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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 바보..
    이상한 연애편지 (상준 외전) 2022. 11. 6. 20:00

     

     

     

     

     

     

     

    난 그간

    과거의 기억 속에 깊이 침잠해 있었던 것 같다.

    추억의 향기가 전신에 흠뻑 배도록 말이야.

     

    그 기억들은 지금 돌이켜봐도 아름다운 건 분명해.

    고통들이 드문드문 양념처럼 묻어 있는 일상사도, 세월이 지나면 애타게 아름다운 그리움일 뿐.

     

    그러니 당시의 한 부분을 장식한 너 또한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 될 수 없는 법.

    그러나 이것은 너에 대한 모독.

    실체가 아닌, 추억 속에 아른거리는 허상을 맹목적으로 그리워할 수 있기 때문이지.

     

     


    그래 난,

    네가 아닌 "널 향한 그리움"을 쫓았는지 몰라.

     

    따져보면, 기억 속의 그때에도 내가 널 직접 대면한 적은 없었고 오가며 어쩌다 스쳐 마주친 것이 전부였는데..

    수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 작위적으로 널 상상하는 것은 너무나 공허한 일인 것도 같다.

     

    연서라며 한껏 달떠 끄적이는 이 짓거리도,

    이쁜이 가면 쓴 공허함을 구체화하는 처절한 작업에 다름 아니지.

     

     


    십여 통에 가까운 편지를 너에게 보내는 동안, 널 향한 막연한 그리움은 조금씩 구체성을 띠고 사랑의 감정이 되어갔다.

    동시에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도 마련되어 작으나마, 진화하는 어른스러움도 맛볼 수 있었어.

     

    그런데 "사랑의 감정이 구체화된다"는 이 표현이 너무 조심스럽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은,

    너의 동의를 구하지 못해서일까..

    너의 실체를 접하지 못해서일까..

     

    여기서 한 번 더 못난 구실을 대자면, 이리 불안한 데엔 너의 책임도 무시할 수 없겠어.

    만나자는 제안을 할 때마다 넌 요지부동이었지.

    서로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들을 넌 번번이 거부하였어.

     

     


    두려웠던 거니?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나의 두려움은, 진짜 모습을 확인하고도 현실 속의 사랑은 변함없이 이루어지리라는

    근거 없는 기대감으로 곧잘 보강되곤 했어.

     

    그래서 거부했던 거니?

    몽상 속에서 휘청거리는 사람으로 단정하고 아예 상대를 하지 않을 요량이었니?

    스무 살 샌님의 뒤늦은 사춘기 투정을 하필 내가 왜 (무슨 죄를 지었길래) 받아줘야 하나 억울했던 거니?

     

    어디까지 가나 보자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겠지 하는 생각과는 별개로 남이 쓴 편지 읽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니

    만날까 말까의 결정은 무한정 유보한 채 - 심심하던 차 - 마냥 편지만 무심히 읽고 있었던 거니?

     

     

     

    이런!

    사람 마음을 맘대로 파악해버리는 고약한 버릇이 물색없이 또 나와버렸네. 미안하다.

     

     


    누가 뭐래도 추억은 아름다운 것.

    그러므로 넌 아름다워, 나의 추억이니까..

     

     

     

     

     

    자아, 솔직한 남자가 되어 고백할게.

    나의 고교 시절 넌 정말 귀엽고 어여쁜 여학생이었다. 외모가 말이야.

    난 단지 그 외모에 반했을 따름이야. 별 다른 거 없었어.

     

    그때의 단순한 감정을 이제 와서 업그레이드하려고 무던히 힘쓰는 내 모습이 우습지?

     

    네게 잘 보이고픈 욕심이랄까 남자의 알량한 자존심? 뭐 이런 것 때문에

    기운이 잔뜩 들어간 형이상적 단어들을 나열하면서 - 나로선 전혀 알 수도 없는 - 너의 내면을 미화하고

    외모보단 마치 그것을 더 좋아하는 양 연극하였던 것 같다.

     

    내 눈에 다른 여자애들보다 좀 더 잘나고 예뻐 보여서 경미 네가 좋아 미치겠었던 엄연한 사실을

    난 숨기려 노력했어.

     

    삼삼한 여자만 보면 침을 흘리는 수컷의 본능적 속성을 나 역시 지니고 있다는 게 수치스러운 나머지

    나만은 고고하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너에 대한 솔직한 느낌을 두꺼운 화장으로 치장했던 것 같다.

     

     


    진실은 한 가지.

    내가 너에 관해 알고 있는 거라곤 눈으로 본 너의 외모가 전부라는 것.

     

    경미 네가 못생겼다면 난 아마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야.

    강조하건대 당시의 너란 여고생은 무척이나 귀엽고 해맑았어.

    꿈에서나 그려보던 발랄한 미소녀의 아이콘이었어.

    적어도 내 눈엔 그리 보였어..

     

     

     

    솔직한 김에 조금만 더 솔직해볼게.

     

    지금의 너 역시도 발랄하고 귀엽고 예쁘고 화사했으면 하는 바람이야.

