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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 다 안다고 외치는 무지
    이상한 연애편지 (상준 외전) 2022. 11. 26. 03:22

     

     

     

     

     

     

     

     

     

    경미, 그간 잘 지냈어?

     

    만개한 벚꽃이 천지에 흩어져 있는, 4월의 오후가 따스하구나.

    우리 학교는 이제 중간고사 기간으로 접어들었어. 그쪽도 그래?

     

     

     

    다름이 아니고, 또 한 번 염치없는 실례를 무릅쓰고자 이렇게 펜을 들었다.

     

    5월 6일 오후 7시 전후로 우리 학교 정문에서 봤으면 좋겠어.

    별 다른 뜻은 없고 그저 얘기나 좀 나누고 싶어서..

     

    갑작스러운 편지 공세에 그동안 많이 당황스러웠지?

    이제 와 곰곰 생각해 보니 "내가 큰 잘못을 저질렀구나!" 하는 자책감이 들더라.

    이 점 사과도 할 겸 얼굴 한 번 보고 싶구나.

    첨이자 마지막으로 여길 테니 내 소원 들어주겠니?

     

    그렇다고 절대 부담은 갖지 마.

    바빠 시간이 없어서 혹은 다른 약속이 있어 못 나오거나, 그냥 나오기 싫어서 안 나와도 난 괜찮아.

    괜히 미안한 맘 가질 필요도 없고..

     

    지금처럼 편안하게

    네 마음 움직이는 대로 임하면 돼.

     

     

     

     

     

     

     

     

     

     


    5월 6일 토요일

    오후 6시 10분경

     

     

    리포트 제출을 위해 도서관을 나와 엘리베이터로 발길을 옮긴다.

    버튼을 누르고 도어는 열리고 텅 빈 좁은 공간으로 빨려 들 듯 들어간다.

    스르르.. 위를 향한 소리 없는 이동이 온몸에 느껴진다.

     

    한 시간여 밖에 남지 않은 혹시 모를 "그녀와의 해후"를 머릿속에 그려 본다.

    지겨운 리포트를 제출하고 남은 일은 그녀와의 만남을 마음껏 상상하는 것뿐.

     

    로비를 거쳐 정문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 상쾌하다. 그런데..

     

    내게만 느껴지는 서늘한 바람이 양볼을 스치며 지나가고,

    하늘을 뒤덮은 우중충한 잿빛 구름은 낮게 내려와 머리를 짓누른다.

     

    밤부터 비가 내릴 거라는 예보를 문득 떠올리며 계단을 내려온다.

     

    코끼리 탑을 지나치면서 팔을 들어 전자시계를 들여다본다.

    6시 20분. 아직 시각은 한참 이르다.

     

     

    정문 쪽으로 내려온 후 건물 앞 벤치에 앉아 본다.

    나처럼 무료함을 달래는 한 두 명 외엔 인적이 드물었고 따라서 대부분의 벤치들은 쓸쓸하게 비어 있었다.

     

    한 줄기 바람이 또 불어와

    흙먼지를 일으키며, 쓸쓸함의 일부가 된 내 주위를 휘감는다.

     

    늦봄날에 어울리지 않는 (나만 느끼는) 으슬으슬함의 감촉이 전신으로 퍼지며 소름을 끼치게 한다.

     

    날리던 먼지는 잔잔해지는데도 몸의 떨림은 점점 강렬해져 옴을 어쩔 수 없이 느끼는 순간,

    그녀의 - 현재 얼굴로 추정되는 - 흐릿한 윤곽이 허공에 그려진다.

     

    고개 돌려 보도를 바라본다.

    젊음의 군상이 핏기 없는 얼굴에 표정을 감추고 걸어간다.

    그것은 회색 하늘과 묘한 앙상블을 이루며 무채색의 침울한 풍경을 도출한다.

    그것은 또한 나 자신의 모습이기에, 넋 나간 듯 고정된 시선에는 어느새 연민의 빛이 어른거린다.

    그리고 소리 없이 밀려오는 외로움의 무게에 힘없이 고개를 떨군다.

     

    코앞을 스치는 한 쌍의 발자국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들자

    커플의 다정함이 보란 듯이 연정을 발산하고 있다.

     

    기어이 맞은편 벤치로 다가와 미소 띤 정담을 부둥켜안는, 밀착된 포즈.

    공교롭구나..

     

    질투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분노가

    나를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녀는 오지 않아.

    그래, 그녀는 안 올 거야.

    아니, 그녀가 와선 안 돼!

    미친놈처럼 중얼거리며 다시 정문을 향한다.

     

    어이없게도 그녀가 오지 말기를 바라는 소망이 걸음마다 견고해지며 그렇게 학교 밖까지 나온다.

     

    차도 가운데 우뚝 선 시계탑 바늘이 정각 7시를 가리킨다.

     

     

    주위는 어둑어둑해지고 행인과 학생들의 발걸음만 속도를 더해 간다.

     

    횡단보도로 천천히 움직이며 주위를 둘러본다.

     

    '오늘은 피곤하구나. 십오 분만 기다리자. 그리고 미련 없이 자리를 뜨자.'

