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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 현실 부정
    이상한 연애편지 (상준 외전) 2022. 11. 12. 00:40

     

     

     

     

     

     

     

     

     

    To SJ

     

     

    딱딱한 사랑보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사랑을 해보고픈 계절.

    한 없이 계속될 것만 같던 추운 겨울도 서서히 물러나고 한낮엔 제법 봄내음이 피어올라요.

     

    세상 모든 것을 까맣게 물들인 이 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옛 친구를 그리며 조심스러운 얘기를 꺼내는 자그마한 계집아이의 기분으로

    펜을 들어봅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안녕?  정성껏 쓴 편지들은 잘 받아 보았어요.

    항상 그쪽에게 받기만 하다 막상 보내는 입장이 되니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저에 대해 무척 궁금해 하시는 것 같아서 우선 간단히 제 얘기를 해볼게요.

     

     


    저는 현재 XX전문대 JJ과 2학년에 재학 중입니다.

    원래는 올 2월 졸업인데 학점 미달로 1년 과정 더 듣고 내년에 졸업하게 됐어요.

     

    JJ과.

    과 이름답게 여학생은 제가 유일하답니다. 홍일점이라 처음엔,

    소외되지 않으려고 남자애들과 당구장도 가고 카페에서 어울리기도 하며 그럭저럭 학교 생활을 해 나갔지만,

    나중엔 그런 것들에 점점 흥미를 잃게 되더군요.

     

    그러다 학교 가는 날은 차차 줄어들게 되고, 결국 2학년 땐 시험 치는 날만 간신히 가는 지경이 되고 말았네요.

    이름만 그 학교 학생이지 정작 학교 다닌다고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설렁설렁 어영부영

    나이롱 학생이라고나 할까요.

     

     


    전 고등학교 때부터

    꿍짝이 잘 맞는 친구들과 함께 디스코텍을 종종 다니곤 했었죠.

     

    그런데 대학 생활이 시들해지니까 새삼 그 시절이 그리워졌고 본격적으로 디스코텍에 빠져 버렸습니다.

    못 말리는 고교 단짝들과 다시 뭉쳐 서울의 디스코텍이란 디스코텍은 안 가본 데가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그곳에 가면 뺄 수 없는 것들이 또 있죠. 술과 그리고..

     

    전 지금 매일을 술에 의존하다시피 하며 지내고 있어요. 한심하죠?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제 엄연한 현재 모습이랍니다.

     

     


    이쯤 얘기하고 보니 제 윤곽이 웬만큼은 드러난 것 같군요.

    이젠 저란 아이가 어떤 앤지 대충은 짐작하셨겠죠?  실망하셨나요..?

     

     


    저는 SJ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씨의 주인공이 아니에요.

     

    제 생각이지만, SJ 씨는 저를 잘못 알고 계시는 것 같아요.

    저 자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아주셨으면 해요.

    그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보이는 걸 전 원치 않는답니다.

     

     


    저도 그렇고 SJ씨도 그렇고,

    현재의 상태로는 자연스러운 만남을 기대하기란 좀 어려울 것 같네요.

    그러니 친하게 지내고 싶으시단 말 쉽게 하지 마시고 신중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제 솔직한 심정이에요..

     

     


    새 학기를 맞았으니 보람된 학교 생활 열심히 하시고

    환절기 감기 조심하세요.  그럼 이만..

     

     


    19**년 3월 10일 새벽에

     

    From KM

     

     

     

     

     

     

     

     

     

     

     

     

     

     


    경미야..

    내가 편견에 사로잡혀 널 마치 마음의 병자인 양 취급한 적 있었지. 그래서 널 문제아로 단정 지을 뻔도 했고.

    그러다가 전화를 통한 너와의 짧은 대화 후 이러한 편견들이 송두리째 날아가버리는 시원한 경험도 하였었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카타르시스를 또 한 번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드디어 찾아왔다. 고대해 마지않던 획기적인 사건이..

