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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간을 거니는 고독 2 : 시간의 단면들이 펼치는 공시(共時)적 인생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2. 12. 8. 23:09
오후 2시 47분
텅 빈 놀이터.
바퀴 빠진 장난감 트럭 위에 뜨거운 모래를 싣다가
맨발로 서서, 작열하는 태양을 바라보던
네 살배기.
오전 10시 47분
한적한 골목.
감기로 조퇴하고, 다스한 4월의 온기가 밴
시멘트 담장 밑을 걸으며
혼자된 자유의 찡함에 들떠 박인희의 봄노래를 가느다랗게 흥얼거리던,
열한 살짜리의 으슬으슬한 희열.
오후 6시 47분
설익은 청춘의 까불거리는 발랄함이 싫어,
가식적인 의협심의 대로변 활보가 싫어,
안일한 외로움에 너무 일찍 안겨 버린 무지(無知).
조로(早老)한 젊음의 천형(天刑) 같은 소심함이
구슬프게 울먹이며 찾아다니던,
서슬 퍼런 학교 뒤편 납작 엎드린 소로(小路)들.
얽히고설킨 궁상들의 밥 짓는 안온함이
낮은 데로 임하여 피멍처럼 물들었지.
가녀린 거미줄들..
새벽 3시 47분
따귀 날리고 봉걸레 휘두르던 페스탈로치들과,
눈물 콧물 수집하며 날라차기 하던 "흰 해골 청자켓"들은,
요리조리 잘도 피한 나였건만,
낳아 주고 길러 주신 "신성한 맹목"의
지당한 기대를 끝내 견디지 못하여
가련한 도피를 보듬고 말았네.
못난 나약함이
몸에 안 맞는 국방색 자포자기를 쓰고 입고 차고 신고 들고
동상 직전의 냉기를 밟으며,
경계할 전방 대신 넋이 나가 올려다보던
까만 맑음, 차가운 은하수.
유성들의 서글픈 춤 그리고 나를 데려갈 유에프오..
밤 11시 47분
비대한 희망을 업고 비틀거리던
공식 인생의 시기.
존재의 젠틀함이 위기를 느껴 생과 무자비하게 타협하고
삶을 구걸하는 간사함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던 그때,
남들 다 하는 꿈같은 사랑과 일상적인 결혼의 자연스러운 이어짐을
어설프게 시도하다가
당찬 여인의 지극히 바람직한 무시에 호되게 당하고 당황한 적이 있지.
열정, 책임감, 진실, 용기가 모두 박약하고
관계를 맺어 사람을 사랑하는 유전자부터가 애초에 열성임을 깨달은 어느 날 이후로,
여자를 모르면서 사랑을 모르면서 미숙한 방식으로 섣불리 구애했던
지난날의 치기 어린 교만이 떠오를 때면
종종 낯을 붉히곤 하지.
나의 내면과 됨됨이를 스스로 직시하게 된 후부터
그녀는 더 이상 내게 아쉬움의 대상으로 남지 않았네
상당한 미인이었음은 인정하지만..
"뒷심 부족과 우유부단이 놓쳐 버린 그녀"를 추억하며 입가에 짓는
어렴풋한 미소로도 이젠 편히 잠들 수 있어.
그녀의 현명했던 선택에 경의를 표하며
결과적으로 그녀에게 나로 인한 피해가 가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새벽 1시 47분
공포가 정의를 창조하던 시절부터였을까.
선을 긋고 다가서지 않는 사랑,
이뤄지기 힘든 외사랑만 골라
"호흡마다 들이쉬는 두려움"을 잊으려 한 건
관계 회피성 기질의 본격 발현을 암시하는 서곡이었는지도.
남녀 관계 역시 사회성의 치열한 분투로 얻어지는 결과물이라 부담스러웠을까.
게으른 무능은 여자를 알아가는 지난(至難)한 과정을 참지 못하고 암컷을 향한 도발에만 집착하였지.
이상(異常)심리가 마구 휘두르던 욕정과
벌거벗고 날뛰던 투박한 이기심 때문에 순정을 다친
극소수 아름다운 숙맥들이여,
재회가 불가능한 그대들에게 통한의 눈물로써 사죄드립니다.
세상을 믿었던 소박한 긍정들이 나로 인하여 마음을 닫았는지도..
