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본격적 일탈상준 이야기/이상한 사랑 2023. 6. 28. 21:23
다음날 상준은 공장에 나가지 않았다.
비록 술기운을 빌리긴 하였으나 상사와 동료들에게 속내를 솔직히 드러낸 셈이었고그것으로 사표를 대신하였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무책임하고 비겁한 처사라는 비난을 피할 수는 없겠다.)
종업원이 올라와 흔들어 깨우고 나서야 뒤숭숭한 악몽으로부터 겨우 벗어난 그는,오후 한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에 쫓기듯 숙박업소를 빠져나왔다.
'이제 어디로 간다?이대로 연지한테 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지갑을 열어 보니, 오천 원짜리 달랑 두 장.
버스 정류장 근처 도로변에 세워진 간이매점으로 가서 담배 한 갑을 샀다.
어제의 과음으로 속이 몹시 쓰려왔지만 뜨거운 국물 한 그릇 사 먹고 나면 빈털터리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 주점이 문 열자면 아직 대여섯 시간이나 남아 있다.
입 안만 깔깔할 뿐 식욕이 없어 아점 먹는 것은 포기하고, 막 도착한 아무 버스에 별생각 없이 올라탔다.
평일 오후의 한가함이, 듬성듬성 비어 있는 의자마다 앉아 졸고 있다.
한 번도 타 보지 않은 낯선 노선의 뒷자리에 앉아, 상준은 반쯤 감긴 눈으로뒷걸음질 치는 "차창 밖 회색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겨울의 귀한 햇빛이 녹아드는 창문에 머리가 거의 기대다시피 되었을 즈음,
늘어지게 나오는 하품은 반쯤 뜬 눈마저 완전히 닫아 버렸다.
차고지에 버스를 주차한 기사 아저씨가 다가와 툭툭 건드릴 때까지그는 숙면을 가장한 얕은 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이십여 분을 떨며 기다리다가,출발하려고 시동이 걸린 다른 버스에 급히 올랐다.
삼십여 분 정도가 흘렀을까, 그가 다니던 공장의 담을 끼고 버스가 좁은 도로를 달리고 있다.
여러 개의 대형 굴뚝에선 희미한 연기가 보일 듯 말 듯 솟아오르고 있다.쳐다보기도 싫어 상준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십여 분쯤이 지나자 도심의 비교적 번화한 거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근처 정류장에서 내려, 젊은이들로 조금씩 붐비기 시작하는 거리를 흐느적거리듯 걸었다.
'연지와 자주 데이트하던 코스로군..'
바쁜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적인 도피가 가져다주는 "시한부(?)의 여유"가그로 하여금 새삼스러운 감회에 젖어들게 하였다.
가끔씩 연지와 함께 영화 감상을 하던 극장 앞에 이르렀고, 그는 충동적으로, 남아 있던 돈을 털어 표를 샀다.
할리우드 영화답지 않은 최루성 멜로물이 상영되고 있는 극장의 컴컴한 구석 자리에 앉아,상준은 오랜만에 원 없이 눈물을 흘려 보았다.
관객이 거의 없어 텅 비어 있는 쓸쓸한 공간은 상준에게 "목적 없이 흐느낄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하도록 배려해 주었고
덕분에, 갓 시집온 감상적인 새색시처럼 또는 갓 입대해 적응 못하는 어눌한 신병처럼
공황과도 같은 "존재의 슬픔" 속으로 풍덩 빠져들 수 있었다.
명분 없는 눈물이, 그렇게 한 시간 반 동안 영화와 따로 놀면서 추상화 같은 슬픔을 여유롭게 희롱하였다.
영화관에서 나오자 밖은 어느새 저녁이 되어 있었다.
또렷한 공복감이 위장을 잡고 흔들어댄다.
걸음을 재게 놀려 정류장에 도착한 후, 이번엔 목적지와 노선을 숙지하고지하도를 건너, 낮에 탔던 것과 같은 번호의 버스를 기다렸다.
한낮의 한가로움이 꿈이었나 싶을 만큼, 버스 안은 퇴근하는 사람들로 빽빽하게 메워져 있다.
다음 차를 탈까 잠시 망설이기도 했지만, 추위와 배고픔은머뭇거리는 그를 가차 없이 "동태 궤짝" 속으로 밀어 넣고 말았다.
정차하고 출발할 때마다 해초같이 흔들리는 승객들의 물결을 타고,밀물과 썰물처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의 움직임에 휩쓸려,
시나브로 버스의 중간 부분까지 오게 된 상준이었다.
차 속의 번잡스러움에 진땀 흘리며 한숨을 토하던 중, 갑자기 심장에 짜릿한 전기 자극이라도 받은 양전신이 경직되면서 부르르 떨리기 시작하였다.
그의 정면에서, 비교적 젊어 보이는 여성의 육감적인 실루엣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차창을 통해 흐릿하게 반사되고 있는 화장기 짙은 얼굴이이십 대 후반 혹은 삼십 대 초반 여성이라 짐작하게 했고,
구불구불 웨이브 진 연갈색의 풍성한 머리는
중간에서 큼직한 머리핀으로 한 번 고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깨 아래를 한참이나 덮으며 파도치고 있었다.
