


    아무래도 너와 나의 관계는 현실로 맺어진 게 아니라 환상으로 맺어진 것 같다.


    우린 어떤 현실적 속박에도 종속되어 있지 않단다.
    그냥 여자와 남자의 자격으로 자유 의지를 가지고 그야말로 순수하게 서로가 원해서 만나고 있기 때문이지.
    그러기에 어떠한 사회적 울타리도 우리의 만남을 규정하거나 구획 짓지 못한단다.

     

    ** 그건 아니라고? 불륜일 뿐이니 미화하지 말라고? 이럴 때나 (여기서나) 미화하지 그럼 언제 하겠냐..

    그래, 우린 이 빌어먹을 사회에서 지탄받아 마땅한 말종들이야. 어차피 그들로부터의 낙인은 피할 수 없을진대

    우리마저 스스로를 비하하고 낙인 찍으며 이중의 고통에 시달릴 필요 있을까.

    당사자인 우리는 우리만의 사랑을 부둥켜안고 용기 있게 벼랑 끝에 서자꾸나.

    그들이 지옥이라 믿는 아래로 우릴 떨어뜨릴 때까지..

     

    위태롭긴 하지만, 우리가 있는 이 방 안은

    과거와 미래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영원한 현재만 남아서 다스리는 "환상의 공간"이란다.
    우린 외줄 위에서 아슬아슬 균형을 잡고 있는 광대나 다름없어.


    "영원한 현재"가 주는 선험적 기쁨은 짧은 순간 단속적으로 찾아올 뿐이야. 이 표현이 너무 추상적이니? 아닐걸.

    민아 너도 나와 함께 깊이 느껴 봐서 본능적으로 체득하고 있잖니. 사랑에 취한 남녀가 살을 섞었을 때의 환희를..

    그 짧은 영원의 순간 우리가 사랑을 캐치했으면 그것으로 된 거야. "그렇게 간파한 즉물적 사랑"의 진정성을

    후에 관념이 논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어.

     

    그런데, 용기조차 나약한 우리의 문제는

    그 기쁨을 맛보기 위해 너무 오래 외줄을 탄다는 것이지. 단속(斷續) 사이사이의 길고 지루한 "살아감" 내내

    줄에서 내려오지도 못하는 우린 떨어질까 봐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긴장하면서 세속의 시간을 허송하게 되는 거야.

    그리고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다른 이들의 일상을 흉내 내는 "사이사이의 기간" 우린 땅을 밟고 있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민아야.

    네 입에서 내 와이프 얘기라든가 결혼 얘기 등과 같은 현실적인 말들이 튀어나올 때마다

    우리가 올라타고 있는 외줄은 심하게 흔들린단다.


    네겐 야속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내가 널 만나고 이렇게 사랑을 나누는 건

    우릴 맺어 준 이 알량한 환상, 튼튼하지 못한 외줄 위의 이 아늑한 시공을 유지하고 싶어서야.


    너와 내가 만나면 - 지금 이 방처럼 - 우리의 환상이 차지하는 공간만큼은 무중력이 된단다.
    비록 짊어진 고통의 짐을 없앨 순 없어도, 너와 함께 있는 동안은 그 짐의 무게를 전혀 느낄 수 없단다.

    그러므로 부담이 사라지고, "객관적 관찰이 가능해진" 내 고통을 너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것이지.


    너 또한 이 공간에선 그저 나를 봐 주는 것 이상을 할 필요가 없는데, 지켜봐 주는 것만으로도

    난 네가 고맙고 사랑스럽기 때문이야. 이런 뜻에서 네가 나한테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이고.


    근원적 치유가 아닌 임시변통의 진통제 처방이라 비꼬아도 좋아.
    과연 이곳 세상에서 누가 나를 완전히 치유하고 자유롭게 할 수 있단 말이니.

    널 만나 위태한 환상이나마 맛볼 수 있게 된 것으로도 축복이라면 축복이겠지.

     


    와이프도 한 땐, 지금의 너처럼 내게 환상을 제공해 주었었다.
    서로의 소중한 환상을 나누며 낭만적인 행복감을 공유하던 좋은 시절이 있었어.
    한데, 결혼이라는 현실 속으로 발을 들여놓자 모든 게 사라져 버리는 거야.
    아내와 내가 연애 시절 가꾸어 놓은 무중력의 공간이 현실의 지배하에 놓이면서 쭈그러들었고

    그 속에서 뛰놀던 사랑의 요정들도 무지막지한 중력의 공격을 받아 딱딱한 땅속으로 빨려들고 말았지.
    결혼이란 그런 거란다.