     

    주변을 유심히 살피고 시계를 보고 다시 주변을 살피고..

     

    반복되는 동작을 십오 분간 지속하는 동안, 사건(?)이 벌어질 기미는 전혀 보이질 않았고

    그 사건이 현실화할 때의 내 주관적 "감격 지수"만 급격히 하락해 가고 있었다.

     

    수시로 바뀌는 신호등이 한 무더기의 무표정들을 주기적으로 쏟아낼 뿐,

    7시 15분에도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잠시 야릇한 희열에 젖는다. 예상이 적중한 데 대한 상쾌함이랄까.

     

    그러나 이 처량한 희열은 조금 심심하여 만끽하기엔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너무 자주 적중하는 예상이라 농축된 쾌감과는 거리가 먼 이유도 있지만,

    연달아 찾아오는 허무의 풍랑이 이 비루먹은 희열을 거세게 휘젓는 바람에

    가뜩이나 싱거운 이놈이 더욱 옅어지기 때문.

     

     

    굳게 다문 입술을 깨물며 돌아서 정류장으로 올라간다.

     

    허탈함을 짊어지고 초연한 척 연기하는 우스꽝스러운 팬터마임이 버스를 기다린다.

     

    홀로 짠 각본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모노드라마가 되어 버린 2인극.

     

    이렇듯 심각한데 그저 코미디.

    그마저도 웃기지 않는..

    (관심 없어하는 세상 앞에서 힘 빡 들어간 비극은 연출되기 힘들지.)

     

    이 썰렁한 코미디에 웃는 이는 단 한 사람. 모노드라마의 슬픈 주인공.

    아무도 반기지 않는 "냉철한 흐느낌"이 혼자 웃는다.

     

    이때, 나부끼는 가로수 잎사귀들도 일제히 조롱하며 웃어 젖힌다.

     

    그것들의 웃음을 수긍하며 오열하는 자존감이,

    지쳐 포기하는 대신 한껏 웃는다. 묵음 처리된 상태로..

     

     

     

     

     

     

     

     

     

     


    경미야,

    나는 남자임에도 사춘기 계집아이 같은 성향이 있나 봐. 무드에 약하고 또 그것에 너무 집착하니까..

     

    냉엄한 현실을 피부로 못 느낀 탓도 있겠으나, 도피적으로 나만의 이상에 갇히다 보니 은연중에

    무드니 낭만이니 하는 것들을 - 현실 망각을 위한 - 환각제로 남용한 모양이야.

     

    이제는 그 도가 지나쳐 혼자의 만족으론 뭔가 부족하고, 다른 이의 동참이 있었으면 하는 망상까지 하게 되네.

     

    경미 너란 존재도 예외는 아니었지.

     

     


    추억에 빠져 우수에 젖는 멜랑꼴리 한 무드를 충족시키는 데

    안경미 너만 한 소재도 드물긴 해.

    나에게 특화된 안성맞춤형 사랑 유발자.

     

    내 낭만의 현현인 너에게 다가가는 방법으로

    아니, 현실 냄새 진동할 너와의 거릴 유지하는 방식으로

    편지를 선택한 것은, 내게 본능이었어.

    정념의 연못에 가라앉아도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노하우.

     

    강조하지만 네 전화번호를 안다 해도 나는 이 방법을 고집했으리. 동시에 너의 편지를 고대했으리..

     

    답장 내용에 대한 욕심은 애초에 버렸고

    내가 보내는 횟수의 삼 분지 일이라도 네 편지가 오길 기다렸지.

    그러나 넌 쓰기를 주저하였어.

     

    큰 마음먹었을 단 한 번의 편지와 아주 가끔의 전화 외엔 끝내 나의 소통 방식을 거부한 너지만,

    그래도 나쁘지만은 않았어.

    기다림의 말로와는 별개로 기다림 자체도 내겐 설렘이고 기쁨이었으니..

     

    다만..

    나와는 다르게,

    현실의 안경미가 더 우세하여 낭만 소녀 안경미는 맥없이 제압당하고 있는 것 같아,

    그게 조금 서글펐을 뿐.

     

     


    편리를 버리고 불편을 추구하는 내 괴팍한 이기심이 네게 주었을,

    적잖은 부담은 생각지 않고

    (사랑이 저만치 가는 줄도 모르고)

    내 주장 합리화하기에만 급급하는, 이 소아병적 어리석음을 보라!

     

     

       
    거듭 말하지만 지난번 다시 전화 준 건 정말 고맙게 생각해. 그리고 전화 걸 때마다 실망을 줘서 정말 미안해.

    시쳇말로 가뭄에 콩 나듯, 나로선 눈물 나도록 고맙고 소중한 "너와의 대화"가 찾아오는 건데..

     

    넌 저의가 궁금하겠지만,

    번번이 소극적이 되어버리는 이 빌어먹을 태도가 나 스스로도 참 맘에 들지 않아.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걸.

    실은,

    (발랄하고 대범한 너와 달리) 지독히 소심하고 내성적인 나이기에 가능한

    부끄러운 이유가 있었어. 너무 유치한 이유라 듣는 네가 열받을까 걱정되는..

