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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레지이상한 병사 (상준 외전) 2022. 11. 13. 21:05
중대 꼴통 정하사가 나를 불렀다.
전일병 이누무시키 후후,
이병 딱지 떼니까 정신없던 아랫도리가 슬슬 기지개를 켜지?
엉덩이를 워커 발로 툭 치며, 이제는 익숙해진 능글맞은 농지거리를 어김없이 던진다.
널 이뻐라 하는 이 정하사가 오늘 인심 한 번 썼다. 오늘 나하고 외출이다.
지금부터 5분 준다. 후딱 준비하고 행정반으로 칼같이 튀어왓!
싫다. 귀찮고 피곤하다.
그에게 구속 되어 하릴없이 다리품을 판 경험이 저번에도 있던 터라 그렇고
당시 눈치없이 그를 따라나섰다 복귀 후 소대 내에서 호되게 당한 후환 때문에라도 그렇고
무엇보다, 주인 잃은 초췌한 그리움이 산발하고 돌아다닐 읍내에 난 더 이상 나가기가 두렵다.
토요일이지만 오늘은 우리 소대에 특별 사역이 할당돼서 말입니다..
어쭈구리, 그래서 특급하사 정하사의 명령을 어기시겠다?
짜샤, 시방 이 정하사의 빽을 무시하는 거야?
순진하게 그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었다간 지난번처럼
상병선 고참들의 정겨운(?) 갈굼과 구수한 한따까리로부터 헤어나지 못할 게 뻔하다.
이번 외출은 저번과는 차원이 다를 걸?
상상하는 것 이상을 맛보게 해주마. 클클..
상상하는 것 이상 좋아하시네.
그의 빈약하기 짝이 없는 상상은 늘 내 현실보다 못하여 실망스럽다.
사타구니 벅벅 긁어가며 의무대로 약 타러 다니느라 호랑이 대대장한테 번번이 깨지는 주제에
또 이러고 싶을까..
김마담, 안 본 사이에 왜 이리 이뻐진 거야!? 여잔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는데 아무래도 수상해..?이거 이거, 그간 몰래 숨어서 어떤 골 빈 군바리랑 서방질이라도 한 모양이군 그래..
옆에 찰싹 달라붙는 20대 젊은 마담의 육덕진 둔부를 스스럼없이 주무르며 정하사가 처음 건네는 말이다.
간만에 나타나서 왜 이러셔? XX부대에 자기보다 골 빈 군바리가 있을까.
그게 날 뻑가게 한 자기 매력인데 조강지처 목 빠지게 해 놓고 이제 와 한다는 소리하곤.. 쯔쯔.
싸구려 커피나 파는 다방 년 순정은 요렇게 무시해도 되는 거야 뭐야. 호호호.
허허 쏘리. 되로 주고 말로 받는군.
근데 오늘 달고 온 요 젖비린내 나는 신출내긴 누구신가?
여자깨나 울렸을 곱살한 얼굴 하며.. 후훗.
슬슬 군바리 킬러의 본색이 나오시는군. 그만 껄떡대고 새로 왔다는 막내나 불러봐.
우리 구여븐 전일병 일병 단지도 꽤 됐는데 내가 가만있을 수 있나. 특별 경험 좀 시켜주러 델꼬 나왔지.
글씨 요놈이 겉은 이래 멀쩡한데 아직이라잖아. 딱지 떼기엔 김 마담 아지트만 한 데가 어딨겠누.
참나 어련하시겠수. 누가 군바리 킬런지 모르겠네.
근데 막내 들어왔단 소문이 그새 거까지 돈 거유? 하여간 군바리들이란..
설마 신참 핑계 대고..?
어허!
늘봄 다방이 읍내에서 가장 유명한 게 다름 아닌 김 마담 미모 때문이란 걸 내가 누구보다 잘 아는데
한 눈을 팔 것 같아?
요리 사랑스런 마누랄 두고 딴 맘을 먹으면 천벌 받지 천벌 받아!
이그, 말이라도 못하면..
맘에 없는 말인 줄 알면서도 기분은 좋네.
정말이지 내 눈에 콩깍지가 씌긴 씐 모양이야. 나오는 족족 이쁜 말만 내뱉는 요 사랑스런 입을 어찌해 줄꼬.
내가 보는 앞에서 둘의 거리낌 없는 애정 행각이 연출된다.
이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젊은 남녀의 진한 키스를 리얼하게 목격하는데도 별 감흥은 없다.
그렇다고 이들의 싼 티 나는 행동이 역겹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시골 다방의 딱딱한 소파가, 리얼한 소프트 포르노를 보며 편하게 흥분할 수 있는
내 안락한 침실이 아니어서도 아니다.
