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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한 병사 (상준 외전) 2022. 11. 8. 00:14

     

     

     

     

     

     

     

     

    사는 게 왜 이리 서글프지?  공부도 이제 지겹고.

     

    적성에도 안 맞는 학과를 왜 선택했을까.

     

     

     

    스무 살이 넘어도 난 어린아이.

     

    집에서 등록금 내줘, 책 사 줘, 밥 먹여 줘, 하지만 용돈은 NO.

    그런데도 알바 한 군데 뛸 주변이 없으니.

     

    풍족하지 않지만 굶진 않으니 동기 부여 NO.

     

    취미가 은둔.

     

    몸만 어른, 정신은 중학생.

    대학과 고교를 구별 못해 학교는 따분할 뿐.

     

    몸은 자꾸 동하여 춘정을 주체 못 해도 여자 사귈 생각은 없고 제 손만 성가시게 해.

    여자를 뭣하러 사귀어라기 보단 사귀는 법을 몰랐지.

     

     

     

    여자한테라도 일찍 눈 떴으면 인간이 좀 되었을까.

    사회적 활동에 적극 나서는 생산적 인간 말이야.

    과연 그럴까. 달랑 여자 때문에?

     

    맘에 드는 한 여자만 찍어 주야장천 지극정성을 쏟았다면 이토록 외롭지는 않았겠지. 과연..?

     

    데이트 비용 충당하러 이리 뛰고 저리 뛰 다녔을까. 저 녀석들처럼 저렇게?

    도둑질도 해본 놈이 하는 것.

    그래 난 아니지 아니야. 죽었다 깨도 용 빼는 재준 없지.

     

     

     

    여태껏 참 쉽게 살았어. 할 게 없어 들입다 공부만 팠으니 원.

     

    머리는 평균 이하인데 공부 곧잘 하는 놈 소릴 계속 들으려니 죽을 맛이더군.

    집 안팎으로 어르신네들 몽둥이 들고 설치니 겁 많던 내가 별 수 있나.

    주리가 틀려도 꼴난 인내심 하나 믿고 간신히 버티는 세월이었지.

     

    한데 웃긴 건 등수 올리는 재미가 쏠쏠하더라니깐. 우물 안 개구리인 줄도 모르고..

    상위 몇 프로에 들면 어르신들의 음흉한 칭찬이 선사하는 특권 의식, 고것 참 중독성 있더군.

    천재들 뒤쫓느라 가랑이 찢어지고 과부하된 뇌에선 김이 모락모락 올라와도 고 맛에 참았지.

    공부만 잘하면 인생도 만사 OK라던 어르신들의 전략적 감언이설을 굳게 믿은 내 순진함도

    그 중독을 끊지 못하는 데 한몫하였고.

     

     

     

    어찌어찌 캠퍼스에 안착은 하였으나, 그러한 타성으로 인간적 성숙의 한 단계 상승을 기대하기란

    애당초 무리였지.

     

    적성이 뭔지도 모르는 판에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

    빛만 좋은 그럴듯한 학과를 고르긴 하였으나, 그것이 지옥의 시작이 될 줄은 꿈에도 짐작 못한

    프레쉬한 어리석음이었지.

    하긴 사이코 국어 담당 피하려고 엉겁결에 이과로 진입한 띨빵인데

    대충 점수 맞춰 들어가고 보는 경박함은 준수한 편이지 뭐.

     

    근엄하신 교수님네들은 그저 점잔 빼는 노땅 교사로만 보였고

    선후배 동기 학우들도 하나 같이 제 잘난 맛에 사는 거들먹 쟁이들 같았어.

     

    실제로 다 나보다 잘나긴 했지.  얼마 안 되는 정원임에도

    거시기 남쪽 학군 빵빵한 곳 출신들이 꽤 있었고, 지방 유지들의 자제라던가 등등은 차치하고라도

    우선 거의 모두가 내 위였으니까. 커트라인에 간신히 턱걸이한 놈이 나란 뜻.