     

    그나마 한가한 시간대라서 넌 일요일 저녁에 전활 걸어왔을 테지. 그런데 이게 내 입장에선 참..

     

    어느 집이나 비슷하겠지만 일요일 저녁이면 보통들 온 가족이 모여 있잖니.

    화기애애하던 화기애매하던 그딴 것과 관계없이.

     

    이런 가운데 네게서 전화가 불쑥 오면 솔직히 살짝 당황되고,

    부모 형제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무마할 변명거리 찾느라 난감해진단다.

     

    미성년자도 아니고 떳떳하게 여자 친구라 밝히면 되지 않나 싶겠지만,

    모범생 허울을 반강제로 덮어쓴 이 기특한(?) 샌님은

    여태껏 여자 친구랍시고 만나거나 연락을 주고받는 등의 생활 패턴과는 거리가 멀었으므로,

    식구들의 놀라움 섞인 과한 관심에 천연덕스러운 대처를 한다거나

    색안경을 끼고 덤벼드는 그들을 무작정 피한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능구렁이과가 아닌 나로선 역량 부족이었던 거지.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은 거라면 미안하다..)

     

     


    젊은 남녀의 오글거리는 대화라면 아무래도 이에 걸맞은 때와 장소가 있기 마련이겠지.

    적당히 비밀스러운, 그래서 과감한 표현과 진실된 고백이 가능한..

     

    한데 여기서부터 핀트가 어긋날 경우 - 특히 나 같은 성격의 소유자는 - 주위를 상당히 의식할 수밖에 없고

    더구나 무대 위에 발가벗겨진 듯한 노골적 압박 하에선 제대로 된 이야기를 끄집어낼 방도가 없지.

     

    (네 의도와 상관없이 발생한) 민망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고자

    괜스레 가식적이 되어 사무적으로 통화하는 바람에

    그 피해는 죄 없는 네가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구나.

    부랴부랴 전화를 끊고 나서야 땅을 치며 후회한들 무슨 소용 있을고..

     

     


    "현대의 이기인 전화가 이리 무섭게 느껴지긴 처음이야. 이러다 전화 공포증 생기겠어."

     

    난처함이 얼마나 싫었으면 네 앞에서 해선 안 될 이런 말도 막 튀어나오네. 이러니 나란 놈 참..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게 뭔지 아직도 파악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전화 핑계나 대고 있으니..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구구절절 늘어놓곤 있지만 결국엔

    "이러이러해서 곤란해 죽겠으니 제발 전화질 그만하고 편지나 보내!"

    이거잖아.

     

    너와 나를 이어주고 있던 가느다란 끈조차 끊어내려 발악하는 꼴이라니..

     

    난 아직 사랑을 하기엔 많이 어린가 보다.

    사랑 앞에선 모든 게 작아져야 하건만, 날 움켜쥔 환경 앞에서 사랑이 오히려 주눅 들고 있으니.

     

     


    절반의 자기만을 사랑하겠다는데 좋다고 다가올 여자가 있을까.

     

    비현실을 추구한다고 첨부터 선언하며 달려드는 몽상가에게

    자신의 전부를 내맡길 여자가 있을까.

     

    이미 답은 정해졌는데 혼자만 부인하고 있으니 등신 소리 들어 싸지.

    아무리 여자의 행동심리학에 문외한일지라도 정도가 있어야지.

     

    그녀가 진정 내 사랑을 받아줄 요량이었으면 내가 원하는 대로 적극 호응해 주었겠지.

     

    "난 얘가 좋아. 그런데 이런 점은 맘에 안 들어. 그러니 이 좋아함을 킵 해둬야겠어."

    사랑하기로 일단 결심한 여자한텐 이런 건 없어.

    호감이 강할 땐 결점 따윈 눈에 들어오지 않아. 머리보다 가슴이 뜨거운 게 여자니까.

     

    나에게로 연정이 풀가동되었다면 당연히 내가 하자는 대로 했겠지.

    학교로 내 입맛에 맞는 달달한 편지들도 심심찮게 부쳤을 테고.

     

    만나자고 일방적으로 떼를 쓸 때마다 못 이기는 척 약속 장소로 나와 주었겠지.

    아니 그녀가 먼저 얼굴 한 번 보자며 시동을 걸었겠지.

    이렇게 연애는 시작되는 거야.

     

    서로 물고 빨고,

    매일 하는 데이트로도 아쉽기만 하고,

    투닥거리고 토라지고 그러다 안 보면 보고 싶고..

     

    싸우고 헤어지고 또다시 만나고.

    미운 정 고운 정이 곰삭을 때쯤이면 함께 할 미래를 설계도 해보고.

     

    그녀는 이런 것들을 나와 함께 할 생각이,

    나와의 사랑을 가꾸어갈 의지가 애당초 없었던 거야.

    믿음직한 남자를 고를 줄 아는 "본능적 안목"이 그녀에게

    이 남자를 경계하라고 신호를 주었겠지.

     

    이런 게 여자의 생존본능이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건 바로 이런 거지.

    바보 같은 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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