그러면 왜일까.
알고 싶지 않다. 나는 깨닫기를 거부한다. 이곳에서는.
난 감정이 메말라도 상관없다. 이곳에서는..
감정이 메말라야, 여유가 없어야 견딜 수 있는 이곳의 생활에 만족할 뿐이다.
감정을 포기하고 인간이길 거부해도
돌아 버리지 않고,
굳건한 정체성의 요새 안에서 당당하게 거들먹거리며 숨 쉴 수 있는,
이 곳 삶이 내겐 차라리 천국이다.
해란이 배달 나갔걸랑. 올 때가 됐는데..
얘 유양아, 해란이 몇 시에 나갔지?
뭐 괜찮아. 점오 전까지만 들여보내면 되니까.
막내 기다렸다가, 오면 전일병 막내한테 맡기고
우린 잠깐 나가서 회포나 풀자고.
한창 바쁠 시간인데 어떻게 시간을 빼?
요런 앙큼한..
내 육봉 맛에 중독된 주제에 튕기기는..
알았어 오랜만에 기분이다. 옛다! 티켓값 따블 오케?
아잉 몰라..
참, 오빠 거기 이제 다 나은 거야?
에라이 빨리도 묻는다.
이게 누구 때문인데, 지금 고양이 쥐 생각 허냐?
쳇!
그러게 장화 덮자니깐, 감 떨어진다고 내 말은 죽어라 안 듣더니..
오빠, 늘봄에 첨 왔구나.호호 긴장 풀어 안 잡아먹을게.
댁은 몇 살이라서 초면에 말을 싹둑 잘라 드시나요?
그리고 나 댁 같은 여동생 둔 적 없어.
에혀, 또 깐깐한 도련님이신가.
아무리 짬밥에서 밀려도 그렇지 나름 공중전까지 겪은 몸인데
이거 언제까지 길이 덜 든 애송이들만 상대해야 해? 아후 짜증 나. 날은 점점 더워오고..
낫살 처먹을 만치 먹었거든요?
열아홉이면 이 계통에선 기본이 이삼 년이걸랑요?
짐작이 맞았네요.
화장이 아무리 진해도 티가 납니다. 내게는..
눈 아래위 마스카라가 유난히 굵고 짙은, 그녀의 도드라진 화장법이
다른 다방 아가씨들과 비교해도 유별나 보였다.
150을 살짝 넘은 듯한 짤막한 키는 가뜩이나 통통한 몸매를 한층 더 부각했고.
그런데, 반쯤 드러난 풍성한 가슴팍을 망사로 살짝 가린 검은색 나시와
볼륨감 넘치는 궁둥이의 윤곽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검정 핫팬츠 차림이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균형 안 잡힌 체형이 주는 거부감 정도야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히..
건방진 우월감에서 비롯된 어쭙잖은 시혜 의식이 꼴같잖은 연민을 불쾌한 가래처럼 뱉어낸 것 같지도 않다.
만약 "야릇한 감흥"이 자기연민의 발로이자 그녀와의 어색한 동일시에서 출발한 거라면,
누가 손가락질하기 전에 스스로 이보다 낯 뜨거울 순 없으리라.
그냥 멍하니 반은 유체 이탈한 상태에서 내 속의 당황스러운 심리를 남의 일인 양 구경하는이 무기력함이 왠지 맘에 들뿐이다.
어느덧 집채만 해진 풍선들의 묶음을 쥐고 이제 막 붕 뜨기 시작하는
어린아이의 미묘한 심정이랄까.
무섭지만 들뜬, 즐겁지만 불안한..
어쨌든 이 야릇한 감흥의 정체를 캐고 싶진 않다. 그럴 여력이 없다.
그녀가 그리 과하지 않은 통통함으로 제법 농염한 관능을 발산하며 유혹함에도,
성적 호기심이 끓어오르지 않았다.단순 무식하게 돌진해도 아무도 뭐라 안 할 타이밍인데 나는 그러지 아니하였다.
단지, 스물둘의 방장한 혈기가 얼룩무늬 속에 갇혀 일정 기간 불감을 강요받아서일까.
그렇게, 난 아직 남자가 아니기 때문일까.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정하사처럼 될 수 있을까. 제대할 때 즈음이면 가능할까.
인간 나름이겠지. 그처럼 얼룩무늬 속에 숨어 기꺼이 개가 되는 부류라면 가능할지도..
사춘기 이후 나의 상념이 색정에 집착한 적은 많았으나
지금의 시점은, 음탕한 감행에의 욕망이 발화할 단계가 아니야.