     

    우물 안이긴 하나 한 때 떨거지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내가

    하루아침에 입장이 바뀌어 그 떨거지 신세로 전락하려니 기분 참 더럽더군.

    어쩌겠어. 못난 자격지심 어떻게든 만회해보려고 또 들입다 팠지.

     

    그러나 이번엔 녹록지가 않네 그려.

    전공 자체가 워낙 난해하여 나의 안이한 학습 방식이 한계에 다다르기도 하였거니와

    머리 좋은 녀석들의 비상한 두뇌 회전은 학년이 오를수록 빛을 발해 일취월장의 도약을 과시하였지.

    한마디로 첨부터 안 되는 게임이었던 거야.

     

    삼 년이 지나니 차이는 더욱 두드러지더군.

    두뇌가 이미 연구부에 적합한 구조로 튜닝되어가던 녀석들과 달리, 난

    가뜩이나 달리는 이해력의 전부를 쏟아부으며 무조건 외우고 보는 하수의 패턴을 탈피하지 못한 채

    근근이 학점을 높이는 데만 주력하였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내 알량한 역량은 요따위 어마 무시한 학문의 학부 수준을 감당하기에도 심히 벅차단 말쌈.

     

    사태가 이러하니 공부가 재미없고 따분하고 나아가 두려워질 밖에.

     

    작전 미스랄까. 체질 개선 실패랄까.

    공부의 높아진 차원에 적응 못하고 나가떨어진 셈이지.

    남 보기 꿇리지 않을 만큼의 학점은 겨우 벌어 놓았으나 거기까지가 끝이었어.

    중독은커녕 공부에 체했다고나 할까.

     

     

     

    말만 대학생이지 중학생이나 진배없는 자식을 집안 어르신이 중학생 다루듯 한 것은 당연한 일.

    한 손에 성적 통지서 다른 손엔 몽둥이.

    지난번보다 조금만 떨어져도 불벼락.

    당신 보시기에 대체로 만족이다 싶으면, 곪아 터지는 자식 속도 모르고 희희낙락.

     

    그래요. 기분 좋으시다니 다행이네요. 효도한 셈 치죠.

    이런 식이면, 십오 년간 학교라는 델 다니면서 나름 효도 적잖게 해온 셈이죠?

    그게 어딘가요. 뿌듯하네요.

    이렇게라도 합리화 안 하면 이 못난 놈 너무 비참해져요.

     

    그러나 이제 어쩌죠?

    앞으로는 더 이상 이처럼 손쉬운 효도 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그래서 안타깝고 두려워요.

     

     

     

    이래 봬도 명색이 대학생인데 이렇다 할 추억거리 하나 못 만들고.

     

    사람들과 담을 쌓고 학업을 선택한 결과치고는 참담한 편이었지.

     

    무엇이 더 중요했나를 논할 필요조차 없었지. 결국 무엇 하나 건진 것이 없으니..

     

     

     

    기본적으로 머리가 되니, 학점 관리에 여유를 부려도 언제든 나 정도는 수월히 제칠 수 있었던 저들.

     

    상대적으로 널럴한 학부 생활 실속 있게 운영할 융통성을 어린 나이에도 얄밉게 부릴 줄 알아,

    정의 수호라는 명분과 세속적 인맥 형성의 두 마리 토끼를 능란하게 획득해내는

    놀라운 수완을 발휘하였지.

     

    질긴 것들. 어디 가도 굶어 죽진 않을 독한 것들.

     

    솔직히 부럽지만 나로선 흉내조차 낼 수 없네.

     

    환경과 성격의 절묘한 조화.

    독립하여 스스로를 책임져야 할 그들은 살벌한 현실과 투쟁하는 전사.

    생존을 위한 본능과 영리한 두뇌가 재바르게 상호작용하는 그들의

    공통점은 활달한 자신감과 철면피적 숫기.