     


    지금이 얼마나 소중한지 네가 알 수 있을까.
    우리가 이렇게 알몸이 되어 서로의 몸을 사랑의 손길로 더듬을 때, 근심 걱정은 모두 사라지고

    생각이 멎고 시간이 멎는다. 진부하니? 사랑은 오래되고 낡고 단조로울수록 가짜가 아닐 가능성이 높아.

     


    연인이란, 환상에 중독된 사람들이란다. 
    그들이 떨어져 있으면 왜 그렇게 서로를 그리워하고 서로의 사랑을 갈구하는지 아니?
    둘이 만났을 때 형성되는 "환상의 막"이 너무도 황홀하여, 한번 그 안에 머물다 보면 빠져나오기가 힘들기 때문이야.

    소위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외압이 작용해 환상으로부터 튕겨져 나온 경우, 강제로 떨어진 두 사람은

    언뜻 사랑하는 상대를 절절히 그리는 듯하지만 어쩌면, 상대를 연인으로 변모케 한 이 환상적인 막(幕) 자체를

    도저히 잊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리하여, 착착 감겨 오는 그것의 마력에 어쩔 수 없이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나라고 별수 있겠어? 난 환상을 사랑하는 만큼만 너를 사랑하는 거야.
    그리고 그만큼만 너에게 집착하고 너의 몸과 마음을 탐하게 될 거야.


    시간이 흐르면서 넌 이런 내가 점점 부담스러워지고, 마치 섹스 중독자에게 걸려든 것 같은 낭패감과 두려움으로

    나를 피하려 들겠지.
    환상에 탐닉하는 나의 수준에 도달하기가 벅차다고 느끼는 순간 너의 환상은 깨어지고 동시에

    외줄 위에서의 네 위태로운 중심 잡기도 마감하고 말겠지.


    네가 떨어지는 충격으로 외줄은 심하게 요동치는데, 혼자 남은 나 역시도 더 버틸 재간은 없겠지..

     

     

     

     


    취미와도 같은 일방적인 장광설을 마치고, 상준은 허공을 향해 풀려 있던 동공에 다시 힘을 모아

    한동안 방치했던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 내심 기대했던 - "혹시 모를 감동의 표정"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아기처럼 쌔근쌔근 내쉬는 민아의 숨소리가 조금씩 커져 가는 게

    자신이 잠들어 있음을 부자연스럽게 시위하는 모습인 것만은 확실한 듯했다. 귀여운 장난꾸러기 같으니..

     

     

     

     

    그럼 그렇지. 내 이야기는 역시나 여자들의 자장가였어. 열이면 열 다 그래.

    휴우,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이랬으면 볼 것도 없이 차임 확정!

     

     

     

     

    듣거나 말거나 (다분히 들으라는 의도로) 자조 섞인 한숨과 함께 혼잣말을 하고 있으니

    이것도 꼴에 작전(?)이라고 먹힌 모양이다. 그녀가 자는 척을 끝내고 고개를 살짝 든 채

    상준을 빼꼼히 바라보듯 하면서 흐뭇한 미소로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후후, 왜 이리 진지하실까. 오빠한텐 장난도 못 치겠네. 다 듣고 있었다고요!

     

    오빠가 어떤 사람이든 내가 먼저 오빠를 버리는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시죠?

     

     

     


    약속은 섣불리 하는 거 아니다. 쉽게 단정 짓지도 말고..


    미래를 예단하는 것은, 스스로를 현실의 그물 속에 옭아매는 짓과 다를 바 없어.
    지금의 감정은 오로지 현재를 위해서만 사용돼야 한다.
    시간이 흘러 너의 마음이 어떤 식으로 변하든지, 그건 지금 여기 있는 네가 책임져야 할 몫은 아니란다.
    마찬가지로, 훗날의 네가 날 떠난다 해도 (지금의 너를 사랑하기도 벅찬) 지금의 내가 상관할 바 아니다.

    미래 가정법의 어느 시공에서 희미하게 일렁이는 내가 널 원망하든 너에게 매달리든

    그것은 여기 있는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의 너답게만 "네 앞에 있는 나"를 대해 주기 바란다. 인생 전체를 아우르는 오버는 하지 말고..

