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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교정(校庭)을 거니는 고독
    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2. 12. 10. 18:44

     

     

     

     

     

     

     

     

     

     

     

    무엇이길 바라던 맹랑한 시절이 있었지.

     

    현실도피가 추하지 않은 애교이던

    파릇한 때가 있었지.

     

    속속들이 아는 운명이

    야무진 착각을 귀엽다 방관하던

    실(實)한 허송(虛送)이 있었지.

     

    무능한 아이가 영민한 척을 하여도 다들 속아 주던 시절,

    어떻게 살까 무엇을 할까 안락하게 고민하던

    곱살한 때가 있었지.

     

    속됨과 고상함 둘 다 싫어 고립을 자초하던 미련함이

    청춘에 겨워 쏟아내던

    어설픈 그리움이 있었지.

     

    곧 발현될 사랑지체(遲滯) 디엔에이 탓에 사랑을 꿈꾸면 슬퍼지던 시절,

    생활하는 여인의 어여쁨을 경직된 관념으로 치장하여

    혼자서 끙끙 앓던 어색함이 있었지.

    애처로우나 감미로운..

     

     

     

     

     

    반듯한 액자 속 소박한 추상화를 비웃으며 현실과 충돌하던 용기(勇氣)들은,

    비겁에 치를 떨며 정의를 과시하던 풋내기 열정들은,

    순진한 무지(無知)보다 몇 발짝 앞섰던 에너지만큼

    훗날 삶에의 애착도 충만하였으리라.

     

    자신들이 이끄는 현실인데 그것과 타협하고 융화한들 누가 뭐라 하랴.

     

    더 나아가지 못하고 딱 그만큼 행동한 지성들이었으니

    그 범위 안에서 혼탁을 허용함은 당연하리라.

    현실을 지탱하는 생명수로서의 혼탁을..

     

    이상(理想)을 적당히 주도했으면 현실도 적당히 주도하시기를. 부디..

     


    겁 많은 소심함이 탄로 날까 두려워 냉혈한 이기주의자로 행세한 바보가

    그대들은 그리도 얄미웠소?

     

    "분연히 떨치고 일어서 선각 열사가 된" 그대들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이, 그리 분통 터질 일이었소?

     

    공포를 이기고 항거한 그대들과

    공포에 굴복하여 숨어 버린 못난이가,

    오로지 동기(同期)란 이유로 무조건 동급이어야 했소?

     

    거룩한 의무를 팽개친 자는 정녕

    그대들의 적보다 사악한 구제불능이오?

     

    "그대들이 논리적으로 껴안던" 민초(民草)만도 못한 필부(匹夫)이거늘,

    가엾이 여기는 넉넉함을 베풀기엔

    그가 너무 그대들 가까이 있었던 거요?

     

    대쪽 같은 혈기 방장이 준엄히 꾸짖을 희생양을

    곁에서 발견하여 좋았소?

     


    불의를 거리낌 없이 질타하던 기운은,

    영악한 현명함으로 승화하여

    세월이 주는 허무를 거뜬히 막아내고,

     

    되고자 함의 거침없는 추진력으로

    "실체가 존재에게 가하는" 흔들기를 초반에 제압하고,

     

    "재단된 시간의 무늬로 채택된" 죽음을

    숨이 멎을 그날까지 경멸하고..

     


    그렇게

    건강하고 풍족한 세상을 가꾸어온

    그대들 덕에 내가 말라가오.

     

    당당하게 선하고, 세련되게 도덕적인 그대들을 인생의 승리자라 칭송하고

    지난날의 부덕(不德)을 참회하는 만큼

    나는 사라져가오.

     

    인정하오.

    그대들이 옳았소.

    내가 틀렸소.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나는 논할 자격이 없소.

     

    무엇이 아닌 것인지 깨달으려면, 나는 아직 멀었소.

     

    기본이 아니 된 나는, 깨달아 봤자 소용이 없소.

     

    그대들이 이대로 굳어져도,

    깨달은 나보다 나을 거요.

     

    부족하고 어리석은 나는

    그대들 수준에 도달하기조차 힘이 드오.

     

     

    다 가진 그대들이 깨달아야

    "내가 살만한" 세상이 되오.

     

    여태껏 그래 왔듯 적당히라도 깨달아주오

    제발이지..

     

     

     

     

     

    치밀한 대세(大勢)가 평화를 급조한다.

    그것으로도 만족하는 용기들, 열정들이

    배정된 자리를 지키고

    작심하여 어른이 되어간다.

     

    현실을 걸친 음험한 평화는

    감춰둔 송곳니로 추상화만 골라서 찢으려 든다.

     

    대세의 평화에 겁먹은 외톨이는

    반듯한 캠퍼스에 액자를 묻어두고 도피로 질주한다.

     

    액자 없이 자유로운 불안한 추상은

    천진한 긴장 속으로 달아나

    푸르른 부조리를 덮고 이 년 반 동안 곰삭는다.