     

    너의 편지가 날아온 것이다. 그토록 기다리던 사랑스러운 손편지가 내 눈앞에 당도하고 만 것이다.

     

     

     


    ㅇㅇㅇ 귀우.

    근래 보기 드물었던 반듯한 글씨체.

    우선, 생전 처음 보는 네 글씨체가 전혀 낯설지 않은 미스터리한 체험과 맞닥뜨려야 했어.

     

    그것은 - 조금의 꾸밈이나 가식이 없는 - 너의 솔직 담백한 마음을 투영하고 있더구나. (부디 이 번 만은 부정하지 말아 다오.)

    본의 아니더라도 넌 내게 착한 본성을 보여준 셈이야.

    아무리 자신에게 상처 입히는 험한 내용을 담아봤자 그 글씨체로는 설득력이 없어.

    너의 심성을 닮아 깨끗하고 소박한 그것이 빛을 발하니

    위악적인 내용은 퇴색될 수밖에 없지.

     

    네가 정말 본디 어쩔 수 없는 여자였다면, 네 말대로 구제불능의 낙오자라면,

    아주 형편없는 날림 글씨여야 아귀가 맞잖아?

    마음이 삐뚤어진 자는 글씨도 엉망일 테니..

    (순진한 발상이니?)

     

    네가 적은 글을 나로 하여금 곧이곧대로 믿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니?

    편지 속 글씨 모양을 통째 바꿔버려야 한단다. 엉터리 괴발개발 글씨체로 말이야.

    그리했다면 난 네 편지 내용을 그대로 믿었을 거야.

     

    하지만 넌 그러지 않았어.

    글씨까지 변형시켜 뭔가를 꾸미는 음흉한 자들도 세상엔 널리고 널렸지만

    넌 그런 부류가 결코 아니라는 걸 너의 글씨로 입증했어.

     

    넌 나에 대한 예의를 갖추었어.

    거리를 두는 것 같아 조금은 섭섭한 너의 존대와는 별개로

    네 반듯한 글씨만으로도 날 향한 깍듯한 예우는 차고 넘쳤어.

     

    어디 그뿐이랴.

    아담한 봉투와 귀여운 편지지에는 애교 어린 정감의 입김이 따뜻하게 배어 있었다.

    하물며 그 속에 가지런히 박혀 있는 글씨 알맹이들은 더 일러 무엇하리..

     

     

     


    지겨운 문어체식 수식어 남발, 현학적 오만함, 인간에 대해 모두 아는 듯한 요설을 쏟아내면서

    정작 너의 심정은 눈곱만치도 몰랐던 새끼.

     

    물정 모르는 철부지의 허망한 넋두리 등등

    찾고자 한다면 한도 끝도 없는 (너의 애인이 되기엔 턱없이 모자란) 내 결격 사유들.

     

    그것들에 대한 불평 한마디 없이 넌

    너 자신의 어두운 이야기들만 침착한 절규로 토로하고 있었지.

    직접적으로 불만을 얘기하는 것보단 그것이 오히려 나를 뜨끔하게 하였다.

    막연한 이상주의에서 허우적대지 말고 발 밑 현실을 직시하라는

    따끔한 일침 같았어.

     

     

     


    이 가슴 아픈 편지를 읽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길

    넌 바라니..

     

    "이거 정말 실망이 큰데?! 얘가 이런 여자인 줄은 몰랐다. 당장 꿈에서 깨고 물러나야겠어."

    이러길 바란 거니? 아니면

     

    "건방진 X! 싫으면 싫다 할 것이지 이 따위 글로 날 교묘히 걷어차 버려!?"

    이런 반응을 기대한 거니? 또는

     

    "역시 이성 간에도 수준은 맞고 봐야 해. 아무렴 나 같은 사람이 이런 막돼먹은 여자와 사귈 순 없지."

    이렇게 쓰레기 같은 말이나 불쑥 내뱉고 남이 볼세라 편지는 찢어버리는

    한 마리 졸렬한 수컷을 예상하고 있었던 거니?