     


    난 널 사랑하듯 너와의 환상도 사랑하기에, 너와 헤어지더라도

    난 중독된 환상을 쫓아 또 다른 여자를 찾게 되겠지.
    내게 환상의 공간을 선사하는 여자가 있다면, 나는 너만큼이나 그녀도 사랑할 수 있단다.


    내 말이 당장은 기분 나쁘겠지만, 너 또한 내 환상론(論)에 "우리의 환상"에 공감한다면

    쉽게 생각하는 대신 이러한 나의 사랑관(觀)을 냉철하게 판단하고 존중해 주기 바란다.


    무한한 가능성의 미래를 괴롭히는 일 없이 그대로 놓아두자꾸나.


    너와 내가 결혼할 수도 헤어질 수도 있는 미래의 시간선들에 하나하나 신경 쓰지 말자.

    현명하게 이 순간을 만끽하자, 민아!

     

     

     


    하여간 이 오빠, 입만 살아가지곤..

    대략 멋진 말들의 향연인 것은 알겠고, 나 오빠보다 무식하다고 스리슬쩍 넘어갈 생각은 마세요.

    제겐 여자의 무기인 촉을 그 어떤 여자들보다 잘 사용할 줄 아는 능력이 있으니까요.

     

    "저를 빠져나갈 구멍"을 벌써 마련하려 애쓰지 마시고 오빠 말대로 지금을 즐기기나 하세요.

    그간 여자들한테 얼마나 당해 왔는진 모르겠으나 저는 그리 구질구질한 여자는 아니랍니다.

    오빠야말로 미리 선긋기 하시는 게 눈에 보여요. 어때요, 제 생각이 틀렸나요?

     

     

     

     

    쿨한 척은 해도 상준을 응시하는 눈빛엔 적지 않은 서운함이 어리어 있었다.

     

     

     

     

    충분히 그렇게 오해할 수 있겠다. 특히 마지막 발언들..

    내가 민아를 얕보았나 보네. 그래도 대학물 먹고 있는 여잔데.. 홍주 여전이라 했었나?

    이야기를 분석할 줄도 알고 제법이야.

     

    본의는 아니지만 오해할 구석이 있다는 자체가 내 논리의 미숙함이겠지.

    허술한 논리를 네게 강변한 것 같아 미안하다. 맞아, 상황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무의식에라도 깔려 있었으니

    이야기의 이면에 붙어 있다가 너의 마음에 묻어났을 테지. 변명하지 않을게. 무조건 내 잘못이야.

     

     

     

    그리 빨리 꼬리를 내리시면 제가 오히려 무안해지잖아요? 아무튼 고수라니깐 훗..

     

     

     

    그럼 내 사과 받아 주는 뜻에서 키스를 허락해 줄래?

     

     

     

    뭐래?

    말 많은 아저씨 입 안이나 헹구고 오시죠? 하도 말을 많이 하느라 침이 말랐을 텐데 냄새나면 난 싫다고요!

     

     

     

    에이 귀찮아. 그리고 뭐가 걱정이야? 침 마른 건 민아가 해결해 주면 되지. 흐흐..

     

     

     

    이제야 오빠답네. 야한 멘트로 또 슬슬 분위기 끌어올리는 거야? 상준 씨?

    지적이고 젠틀한 오빠도 좋지만 이렇듯 한 마리 짐승처럼 구는 오빠가 왜 그런지 더 매력적이더라 나는..

     

     

     

    야, 방금 그거 손님 접대용 멘트는 아니겠지?

     

     

     

    기면 어때? 오빠가 내 "평생 손님" 되어 주면 되지요.

     

     

     

    것도 말 되네.

    나도 이 두 얼굴의 사나이를 두 가지 버전으로 맞춰 주는 민아가 너무너무 좋더라 크크..

     

     

     

     

    이 이상의 대화들은 전부 군더더기라는 듯이 민아 쪽에서 더 적극적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물론 그녀의 입술로..


    세 번째로 대시하는 상준의 몸을 거부하지 않고, 민아는 자신의 문을 활짝 열어 기꺼이 그를 받아들였다.

    상준을 온전히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고픈 갈망이 강렬한 만큼

    그를 몇 번이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그녀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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