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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그녀를 거니는 고독 (꿈속에서..)
    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2. 12. 4. 21:35

     

     

     

     

     

     

     

     

    왠지 그녀의 안부가 궁금하여졌다.

    아니 그녀가 나의 안부를 궁금해할 것 같다는 느낌이 퍼뜩 들었다.

     

    휴대폰을 열어 번호를 찍으려는데 기억이 가물가물

    버튼들이 가물가물.

    폰은 작아지고

    눌러도 자꾸만 엉뚱한 번호가 뜨고

    화면엔 이상한 그림들이..

     

    그녀와의 통화를 갈망할수록 답답증은 더해가고..

     

     

     

    이십 년은 젊어지신 아버지가 어디선가 나를 부른다.

    있지도 않은 다락을 같이 정리하자고.

     

    아, 다락 딸린 집에서 산 적 있던가.

     

    갑자기 멀쩡한 집기며 가구들을 저 다락 위로 옮겨 차곡차곡 쌓고 싶었다.

     

    어린 시절의 이층 침대 옆에 다락으로 오르는 입구가 보인다.

    가파른 나무 계단.

     

    정정하신 아버지를 도와 열심히 짐을 나르다 보니

    나 혼자였다.

    아버진 어디 가셨을까.

    한숨 돌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애초에 혼자였던 건 아닐까.

     

    내가 고달픈 아버지였다니..

    곁에 있던 한심한 녀석은

    내가 아니라 나의 아들.

    그런데 전혀 다행스럽지가 않아.

     

    어떻게 저런 놈이 아들일 수 있지?

    녀석이 나일 때가 차라리 나았다.

     

    다 큰 자식 어쩌지 못하고 끙끙 속앓이만 하셨을 아버지.

     

    아무 짝에 쓸모없는 놈, 꺼지라 해서 꺼졌나. 가슴 한편이 짠하다.

    아버지였다가 나였다가.

    나였다가 내 아들이었다가. 애물단지들..

     

     

     

    별생각 없이 까먹던 삶은 계란들의 흔적이 침대 귀퉁이에 남아 있다.

    무심코 하나를 드니 힘없이 부서지는 껍질.

    썩어 곰팡이 투성이인 그 속에 깃털이 보인다.

     

    설레는 가슴이 예사롭게 기적을 찾아 담요를 뒤적인다.

    이불을 들춰 괴이한 생명체를 발견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병아리로 변하였다가 다시 강아지가 된다.

     

    눈물겹도록 사랑스러운 내 강아지.

    활달하게 짖지도 못하고 시름시름 누워만 있네 침대가 아니라 비에 젖은 차가운 도로 위에.

     

    냉혹한 캐딜락이 강아지를 무시하고 전후좌우로 몇 번을 움직이다

    쌩하니 가 버렸네.

    나는 지켜주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았네 침대에서.

     

    바퀴에 으깨질 참혹한 운명을 상상하며 얼굴을 찡그리는 게

    내가 할 전부였네.

     

    차바퀴는 용케도 강아지를 피하고 제 갈 길로 사라진다.

     

     

     

    어느새 나의 침실이 다락 속에 들어와 있었다.

    다락에 세 살러 들어온 가족이 나에게 감사를 표한다 침대를 줘서 고맙다고.

     

    허름한 침대지만 아쉬워 작은 베개 하나를 들고 나왔지.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감이 멀어 잘 들리지 않는다.

    무척 반가워는 하는 것 같은데 소리가 너무 작아 정확한 내용을 모르겠다.

    내쪽에서 하마 하고 끊었다.

     

    이번에는 번호가 여간해서 생각나지 않는다.

    어째서 발신자 표시가 안 뜨는 걸까.

     

    사랑은 분명 어디쯤에 있으리라.

     

    휴대폰을 뒤지는지 수첩을 뒤지는지 구분이 안 된다.

     

    화려한 액정은 초라한 추억으로 바뀌어

    철없던 청춘의 상념들을 빼곡하게 드러내었다.

    치기어린 정염의 흔적들이 아라비아 숫자로 얼룩져 있다.