     

    아, 너무 완벽해도 징그러워. YOU WIN!

     

    조금은 열성인자가 섞였어도 패밀리의 재력으로 커버가 가능한 녀석들 또한

    여유작작하기가 둘째가라면 서럽지.

    신의 영역에서 병역까지 자체적으로 해결해버리는 족속인데 불안하고 조급할 게 뭐 있겠어.

     

    이들 두 부류는 의외로 융합이 잘 되더군.

    물론 전자의 유들유들한 수완이 후자와의 접착제 구실을 하기에 가능한 현상이지만.

     

     

     

    헤게모니를 쥔 선은 선 같지가 않아. 악을 재단하고 규정하니까.

     

    잘 먹고 잘 살아라 친구들아. 진심이야.

    엘리트가 되기 위해 그렇게까지 노력하는 너희들이 잘 되지 않으면 누가 잘 되겠니.

     

    너희들은 원하는 목표치를 달성해야만 비로소 너그러워지는 존재잖아.

    부디 잘 되어서 지금보다는 훨씬 너그러워지렴. 그리하여 나 같이 모난 놈 멸시하거나 배척 말고

    넓어진 마음으로 소수자들을 포용하는 아량을 베풀어 다오.

     

     

     

    이리될 줄 알았으면 맘껏 일탈이나 해볼 걸.

    독립하겠다 엄포라도 놓아볼 걸.

     

    에이 왜 그래 잘 알면서..

    집 안팎 어르신들에게 길들여진 넌 유약한 "애 (같은) 어른" 아니 "어른(인 척하는) 아이"잖아.

    네겐 그럴 배짱이나 용기가 없잖아.

    그런 면에선 넌 완벽한 열성이잖아.

    술 담배 여자 그 어느 것에도 너의 면역력은 젬병이잖아.

     

    그럼 그냥 순진한 아이 만나 순수한 연애라도 열정적으로 해볼 걸.

    중고등학교 땐 나 좋아해 주는 애들도 꽤 있었는데..

     

     

     

    NO NO 넌 사랑을 제대로 할 준비가 안 되었어. 아직 어리단 얘기지.

     

     

     

    소꿉장난 같은 아기자기한 연애를 원하나? 발랄해서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상대를 구하기 전에 너 자신을 돌아봐.

    지금의 넌 결코 그런 연애를 할 수 없어.

    너의 심연에 넓게 퍼져 자리 잡고 있는 우울감부터 없애기 전엔.

    너를 갉아먹는 막연한 불안을 다스리지 못하는 한..

     

    너에게 호감을 가진 여자들도 막상 널 가까이서 접하다 보면

    너의 이 이상한 기운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피하게 되지.

    철없던 소녀들 말고 성인이 된 여인들에게 네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가장 큰 원인이

    바로 그거야.

     

    외모적인 호불호를 떠나 너란 남성에 그녀들이 끌리지 않는 건

    바로 그 음습한 기운 때문이야.  네 인생과 혹은 인생 이전부터 함께 자라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져 버린

    그래서 너 자신도 이제 어쩌지 못하는.

    무의식에서 비롯되어 무의식을 휘젓는..

    개인이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천형과 같은...

     

     

     

    성격을 고치고, 사랑의 지평을 확장하고,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전문가가 되고,

    그녀를 위한 배려와 희생 인내를 키워도,

    근원적 우울함이 내재하는 한 네 사랑은 실패할 확률이 높아.

     

    이러한 근본적 문제가 우선 해결되지 않으면

    위의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실천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워.

     

    한편 애인에 대한 필요성을 크게 못 느끼고 여자를 만나야겠단 의지가 박약한 것도

    실은 너의 그 발칙한 음울함이 자가 진단하여 내린 예방책이리라.

    불행으로 종결될 소지가 다분한 사랑의 씨앗을 미연에 제거하겠다는 본능적 방어 기제랄까.