    그래 봤자 추상화라는 걸 알기에..

     

     

     

     

     

    다시 찾은 캠퍼스에서 안도할 수 있는 것은,

    독 올랐던 용맹들이

    황금 액자 하나씩 꿰차고 출세를 향해 정진하느라

    순진한 무지를 알아보고 무식한 순수를 비난하는 짓에

    더는 관심을 두지 않아서라네.

     

    독가스 같은 평화에 중독되어 퇴락한 열정들이

    도서관을 점령하여도,

    그들 속에 파묻힌 동상이몽은 포근하기만 하였지.

     

    꼬나보는 이 없어 기쁜 추상화는

    치열한 무관심들 틈에 앉아

    이 년 반의 자기모멸로 절도(節度) 있게

    "다시 꺼낸 액자"를 닦았지.

     

    나아감을 포기하고, 다가옴을 기대한 아이는

    액자의 생채기만 닦아낼 뿐

    찬란함을 덧입히진 않았지.

    그러나

    자신들의 반듯한 액자에 열심히 금칠하는

    공붓벌레들이 사랑스러웠네.

     


    정물과 풍경 그리고 크로키로 떠밀리기 전의 마지막 해,

    매서운 미래에 긁혀 상처 난 추상화는

    죽음에 대한 공부에 원 없이 빠져볼 수 있어 행복했었지

    다들 행복하게 살려고 공부하는 그곳에서.

    나태한 절망이 턱없는 희망에 마취되어

    칠 년째 다니던 그곳에서..


    차가운 자비(慈悲)가 다스리는 삶은

    구획이 심하여 멀미가 나.

     

    상냥한 죽음이 다사롭게 감싸야 자비에도 화색(和色)이 돌겠지.

     

    번잡한 세상에선 반드시 구겨질 추상화를

    영원히 약동하는 죽음으로 말끔하게 다려 보고 싶었어.

     

    삶을 구원할 듬직한 죽음.

     

    죽음 같은 삶.

    삶 같은 죽음.

    한 데 어우러져 아름다울 조화.

     


    깐깐한 "가야 할 길"을 벗어난 짜릿한 헛짓이

    실속을 놀리며 즐겁게 외로웠었지.

     

     

     

     

     

    진물이 번져,

    구체적인 무언가로 자꾸만 형상화되고 있었어.

     

    추상화답지 않아 불편하였지만

    소박하게 피어나는 어여쁨이 싫지만은 않았어.

     


    전면(前面) 유리창이 캄캄해지고도 두세 시간 지나서야,

    도서관을 나왔지.

     

     

    검은 외투를 펄럭이며 다정하게 협박하는 밤하늘,

    태고(太古)의 현존(現存)이,

    정수리를 간지럽혔어.

     

    그럼에도,

    융통성 없는 가을은 엄격한 대지를 품고

    보헤미안들의 수줍은 기습을

    볼통스럽게 저지하였지.

     

    미지의 존재로부터 지령(指令)이라도 받은 양

    가을은 냉정한 대지를 부지런히 누비며,

    총총히 빛나는 무수한 하강을

    보는 족족 부러뜨렸지.

     

    그래서일까

    득의양양 뻗어 있는 대로(大路) 끝의 정문이 참 멀게 느껴졌어.

     


    천지의 복잡한 힘겨루기가

    복잡하게 까놓은 인물화들.

     

    똑똑한 그들도 잠을 자러 돌아가는 시각,

    상한 추상화는 단순하게 변형되어

    흐릿한 그리움의 눈 코 입이 되었지.

     


    상큼한 샴푸 향을 남기고 스치어가는 아득함이

    처량한 애심(愛心)을 가볍게 건드려

    보푸라기가 일었지.

     

    "멀어질수록 다가오는 생동(生動)"이 느꺼워,

    달뜬 쓸쓸함은

    싱그러운 생활의 뒤를 밟았지.

     

    씩씩하게 걷는 긴 머리 연민을 쫓아 정류장에 섰어.

     

    추상화에 묻어난 아담한 사랑이 버스에 올라도,

    거기까지만.

     

    희미한 얼룩을 따라 짙게 움직여지지가 않았었지.

    해쓱한 휴지기(休止期)는

    발정한 "인연의 왕성함"이 민망하였던 게야.

     


    그때

    어묵 삶는 국물의 구수한 내음에 섞여

    심금을 울리는 무심(無心)이 울컥 흘러나왔어.

     

    포장마차에 걸린 낡은 라디오가 흥얼대던

    단조.

     

    "무엇이길 바라며 착실하게 허송하는" 젊음이

    따라 부르던,

    맛깔스러운 비애.

     

    무엇이길 바라던 아련한 무계획은,

    짜여진 음률을 타고

    얼큰한 중력을 거슬렀지.

    애처로우나 감미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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