적어도 이런 시골 다방에서 궁색한 상황 논리에 젖어 자존감을 초개와 같이 팽개칠 군번은 아니란 거지.
이토록 풋풋한(?) 상념이
한계에 봉착한 자기방어를 부수고 철면피적 변태로 육화 하려면,
최소 십여 년의 세월은 더 흘러야지 않을까.
일병씩이나 다신 아저씨가 왜 이러실까. 이건 뭐 갓 전입 온 이등병도 아니고 딱딱히 굳어서는..
오빠 앞날이 걱정된다. 이래서야 어디 군생활 잘하시겠어?
말조심해!
좀 솔직해 보셔.
가시나가 고파서 쫄래쫄래 고참 따라오셔 놓고, 이제 와 이러면 없던 체면이 생기나?
나야 쓴 커피나 팔면 그만이지만, 오빠 같이 융통성 없는 군바리 보면
괜히 오지랖이 넓어지고 싶어서 말야..
그래서 결론이 뭐요.
정하사처럼 아가씨 옆에 앉아 떡 주무르듯 주물러대지 않으니 그것이 불만인 겐가?
오해는 마요. 오빠가 맘에 드니까 오빠한테만 하는 말이야.
오빠 같은 젠틀한 샌님
그래, 손님으로선 대환영이지.
안 그래도 피곤해 죽을 지경인데 귀찮게 집적대면, 맘 같아선 확 다 때려 엎고 싶걸랑.
바로 꼬랑지 내리는 모습이 귀엽군..
그렇게 흘끔거릴 바엔 대놓고 보겠다 나라면.
군바리 쥐똥만 한 월급 쪼개서 큰맘 먹고 아가씨 보러 왔으면 당당하게 보란 말이야.
우리가 하는 일이 뭔데.
남자들 희롱받아내는 것도 내 주스 값에 포함된 서비스란 것, 잊으셨어?
요렇게 꽉 쬐는 핫팬티로 다릴 꼬고 앉았으니 사내 눈 돌아가는 건 당연하지.
점잖은 척은 나중에 휴가 가서 부모님 앞에서나 하시고
오늘은 맘껏 릴랙스 하시와요 서방님, 호호호.
누가 누굴 희롱하는지 모르겠네.
해란은 배시시 미소 지으며 맞은편 자리에서 말없이 일어나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무거워 보이는 엉덩이를 들이밀듯 풀썩 주저앉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빠가 안 오니 내가 가야지 어쩌겠어.
오빠 그을린 얼굴 속에 뽀얀 대학생이 보여. 오빠 가방끈 무지하게 길구나. 그치?
내 육감 무시하지 마. 수많은 사람 대하다 보면 반은 관상쟁이니까.
끈이 길면 뭐해. 실속 없이 여기 처박혀 세월만 죽이고 있는걸.
오빠 혼자 겪는 일은 아니잖아. 부모 잘 만나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 재수 없는 녀석들 빼고 말이야.
이 땅에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지 뭐. 그러고 보면 끌려온 군인 아저씨들 참 불쌍해. 자유를 저당 잡힌
대가가 고작 갈굼에 좆뺑이라니..
네가 자유를 다 논하는구나.
오빤 내가 오히려 불쌍해 보이는 모양이네. 아직 사제 물이 덜 빠졌단 증거야.
나에 대한 음침한 편견은 버려. 설마 깡패한테 잡혀 이곳 촌구석까지 팔려온 비참한 노예로 보는 거야?
노노! 적어도 난 아니야. 난 자유로워. 언제든 여길 뜰 수 있다고요. 그러니 자유 어쩌고 할 자격 있는 거지.
상상이 가. 오빠의 가냘픈 목선과, 보드라움이 남아있는 손을 보면..
전역하는 그날까지 백 프로 군생활 적응하지 못하리란 게..
이러지 마. 네가 왜 날 만지는 거야?
그럼 오빠도 만져.
자아 이렇게, 어서..
한 층 과감해진 그녀는
내 팔을 가져다 자신의 목에 두르고, 내 손을 가져다 자신의 하얀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여성 특유의 매끄러운 지방질이 주는 (살갗의) 탱탱한 감촉이,
낄 데 안 낄 데 구분 못하고 눈치 없이 찾아든 서글픔을 전율케 하였다.
여전히 읍내를 헤매고 다닐 실성한 그리움이,
자신을 찾지 않는 주인을 원망하며 모호한 저주를 퍼붓는 동안.
아저씨들 얼마나 힘들고 외로우면
사회에선 쳐다도 안 볼 이 촌스러운 다방을 수시로 드나들겠어?