     

     

     

    널 숙주로 삼은 우울은 특이하여, 다른 여느 우울들과 달리 널 파멸케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악착같이 널 붙잡고 끝까지 너와 함께 가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선 넌 우울한 것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더욱 사악한 우울이다.

     

    이놈 때문에 넌 평생 사랑다운 사랑을, 주변에 널린 일상적 사랑을, 상식적인 사랑을

    할 수 없게 될지 모른다.

    이보다 더한 파멸이 있을까.

     

    살아 숨 쉬며 건재한 파멸.

    행복을 추구하는 파멸.

    불멸을 향하여 가는 파멸.

     

     

     

    그랬구나. 그런 처절한 핸디캡이 내게 있었구나.

     

     

     

    모든 면에서 나보다 우성인 녀석들아, 너희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세상의 어여쁜 여자들을 빠짐없이 쟁취하거라.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미녀들은 모조리 너희들 차지다.

     

    너희끼리 박 터지게 싸우고 경쟁하여 그녀의 선택을 받아라.

     

     

     

    절망적인 지금, 그래도 아직은 때 묻지 않은 어린 청년의 가슴이 설렌다.

    날 좋아할 소녀 같은 여인이 근처 어딘가 있나 보다.

     

    그녀를 찾으면 용기를 내어서 다가가리라.

    육감으로도 나를 경계하지 않는, 그렇게 초월하여 나를 이해할 여인이라면,

    박색도 마다하지 않으리라.

     

    그간 편리했던 이기심은 과감히 팽개치고, 그녀의 입장에서 그녀만을 배려해 보리라.

    나의 역겨운 우울이 실컷 비웃을지라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멋대로 휴학계를 내고 나서야 체증이 조금씩 내려가는듯하였다.

     

    내 학점의 눈물겨운 비밀을 알 길 없는 집안 어르신이 "공식적인 어리석음"을 몽둥이로 질타하여

    이미 그로기 상태인 나에게 최후의 펀치를 날리셨으나, 그 순간에도

    나의 영혼만이 알아주는 "비공식적 현명함"은 안도의 미소를 머금으며

    케 세라 세라의 푸근한 은총에 안긴다.

     

     

     

    실망하는 기대들의 눈총을 견디며 팔 개월 여의 멍청한 시간들을 소중하게 버렸다.

    후회? 개나 주라지.

     

     

     

    불안과 두려움이 한없이 증폭되어 나에게서 퍼져나갔고

    그리하여 공포는 세상과 하나가 되었다.

     

    세상이 된 공포는 태평한 나를 협박하였지만, 그것은 결정되어 객관화된 공포였기에

    나는 그저 편안할 뿐이었다.

     

    유치한 세상으로 투영된 내 불안은 우주의 크기만큼 확장하여 희석되었고

    따라서 너무 멀리 나아간 그것이 "코어인 나"를 다시 건드리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치명적이진 않아도 은은한 너울처럼 부딪쳐오는 그것의 후유증은 만만치 않아서,

    "결정된 공포"에 다다를 때까지 나는 긍정을 야기하는 어떠한 활동도 실천할 수 없었다. 사랑이든 일이든..

     

    그래도 개의치는 않는다.

    그것은 어차피 강력한 의지가 아니었고 단지 막연한 의도에 불과하였으니까.

    실현에 대한 집착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사랑은 "결정된 공포"로 들어간 이후에도 유효한 진행형일지 모른다는

    어렴풋한 믿음이, 나의 무기력을 탄력 있게 만들고 있다.

     

    사랑에 대한 근거 없는 예감이,

    결박되어 이송될 외로움을 팽팽한 기타 줄처럼 튕기고 있다.

     

     

     

    드디어 입영 영장이 나왔고,

    나의 상기된 우울은

    소풍 가는 아이처럼 들떠 강원도행 버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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