     

    그렇다면 이거 미안하게 됐는데?

    너의 편지는 나에게 진리 그 자체인데 어떡하지?

    네 스스로를 준엄하게 책망하는 그것 하나로,

    "구도와 깨달음의 입문서"가 되고 말았어.

    (오글거리니?)

     

     

     


    사람이 자신의 모자란 점을 낱낱이 알고 누군가에게 실토하였다면

    그는 더 이상 모자란 사람이 아니다.

     

    자포자기가 하소연을 하는 순간, 포기는 사라지고 숭고한 반성과 새로운 도약만 남게 되지.

     

    참된 자아를 실현코자 몸부림치는 네 잠재의식의 한 부분이,

    너도 모르는 사이 널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내게 부칠 편지를 완성하기 위하여 열심히 펜을 굴리던 그 고요한 밤에,

    네 맘 속 (위축되어 있던) 그 부분은

    기어이 너란 껍질을 뚫고 널 둘러싼 공간을 가득 채웠을 거야 아마도..

     

    공간으로 확장한 너란 알맹이는, 기쁨의 떨림을 영혼으로 발산하였겠지 아마도..

     

     

     


    경미야, 이 편지 쓸 때 기분이 어땠니?

    알 수 없는 슬픔에 휩싸이거나 심란한 마음 가눌 길 없진 않았니?

     

    바로 그런 느낌들이 기쁨의 공명이란다.

    그것들은

    순수로 접근하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희열의 임상 증세..

     

     

     

     

    나, 놀고 있니?
    과대망상도 이 정도면 중증이니? 

    언제나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는 내게 진절머리가 나니?

     

    네가 무슨 말을 하던지 (어떤 구실을 붙여서라도) 좋은 쪽으로 몰아 대는 정신질환적 합리화에

    불현듯 두려운 생각이 드니?

     

    내가 던지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너의 신경을 건드리고 나아가 널 완벽주의의 올가미로 옥죈다 생각하니?

     

     

     


    이쯤에서 경미 너에게 분명히 해둘 것이 있어.

    내가 네게서 느끼는 이 모든 감정들은 결코

    너 보기 좋으라고 잔뜩 치장한 (진실로 위장한) 거짓이 아니란다.

     

     

     


    내가 과연 진실한 사람인지는 의문이지만 다행히 진실을 볼 줄은 알아 (그렇게 믿고 싶어.).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하는 말, 내가 너에게 가지는 느낌은,

    너를 수호하는 진실.

    그러니 날 믿어도 돼. 믿어 줄래?

     

     

     


    내가 널 편견의 시선으로 보았듯이 너도 나를 오판하고 있는 것 같다.

    너에게 난 대체 누굴까?

     

    고매한 인격자?

    타협하지 않는 양심가?

    고독한 이상론자?

    (아주, 듣고 싶은 소린 다 갖다 붙이는구나. 이런 걸 김칫국 드링킹이라 한다지?

    미안해. 넌 그냥 별 이상한 놈으로만 나를 보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혹시, 청춘을 건너뛰어 곧바로 고루한 중년이 돼 버린 희한한 인생 같아서

    마냥 신기할 뿐이니?

     

     

     


    내가 남들보다는 이상주의적인 경향이 조금 강하긴 해. (조금이 아닌가..)

    그러나 내 이상은 현실의 바닥에 발을 붙이고 난 후에야 가질 수 있는 것.

    붕 떠서 그저 뜬구름이나 잡는 허망한 관념론자를 난 경멸 해.

     

    현실주의의 진정한 의미가 뭔지 아니?

    돈만 아는 것? 자기만 아는 것? 실리를 추구하는 것?

    다 아니야. 그런 건 다 사이비들이야.

     

    진짜 현실주의자는 지독한 이상주의자야. 그자 만큼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은 없어.

    현실을 너무 잘 알기에 이상을 부르짖는 거야.

     

     

     


    나라고 세상을 모르겠니?