야멸치게 닫은 마음만큼 딱 그만큼 세상의 시들기는 더하여졌고
시들어가는 세상은 다시 나를 쇠잔케 하니
이것이 인과응보로세.
담백한 심성에 구정물을 끼얹고
천진한 애심의 참하던 단순함을 꼬아 버렸으니
천벌을 받은들 무엇이 억울하리오.
시름시름 앓던 사춘기를 생뚱맞게 폭격한 적면증
그리고 가혹하리만치 우스꽝스러운 강박 행위.
그 외에
기괴하게 싹트던 감수성을 종양 덩이처럼 키워 참혹한 퇴행을 촉진시킨
지독한 것들이
어쩌면,
그녀들의 절망한 배신감이 미래에서 날아와 안겨준 업보는 아니었을까.
시간을 역행할 정도로 골이 깊은 현생 카르마라서
전생의 준엄한 업인 양 오해하고,
수십 년 전 유아(幼兒)의 허약한 무의식은
괜스레 서러워 그리 자주 운 것일까.
깊은 밤 베갯잇 적시는 죄의식은, 가증스러운 카타르시스.
이토록 사치스러운 참회가 피눈물을 쏟네.
꾀죄죄한 궁핍이
뽀얗게 쌓인 불편함 위에 엎드려
지칠 때까지 기도를 하네. 용서해 달라고..
오후 12시 47분
주름진 족쇄여, 잔병치레 늙으신 몸
기력이 소진하니 성정도 유해져 헛된 기대 놓으시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물단지
애처로운 회한으로 보듬어 새댁이 젖 물리듯 돌보시네.
침침한 낙망 속에 바튼 숨 몰아쉬는 맹목이여
제 앞가림 못하는 애어른이 그리 눈에 밟히셨소?
호강은커녕 남루한 옷, 영양실조
체면 손상 마다 않고 부실한 노구로 간신히 긁어모은
과하디 과한 애정 뒤늦게 쏟으시네.
출세는 고사하고 사람 구실이나 하길
정화수 한 사발에 빌고 또 비시니,
이것저것 다 놓치고 독방에 숨어 버린 헛똑똑이 빙충이가 불쌍해서 그러시오?
모든 게 당신 탓이다 가슴 치시며
죽어도 눈 못 감을 가여움이여.
태양보다 고결한 사랑 백 번 천 번 망극해도 다 갚을 길 없으련만
서툰 표현 트집 잡아 비판하기 급급했네.
이런 불경 어딨을꼬.
남들 다 지는 도리 무에 그리 부담되어
제 인생 건사 않고 종주먹질 해대었나.
족쇄에 치를 떨던 미련퉁이는
느지막이 자신도 족쇄가 되어 노쇠한 등골을 빼먹고 있네.
염치없는 말종이
편히 쉬어 마땅할 "어미 족쇄"의 살을 뜯고 피를 마셔도
불평 한 점 없이 기꺼이 내어 주시네.
그리하고도 오히려
"새끼 족쇄"가 상처 입을까 말 한마디 조심하며 전전긍긍할 뿐이네.
족쇄를 족쇄라 아니 여기고 초지일관 금쪽같이 대하시는 내리사랑
이제야 감읍한들 무슨 소용 있으리오.
자식 경험 없는 홀몸, 중년이라 철들쏘냐.
북망산천 가고 나면 식음전폐 따라나설 나약한 강아지야
살아생전 잘 하기는 애저녁에 틀린 걸까.
족쇄를 못 견디고 엇나갔던 어리석음
개과천선해 봤자지.
"비공식 인생"을 청산할 생각 없이
족쇄가 안 되려고 도망치면 그만인가.
창피한 줄은 알아 지인의 눈을 피해
평일 한낮 살금살금 야반도주하고 있네.
기반 없는 부초(浮草) 인생은
굳건한 기반들이 뿌리박은 땅을 밟으면 현기증이 나지.
덜컹거리는 지하철을 타고 비로소 안도하는 건 아마 이 때문이리라.
계산된 무위(無爲)로의 정착보다 차라리
무위를 향한 줄달음질 자체가 감미로운 것 같다.
아,
무위로 내달리는 이 기분 좋은 흔들림을 영속할 수만 있다면
영원 뒤에 도달할 무위의 순도나 진위 따위는 개의치 않으리라.
? 시 47분
거의 다 빠져나와 머리 꼭대기에 앉은 영혼이
헬멧에 부착된 카메라처럼 내 혼미한 걸음을 주시하네.