그닥 이쁘지도 않은 반 갈보 년들 한번 안아 보겠다고 껄떡거리는 모습들 보면 어째 좀 짠해, 우리가 봐도..
덕분에 부대 근처 다방 레지들 하나 같이 공주병 걸리게 생겼으니 이것도 부작용이라면 부작용일 테지.
개중에 주제 파악 못하고 지 잘난 줄 알아 도도함이 하늘을 찌르는 년 꼭 있어요. 아주 밥맛이라니깐.
그래 봤자 티켓이나 끊으며 돌아다니는 주제에..
그런데, 혼자 오거나 무리 지어 오는 아저씨들 중에 이병이나 일병을 본 기억은 별로 없네요.
오빠처럼, 친한 왕고참이 데리고 오는 경우가 거진 다였던 것 같아요. 그걸 특별 케이스라 하던가..
그렇담 오빠도 특별 케이슨가 보죠?
일병 때까지는 대부분 눈치껏 피엑스나 드나들지. 단 것을 향한 열망이 욕정을 마취시킨다고나 할까.
개인차가 있겠지만 보통 꺾어진 상병 짬밥은 되어야 여색에 눈을 뜨는 것 같다.
애인이 있고 없고는 중요치가 않아. 오입이 간절한 동물적 욕구가 - 군바리의 단발성 행사로서 - 다방 경험을
통과의례화하는 거지. 늘봄에 출근도장을 찍다시피 하는 정하사의 경우는 특이한 케이스이고.
병사 출신이라 하사관이 되고 나서도 왕년의 버릇을 탈피하지 못하는 것일까. 약혼자가 엄연히 있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이를테면 그런 셈이지.
난 아직 네 탄력 있는 허벅지보다 이 달달한 코코아가 더 당기는 짬밥이니까
내가 여길 혼자 찾아올 정도로 껄떡대려면 국방부 시곗바늘이 한참은 더 돌아야 해.
푸웃, 싱거운 농담도 할 줄 알고. 오빠 완전 젬병은 아니네?
사정이 그렇다니 해란이 보러 자주 와달라고 조르기도 뭣하다. 그죠?
일병 땐 원래 나오고 싶어도 잘 못 나와.
군생활 우리만큼이나 훤히 꿰고 있는 네가 그걸 모를 린 없을 텐데?
할 수 없죠. 오빠 상병 빨리 달기만을 손꼽아 기도하는 수밖에..
참나. 오늘 첨 만나 놓고 변죽도 좋아요. 막상 그때 돼서 다시 오면 얼굴도 기억 못 할 거면서..
누가 널 막내라 하겠니 장사 수완이 이렇듯 보통이 아닌데.
별 볼 일 없는 레지라고 노골적으로 개무시 모드네.
칫, 삐쳤어. 내 맘도 몰라주고..
뭐야, 나 사과할 짓 한 거야? 미안.
노력은 해볼게. 하지만 너무 기대하진 마.
상병 되고 병장이 되어도 난 체질상 여길 자주 들락거리진 못할 것 같다.
으이그, 솔직하지 않아도 될 부분에선 또 너무 솔직해 탈이구먼. 하여간 못 말리는 아쟈씨!
(방금 쥐 잡아먹은 듯) 새빨간 입술을 앞으로 귀엽게 오므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모습이
꽤나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문득,
(통통한 몸매에 뒤질세라) 도톰하게 살이 오른 그 입술을 훔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자세로 그녀의 입술을 주시한 시간이
불과 2,3초를 넘지 않았다고, 나는 지금도 확신한다.
그 짧은 시간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빛은
내 눈동자 속의 탄식하는 갈망을 놓치지 않았다.
"바보!"라는 짧은 한 마디와 함께 그녀의 비옥한 입술이 내 마른 입술과 닿았다.
사춘기 이후로 처음 해보는 이성과의 입맞춤이었다.
그것은 기쁨으로 요동치던 기괴한 절망.
당시 내가 처한 상황과 입맞춤 장소, 입맞춤 대상이 비장하게 어우러져 선사한
지독한 환상이었다.
입술과 입술이 어설프게 닿아 있던 시간도 겨우 2,3초 정도가 아니었을까.
불편한 두근거림을 서둘러 마감하기 위해 황급히 입술을 떼려는 순간
그녀의 통통한 손가락이 내 팔을 움켜잡았다. 동시에, 축축하고 물컹한 무언가가가 내 입술을 헤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태어나 처음 체험하는, 여인의 혀.
뜨거운지 차가운지 구분하기 어려운 그것의 느낌은 썩 유쾌하지가 않아서
결국은 완력으로 그녀를 밀어내어야 했다.