     

    널 순수하다 착하다 노래 부르듯 하는 건 절대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야.

    넌 지금 이대로라도 충분히 순수하기 때문에 순수하다고 말하는 거란다.

     

    악마의 유혹에 굴복하여 타락한 사람?

    그래서 뼛속까지 못되고 사악해진 사람?

    그런 이들의 속성을 훤히 꿰뚫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네가 그러하지 않다는 것쯤은 안다.

    나로선 도저히 널 착하게 보지 않을 수가 없어.

     

     

     


    학생 신분으로 공부는 뒷전에 팽개치기,

    까진 애들과 어울려 술집 디스코텍 등을 전전하기,

    술 없으면 "사는 재미" 없을 정도의 준알코올 중독.

     

    겨우 이런 것들이

    "난 타락했다" "나 같은 앤 사람도 아니다"의 잣대가 된단 말이니?

     

    이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또 하고 있는 실수들에 불과하단다.

     

     

     


    나는 뭐, 그간 면벽하고 도만 닦은 줄 아니?

     

    네가 해봤다는 소위 "못된 짓거리"란 게 내겐 그저 일상이었어. 여태 살면서 직간접으로 경험한 것들이야.

    못 믿겠니?

     

    예를 들어볼까?

     

    술 담배는 물론이요 환각을 유발하는 것들에도 손을 대어 봤어.

    만화 가게의 음침한 골방에서 침 흘리며 포르노에 탐닉하기도 했어.

    동하는 음심을 주체 못 하고 사창가 뒷골목을 배회하기도 했어.

    무엇에 홀린 듯 호기심에 물건을 슬쩍한 적도 있어.

     

    과에서 주도한 한두 번의 디스코텍행에 맛 들여, 몇몇 동기들과 의기투합

    그곳을 들락거리며 계집들 꼬시기에 혈안이 된 적도 여러 번이야.

     

    이들 중 현재 진행형인 것도 없다고는 하지 못하겠어.

     

     

     


    너에게 이렇듯 추한 고백까진 하고 싶지 않았는데..

    자존감이 낮아진 널, 의기소침해진 널 확인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난 순수하려고 노력한다 했지 현재 순수하다고 하진 않았어.

    설마 더 배운 사람일수록 깨끗하고 고상할 거라 믿는 순진한 바보는 아니지?

     

    머릿속에 든 게 많을수록 선할 확률보단 악할 확률이 높아져.

    세상의 잡지식은 단지 악을 선으로 포장하는 능력만 배양할 따름이야.

    그 능력이 곧 세련됨이고, 세련은 악마의 드레스.

     

     

     


    지금의 세상이란 게 이래.

    나같이 순진한(?) 놈도 불과 몇 년 사이에 볼장 다 보는 세상인 거야.

     

    공부깨나 할수록 더 약게 처신한다는 것 말고는 다 똑같아. 인간은 누구나 타락을 경험할 수 있는 동물이야.

    그러니, 넌 나에 대해서 아니 너 자신에 대해서 조금도 거북해할 필요가 없다.

     

    편지에 밝힌 네 어긋난 행적은 보통의 인간이 겪는 생활의 자연스런 부분에 지나지 않아. 내가 그러하였듯이..

     

    인간이기를 거부한 자들,

    탐욕에 사로잡혀 위선을 밥 먹듯 행하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타인의 고혈을 빠는 족속이야말로

    영원히 구제받을 길 없는 죄인들이지.


     

     

     

    인간 사회는 어째서

    타락의 속도를 임계점으로 몰아 말세의 절벽 끝까지 다가가는 행보를 멈추지 않는 걸까.

    절도, 강도, 사기, 강간, 살인 등의 사회에 만연한 무섭고 더러운 범죄들이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일까. 천만에.

    그것들은 말세의 반영물일 뿐..

     

    가공할 범죄들이 양산되는 핵심 이유, 바로 부조리의 근원에 도사린 썩은 권력이지.

    그것에 의해 세상은 망해가는 거란다.