꾸역꾸역 조여 오는 승객들의 압력을 핑계로, 상준의 몸은 거친 본능의 꾐에 넘어가 여인의 뒤태에 밀착하고 말았다.
검은색의 털 달린 가죽 재킷 아래 굴곡 있는 히프를 감싼 빨간색 미니 스커트, 그리고 그 아래로겨울용 검은 스타킹이 도발적인 허벅지를 받쳐 주고, 미끈한 종아리는
거의 무릎까지 차오는 (높은 굽의) 롱부츠 속에서 따뜻한 보호를 받고 있었다.
점차 뜨거워 오는 몸의 반응에 무방비로 굴복하고 있는 그의 콧속으로퍼머넌트 액의 잔여 향이 사정없이 침투하고 있다.
사방에서 죄어드는 몸뚱이들의 초점 없는 무표정에 적잖이 안심(?)하며, 상준은모르는 여인의 풍성한 머릿속으로 자신의 얼굴을 조금씩 가져간다.
심한 드라이로 손상된 듯한 푸석한 머릿결이 그의 코를 간질인다.
천천히 고개 저어 여인의 - 그다지 상쾌하지 않은 - 머리 내음을 음미하는 가운데입이 벌려지고 혀가 나와, 그녀의 머리털을 가볍게 핥기 시작한다.
숱이 많은 여인이 눈치채기에는 다소 미약한 자극이었을까.그때까지도 여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좌석 손잡이에 체중을 유지한 채 버스의 덜컹거림에만 몸을 맡기고 있었다.
(부츠의 굽 높이까지 합쳐) 백칠십은 충분히 넘어 보이는 제법 큰 키의 여인이라서,위치만 적당히 조절하면 상준의 하반신이 무리 없이 그녀의 엉덩이에 닿을 수 있었다.
흥분의 고조기로 급히 내닫고 있던 그는 급기야
입고 있던 외투의 단추를 하나씩 끄르며, 양복 바지의 불룩해진 앞면을 노골적으로 여인에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때야 비로소 사태를 파악한 여인이 몸을 빼려 하였으나, 이미 인의 장막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였다.
여인의 거부 반응에 조금은 민망해져 짐짓 점잖은 척 상준도 몸을 움직여 보았지만,주먹 하나 집어넣을 수 없는 비좁은 공간에서 그러한 동작은 오히려
그의 돌이킬 수 없는 흥분에 자극만 가할 따름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감지한 여인이 체념한 듯 힘을 빼고 안정된 본래의 포즈로 돌아온다.
순간, 차도의 요철 부분을 막 통과하였는지 버스가 크게 한 번 요동쳤다.
승객들의 몸이 일시에 한쪽으로 쏠리면서 여인의 탄력이 상준의 허리께를 드세게 친다.
간악해진 본능이 잠깐의 어수선한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오른손을 앞으로 가져가,"귀신에게 몸을 내어 준 샤먼처럼 본인의 의식이 정지하는" 몰아지경 속에서 바지 지퍼까지 내리게 하였다.
풍만한 살집 사이에서 - 남자의 그것으로 여겨지는 - 물컹한 감촉을 느껴 버린 여인이올 것이 오고 말았다는 당혹감에 휩싸이는 와중에도, 상준은 그녀의 골반 언저리에 손바닥을 대어 슬쩍 잡아당기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대담한 행동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벌겋게 상기된 그가 자제력을 완전히 잃고, 뜨겁게 단 볼을 여인의 머리에 비비면서막바지 절정으로 달려나가려는 찰나, 불쾌감의 극에 달한 그녀가
잡고 있던 손잡이에서 손을 떼어, 가쁜 숨을 뿜어대는 "그의 물건"을 움켜잡았다.
미지의 영역에 있던 익명의 여인이
불쌍하리 만치 무모한 치한을 맞이하여 그녀의 정체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폭발 직전의 긴박감으로 꿈틀거리다가 낯선 여인의 손아귀에 갑작스레 갇히자, 어찌나 놀라고 당황스러웠던지(그러나 그러한 낭패감이 오히려 원동력이 되어) 지금껏 용케 참아왔던 일방적인 욕정이
봇물 터지듯 왈칵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없었던 멀미 증상을 호소하면서 말이다.
매저키즘적 쾌락이 발각의 공포와 상호 작용하여,공중으로 영혼이 분산되는 듯한 재앙적 상승효과를 불러왔다.
마침 버스가 멈추었고 일군의 사람들이 내리면서 상준의 뒤로 약간의 여유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여인의 손을 내리쳐 단단히 물린 심벌을 탈출시킴과 동시에, 그는 출구 쪽으로 몸을 날렸고사람들과의 부딪침도 불사해 가며 기어이 내리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차가운 공기에 안겨 한시름 놓을 겨를도 없이 누군가가 목덜미를 낚아챘고상준은 그 바람에 고꾸라져 옆으로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야! 이 변태 새끼야! 사람 겁탈해 놓고 이대로 튀면 다야?!어림없다, 이 더러운 짐승 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