후후 처음이구나. 그동안 키스도 못 해 보고 뭐 했대?
진정하고 이리 와 봐.
키스는 원래 이렇게 하는 거야. 내가 제대로 가르쳐 주께. 응?
해란의 저돌적인 적극성에 어찌 대처해야 할지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우선은 피하고 보자는 결론에 도달한 난
곧 복귀해야 한다 얼버무리고
터미널 2층의 그 허름한 다방을 도망치듯 나와버렸다.
후일담.그날 이후 한 달 가까이 그녀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러나, 과도한 집착은 생존을 갉아먹을 수밖에 없는
터프한 폐쇄 공간 속에서
상념의 방기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고 이 또한,
푸르른 망각의 품에 익숙해진 내 무의식이 기꺼이 원하는 바였다.
물론, 소대 내부의 강력한 항의로 정하사의 "나를 대동한 외출"은 추후 금지되었으며
이것이 내게 어떠한 아쉬움을 유발하지는 않았다. 전혀..
상병 진급하고 보름이 지났을 무렵 우연찮게 읍내에 나갈 기회가 생겼는데, 공무 후 여유 시간.빙하가 녹으면서 갇혀있던 미생물이 다시 깨어나 활동하듯,
잊었던 그리움이 본능 행세를 하며
길들여진 군화에게 "늘봄"으로 향할 것을 재촉하고 있었다.
고작 한 시간이 주어진 촉박함 속에서 난 배달 나간 그녀를 기다리며,만나지 못함을 대비한 편지를 썼다.
결국 그녀는 시간 안에 오지 않았고 나는
나를 기억 못 하는 마담에게 그녀가 읽을 쪽지를 맡겼다.
또 한 달여가 흘러 부대로 답장이 날아왔다.날 잊지 않았다는 증거물을 받아 들고 멍하니 석양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키만큼 짤막한 내용의 안부 편지.
악필인 나와는 달리 귀엽고 올망졸망한 필체였다.
언제 한 번 시간 날 때 면회 오겠다는 추신을 신뢰하지는 않았기에
새삼 기대도 없었다.
내 손에 안착한 이 편지 속에서 그녀는 이미 나를 찾아와 웃고 있었으며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자세한 생김새는 뿌옇게 지워지고 강렬한 특징만 남아버린 그녀.
다시 봐도 서로 못 알아볼 우린, 그저
각자의 기억 모퉁이에서 고개만 간신히 내밀고 애처롭게 하늘거릴
희미함일 테지..
상병 달고 사 개월 만에 보직이 바뀌어 주기적으로 읍내를 다녀와야 할 상황이 되었다.다가가면 언제나 가슴 아린 애상의 상징, 허름한 터미널.
그 위에 자리 잡아 덩달아 가련한 Forever Spring.
난 그녀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너의 짐작과 달리 나 이렇게 곧잘 적응하고 있다고. 백 프로는 아닐지라도..
그러나 해란은 거기에 없었다.
배달 나간 게 아니라 영원히 사라지고 없었다.
새롭게 교체된 호리호리한 막내가 그녀의 부재를 실감 나게 하였다.
마담에게 물어보니 애인과 함께 두어 달 전 떠났단다.
그래, 그녀는 군바리가 아니었지. 그녀는 역시 자유로웠어.
네 말대로 넌 떠나고 싶을 때 떠난 게로구나.
한데 무턱대고 부러워할 수가 없다. 상승을 위한 떠남이 아니라면.
그녀의 떠남은 "무언가 되려 함"으로 향하는 떠남이었을까.
마음속 Forever Spring에 늘 머물고 마는, 이동하는 정체였을까.
어느 쪽이든 용기는 필요했겠지. 의지가 선택한 주도적 출발이었을 테니.
비쩍 여윈 하강이 두려워, 2년여간의 통통한 정지 속으로 불안전하게 숨어든 나.강제로 끌려왔듯, 기일이 차면 불확실성 속으로 내쳐질 난
불확실한 세상으로 떠나가 버린 그녀가 부럽지 않았다. 다만 그리웠을 따름이다.
그녀가 늘봄을 박차고 스스로 떠나간 후에야
나는 비로소 그녈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녀가 자아내던 희미한 그리움의 냄새가 아니라,
해란이라는 또렷한 대상을 그리워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늘봄 다방의 통통한 막내 아가씨는
내가 입고 싶은 또 하나의 군복이 되었다.
지방세포로 탐스럽게 표구된 절망이 한없이 매끄럽기만 하던
그녀의 하이얀 허벅지는
어느덧,
각 잡아 나를 가두고 싶은 또 다른 푸른 요새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