내키는 대로 놔 버리는 무책임한 광기를 거부하고
열외자가 감당해야 할 천형 고스란히 받아내었네.
"온갖 자기 파괴적 감정들이 날카롭게 돋아난" 바늘 산을
수도 없이 구르고 굴렀네.
걸레처럼 찢어져 피투성이가 된 정서(情緖)를 질질 끌고
드디어 천국 같은 낭떠러지 위에 섰네.
피붙이란 죄 하나로 삭막한 외톨이를 묵묵히 돌봐온
처량한 사랑들까지 모두 떠나보내고,
성성한 백발이 되어 벼랑 끝에 섰네.
어려서부터 눈치껏 치매를 앓아온
나사 빠진 짜라투스트라가
이제 겨우 맘 편히 실성하여
파도 부딪는 절벽에서 즐거이 펄럭이네.
전부 내려놓은 희소한 광기(狂氣)도 네 발밑 저 아래 있으니 더는 그를 경외하지 말라!
봉두난발의 하얀 포말이 새삼 내 위치를 상기시켜 주네.
잡으려 버둥대도 안 잡혀 포기했고
잡을 수 있어도 잡지 않아 포기했고
이래저래 비워지고
무거운 척 폼 잡아도 자꾸만 가벼워져
날아갈듯 날아갈듯 영혼조차 둥실둥실.
움푹 팬 인생을 무위로 채우면서 예까지 사뿐사뿐.
오면서도 여한 없네.
다 사라져 더 잃을 것 없는 그래서 산뜻하게 나부끼던 절망이 몸을 날리네
자유를 갈망하는 빠삐용처럼.
삶을 실컷 희롱한 실존이
다른 차원의 무위를 향하여 거침없이 떨어지네.
너무 가벼워
추락인지 상승인지 분간할 수가 없네.
다른 우주의 진심들, 다른 시간의 절망들이 무한대로 펼쳐져
요란한 행동을 개시하네.
다른 세계의 47분들은 극단적인 미래여도 좋네.
비약된 결말이 해일처럼 요동쳐도
한 컷 스틸들은 애잔한 그리움일 뿐.
시간의 단면에 알알이 박혀 있는 영롱한 잔상들일 뿐..
무위를 꿈꾸는 무수한 격동들 그 중심에 내가 있네.
다른 무위들의 현란한 움직임이 무한하게 중첩하여 나에게로 수렴하네.
그러므로 이곳 세상의 나는 무위 중의 무위.
무위의 정수(精髓)를 지향하는 난 치열하게 응축해야 하네.
화려한 광기들이 차원을 넘나들며 멋들어지게 무위를 변주하므로
찬란한 종말을 발산하므로
나는 무위가 고여 썩을지라도 미동 않는 멈춤 속으로 파고들어야겠네.
무한 소수의 강렬한 무위들이
(비장한 스파르타쿠스의 마지막 저항처럼)
주저함 없이 각개의 삶을 격파한들
생의 이글거리는 원형(原型)이 꿈쩍이나 할까.
무위도식과 어우러져 악취가 나는
멈춤 속으로, 나는 구더기처럼 파고들어야겠네.
삶에 오염되어 한 바탕 부글거리다 침전하는 무위여야
철저한 홀로 됨을 차지할 자격 있네.
평일의 한가함이 속도를 높여 레일 위를 경쾌하게 미끄러지네
트미하게 일렁이다 말 무위를 향해.
동사한 시신처럼 잔뜩 웅크린 멈춤을 향해..
그러나 무위의 코어에 도사리려면 그 향함까지도 멈추어야 하네.
평일 한낮의 초췌한 멈춤이 탄 지하철은 달리지 않네.
47분들의 끝없는 도열이,
서있는 전철을 끌어당기네.
속력을 내는 건 달리는 것이 아니라, 정지(停止)들이 빨라지는 것이네.
멈춤과 멈춤을 잇는 47분들이,
목적지임을 거부하는 "나의 공간"까지 빈 틈 없이 늘어섰네.
역(驛)과 역 사이는
미분(微分)된 부동(不動)들로 이어지며,
역으로 진입할 땐 하나의 부동이 길어지는 것이네.
향함 없이 멈춤의 에센스에 머물면
이렇듯,
달려가지 않아도,
"자로 잰 잊혀짐"의 적분(積分)된 무위가
누추함을 반기며
다가오게 되어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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