     

    낡은 종이들을 얼마나 들추어야

    볼펜 자국 선명한 그녀가 나올까.

     

    아아, 액정에 사랑이 또 한 번 왔다. 문자인 듯 그림인 듯

    그녀의 그리움이 초조한 설렘을 흐느끼게 하였다.

     

    만나자 한다.

    그녀 있는 곳으로 당장 오라 한다. 나도 한 때 살던 그곳으로..

     

     

     

    화면 속에 친숙한 공간이 보인다.

    그녀의 마을이.

    그녀의 거리가.

     

    서둘러 이동할 채비를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분주하게 서둘러도 그저 황망할 뿐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이것저것 옷을 골라 봐도 좀처럼 성에 차지 않았다.

    그냥 훌쩍 떠나면 되는 것을 무에 그리 준비가 많은지.

    마음이 바쁠수록 마무리할 건덕지는 자꾸만 생겨나고..

     

    고통스러워도 훌훌 털어버릴 수가 없네. 날은 저물어가는데 이 미련한 놈.

    그녀를 못 만날까 슬퍼 눈물이 나도

    하던 준비를 멈출 수 없었네.

     

     

     

    약속 시각은 어느덧 지나 있어

    포기하고 쓸쓸히 집 앞에 섰을 때

    석양으로 붉어진 골목 어귀에서 하나뿐인 친구가 나타났다.

    그리고

    죽은 지 십 년이 넘었어도 무덤이 어딘지 모르는 무정한 친구에게 다가왔다.

     

    그리워할 자격 없이 감히 널 애도하며 불현듯 목놓아 울어도

    괘씸하여 꿈에조차 안 나오던 친구가

    어인 일로 나를 다 찾았을고.

    너마저 그리 가고 외톨이로 남은 나를,

    더는 외면할 수 없더냐.

     

    앙상한 서글픔을 다스하게 바라보는 넌

    오호라 연민의 정령이로구나.

     

    이 헛헛한 손 잡아끌고 어디로 가려하니.

    오랜만에 술이나 하자는 거니.

     

    언제나 조용히 정다웠던 넌,

    힘들면 염치없이 내밀던 손, 뿌리치지 않고 진지하게 잡아주던 넌

    지금도 여전히 내게 희망을 주려는구나.

     

     

     

    그와 함께 접어드니

    골목은 간데없고 노을 물든 신작로였다.

     

    그녀가 열심히 일하며 사는 동네.

    작지만 활기찬 도시.

    나의 힘겨웠던 기억.

     

    가벼워 방방 뛰던 젊은 운명이

    삶을 얕보고 사랑을 얕보다 큰코다치던 곳.

     

    완강히 밀치던 그녀의 이유 있는 냉랭함이

    아직도 톡 쏘는 향취를 머금은 곳.

     

    어울리는 사랑을 만나 소박한 행복으로 현실을 위로하는

    그녀의 현명함이 시럽처럼 끈적이는 곳.

     

    발랄한 무지가 긍정을 뽀얗게 바르고 배시시 웃어 가꾸는 천국.

     

    그래서 가기가 두려웠던 곳.

     

     

     

    그곳의 유능한 아름다움이 마법을 부린 걸까.

     

    생전에 차를 몰아 데려다준 적 있는 이곳.

    이렇게 죽어서까지 잊지 않고 데려왔구나. 고맙고 면목 없네 친구.

     

    동행해 준 친구는 가고 없지만

    친구처럼 나를 초대한 그녀가 있지.

    이곳 어느 찻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키우면서

    동시에 사회를 겪으면서,

    괴팍한 아픔을 너그러이 이해할 만큼 완숙한 어른이 된 것일까.

     

    아니면

    소박한 행복이 감당하지 못하는 쓰라림을

    그녀도 드디어 갖게 된 걸까.

    그리하여 소싯적 이질감이 동병상련으로 탈바꿈하였나.

     

    혹은 밋밋한 세월이

    그다지 이쁘지 않던 기억에도 달콤한 추억의 은총을 내려준 걸까

    풍요로운 권태가 훈훈한 호기심을 동하게 할 정도로.