    게다가, 세월이 흘렀으니 성숙한 아름다움까지 겸비하였기를 난 바라고 있어.

     

    (결코 발설해서는 안 될 참으로 이기적인 속마음을 이렇듯 눈치 없이 뇌까리고 있네.

    그리고 미안하다며 영혼 없는 사과를 반복하지.

    이렇게 속수무책인 놈이 또 있을까.

    사랑을 하려 하면 할수록 사랑을 망치고 있는 이런 한심한 딜레마가 또 있을까..)

     

     


    아름다운 숙녀가 되어 있을 네 모습을 상상하며 그것을 원동력으로 줄기차게 써 내려가고 있나 보다 이 순간에도.

    확실히 너란 미인은 나란 남자를 셰익스피어로 만들어 놓는구나!

     

     

        
    이런 맹랑하고 어이없는 내용을 보라고 네 눈앞에 디밀어놓고 만날 것을 요구하니,

    기도 안 찰 넌 또 얼마나 부담 만빵일 것인가.

     

    그 심경 이해 안 가는 바 아니나 조금만 용기를 가져주렴.

     

    네가 못생기지 않았다는 건 객관적으로도 어쨌든 사실이잖아.

    부담 가질 필요 뭐가 있어?

    설령 불과 이 삼 년 사이에 엄청난 역변이 진행되었다 한들 그래 봤자 본바탕 어디 갔겠어?

    그리고 나 그렇게 옹졸한 인간 아니야.

    좀 변했음 어때. 연애하고 사랑하는 청춘남녀의 눈엔 서로가 다 미남 미녀 아니겠니?

    그런 게 콩깍지라고?

    일관되게 깊어갈 정방향의 사랑에겐 벗겨질 콩깍지 따윈 없어.

    변덕을 부리지 않는 사랑으로 널 보게 될 내 눈이 영구적인 콩깍지니까.

    따로이 씔 일도 없고 수시로 벗겨지지도 않는..

     

     


    부디 너의 미모에 자신감을 갖고 당찬 기백으로 나를 만나 다오.

     

    "흥! 꼴에 이쁜 건 알아가지고..

    부담 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자신감을 가져?

    착각하지 마. 그냥 너 같은 애 만나기 싫어!

    만나기 싫은 데 무슨 이유가 있어야 하니?"

     

    네가 이렇게 나올까 봐 겁이 나긴 하지만, 무반응으로 인한 답답함보다야 그런 말이라도 듣는 게 더 낫겠다 싶을 때가 있어.

     

    경미 너다운 배짱으로 그런 내용이라도 휘갈겨 우체통에 넣어다오. 너의 글씨나마 볼 수 있어 참 좋을 테니..

     

    변태라 손가락질받아도, 무관심보단 짜증과 혐오가 차라리 나아. (과연 그럴까..)

    날 향해 겨눈 게 너의 마음이라면 독설로 날아온들 무슨 상관있으리.

     

     

     

     

     

    3월 9일 오후 6시.

    XX대 코끼리 탑 앞으로 꼭 나와주렴.

     

     

    이러지 않겠다 해놓고 또 일방적인 약속을 강요하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난 참 답이 없는 놈인가 보다.

    그래 맞아. 정말 답이 없어서 이런다.

    너와 소통하고 싶은데 그래서 어서 만남을 갖고 싶은데, 네게선 도무지 답장이 날아오지 않으니

    앞이 캄캄한 미로 앞에 선 듯 대책이 서질 않아 결국 또 이런 짓을 하고 말았구나.

     

    무례하다 욕만 말고 오죽하면 저러겠나 인심 한 번 쓰려무나.

     

     

    이 연락을 약속 시각 넘겨 혹은 촉박하게 받은 경우나, 바쁜 일과로 그날은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는 경우

    그다음 날(10일) 같은 시각 같은 장소로 나와주렴.

     

     

    하염없이 기다리다 바람맞는 것쯤이야 이젠 이골이 났으니 일방적인 약속 일방적으로 깨도 난 괜찮다. 그건 당연한 거니까.

     

    다만..

    난 그저 기적을 바라는 기적 중독자일 뿐.

    깜짝쇼 하듯 네가 나와주는 그 엄청난 기적 말이야..

     

     

    물론 착한 네가 - 절망에 허덕일 게 뻔한 - 나를 가엾게 여겨 전날 전화라도 걸어준다면 참으로 고마운 일이겠으나,

    안타깝게도,

    내 헛수고를 막아주는 친절함에 대한 감읍보단 거절 의사 통보가 주는 허탈함과 서글픔이 비교 불가능하리만치 클 것이기에,

    차라리 매정한 컨셉트를 고수하여 - 곧 지옥 같은 좌절로 뒤바뀔 불안천만 한 희망일지라도 - 시한부 기대와 설렘이나마 누릴 수 있게 하는 것도

    내겐 어쩌면 더없이 자비로운 선처가 아닐는지..

     

     

    영혼이 영혼에게 느끼는 순수한 호감을 주체하지 못하여 이렇듯 또 해선 안 될 짓을 저지르고 만

    내 경솔함을 부디 용서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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