     

     

    만에 하나 그녀가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실은 처음부터 내가 싫진 않았는지도. 다만..

     

    박력 없는 우유부단이 결국 그녀를 놓치게 된 것이지.

    받는 사랑에 익숙한 어여쁜 처녀의 자존심은,

    믿음을 주는 확실한 사랑과 맺어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녀의 넉넉해진 사랑이 대범하게 범위를 넓혀

    집착에 가깝던 강퍅한 외사랑까지 접수하기로 마음먹은 걸까.

     

     

     

    모성애 넘치는 건실한 생활인을 모독하는 발언은 말자.

    개연성 미미한 것에 희망을 품는 경솔함은 후회를 불러올 뿐.

     

    그래도 기왕지사, 나란 놈이 뱉어낸 상상은 자유.

     

    이 네 가지 가설들, 어차피 다 기적과 다름없네.

    썩어 버린 삶은 달걀 속에서 병아리가 나오는 그런 기적.

    (앗, 내게 그것은 기적이 아니었지.)

     

    날 닮아 그리 생겨먹은 짐작들

    다 맞으면 어떻고 다 틀리면 어떠랴

    그녀의 부름 받아 나는 이미 여기 왔으니.

     

    합리를 신봉하던 그녀가

    많이 늦는 나를 탓하지 않고 기다림을 즐기니.

     

    적당한 도도함이 매력이던 그녀가

    겸손한 기쁨을 수수하게 차려입고 천진한 반가움을 살뜰히 준비했으니.

     

     

     

    사랑해서 만나고, 만나서 사랑하는 세상 속에

    우린 있지 않은가.

     

    사랑해서 혼령이 나에게 오고 내가 혼령과 함께 가는

    세상이지 않는가.

     

    선명한 이유가 필요 없는 세상,

    그녀의 마을만 빼고 언저리가 온통 흐릿해서 좋은 세상을, 유유히 거닐며

    "화사한 그녀만 빼면 언저리가 온통 희미한" 찻집으로 갔다.

     

     

     

    생동하는 과거가, 변함없이 고운 자태로 앉아있다가 나를 보고 귀엽게 웃는다.

     

    그래, 인색하지만 가끔은 내게도 나눠 주던 저 미소가 좋았지..

    사랑하는 이유를 굳이 대자면 그 정도?

     

    생각해보면, 그녀가 느끼게 해 준 슬픔은 참 포근하였어.

     

     

     

    볼수록 참한 과거를 맘껏 사랑해도

    엉살궂은 현재한테 죄스럽지 않은 곳.

     

    배경을 사랑해도 피사체가 시샘하지 않는 곳.

     

    이곳에 영원히 머물고 싶다.

     

     

     

    추억의 단아함을 유지하려 애쓰는 안쓰러운 기적이

    다소곳하게 녹차를 마시는 정경.

    사랑해.

     

    곱살스런 나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그녀의

    어린 상식을 사랑해.

     

    매혹적인 그녀를 사랑하는 관능적인 나의

    투박한 욕망을 사랑해.

     

    이곳에선 어떠한 사랑도 가능한,

    그녀와 나의 다채로운 상념을 사랑해.

     

     

     

    지독하게 애잔한 이별이 변화무쌍하게 변이 하여도

    변형하는 그녀와 변형하는 내가 다양한 시나리오로 대응하는 재회들.

     

    다 알아도 사랑만 몰라서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하기엔 너무 차갑고 이기적이라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하기 힘든 변수들 투성이로 태어나 사랑하지 못하여도

    여기서는 아주 쉽게 사랑할 수 있지. 좋아했던 여인과..

     

     

     

    사랑이 연구되지 않는 곳.

    숨 쉬는 자체가 사랑인 곳.

     

    그녀가 숨 쉬는지 그녀의 마을이 숨 쉬는지 분간하기 어려운 이곳을

    죽도록 사랑해.

     

    이곳에 남아

    그녀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것이

    죽도록 사랑하는 방법.

     

    그녀의 마을과 결혼하여 떠나지 않는 것이

    사랑하며 죽는 방법.

     

    이 방법을 사랑해.

    어찌할 도리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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