     

    이기심의 첨단을 달리는 상위 십 프로 엘리트 집단 그리고 그들마저 조종하는 꼭대기 권력층이야말로

    도둑, 사기꾼, 강도에다 성범죄자, 살인범의 자질까지 두루 겸비한 무리란다.

     

     

     


    난 저들만큼 똑똑하거나 세련되지 않아서 저들의 전철을 밟을래야 밟을 수도 없어.

     

    기필코 올라가 저들의 자리 중 하나를 꿰차겠다는 (천재성 다분한) 의지의 한국인들과 달리

    난 그 방면에선 완전 젬병이기에 - 그들보다 상대적으로 - 순수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어.

     

    이렇게 무능(?)한 우린, 강제되는 순수라도 자랑해야 하는 동지.

     

    이처럼 닮은 우리가 헤어질 이유 대관절 어디 있단 말이니?

     

    그러하기 때문에 싫은 거니? 세상이 주는 비전과 동떨어진 무능한 남자라서?

    서로를 혐오해도 모자랄 판에, 되도 않는 동질감을 강요하고 있어서?

     

    그건 아닐 거야.

    그런 계산을 하기엔 넌 아직 소녀 같은 여자니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너 역시 편견을 버리고 나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주기 바란다.

     

     

     


    네 편지의 마지막 부분이 나로선 - 영원한 이별을 고하는 - 일방적 통지처럼만 느껴지던데..

    제발, 과장된 억측이라고 반박해 줄래?

     

    너의 반응, 너의 신호, 너의 손짓, 너의 답장이 내 삶을 지탱하는 생명수라 말한다면

    또라이라 여기겠니?

     

    왠지 있을 것만 같은 (날 향한) 네 측은지심에 기대어 당돌한 부탁 하나 첨부 하마.

     

    두 번째 답장 감히 또 기다릴게.

     

    정녕 할 얘기가 없으면,

    너의 어여쁜 글씨체로 "ㅇㅇㅇ 귀우"만 달랑 적은

    빈 봉투라도 보내 다오.

     

    겉봉에서

    "너의 귀우" "너의 소중한 벗"이 된 또렷한 감격을 거듭 확인할 수만 있다면,

    나를 일희일비하게 할 속편지지쯤이야 없다 한들 어떠하리..

     

     

     


    그리고 이것만은 약속할게.

     

    몇 번 만나보고 성격 등 다른 면들이 안 맞는다 느껴지면

    그래서 날 계속 사귀기가 부담되고 싫어지면

    더는 귀찮게 하지 않을게.

     

    우리, 만나기도 전에 수준이 맞네 어쩌네 자기비하 경쟁하며 함부로 예단하지는 말자.

    핑계 같지 않는 추상적인 이유들 갖다 붙이지도 말자.

     

     

     


    지겹게 받아 본 편지들의 제법 방대한 내용이 어쩌면,

    만나기도 전에 널 지치게 했는지 모르겠다.

     

    나의 지독히 소상한 글 속에서

    넌 내 정체성을 파악하고도 남았으리라.

    그런 까닭으로 굳이 만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는지도..

     

    아, 패착인 줄을 알면서도 펜 끄적이는 걸 멈출 수가 없어!

     

    널 향해 달려가야 할 시간에 한가한 구상이나 하고 앉았구나.

     

    그렇다고 여자를 황홀케 할 감동의 문장에 몰두하냐면 그도 아닌 것이,

    연서다운 연서를 기막히게 뽑아내어 그걸로 올인할 생각도 없는 것이,

    아름답게 실현되어야 할 사랑의 에너지를 왜 이렇게 헛되이 소진하고 있는 걸까.

     

    전체 맥락과도 그다지 매칭 되지 않는 괴팍한 단락들을

    난 왜 잊을만하면 꾸역꾸역 삽입하는 걸까.

    너의 마음을 얻기엔 형편없는 마이너스가 될 게 뻔한데..

    (난 너를 원하기는 하는 걸까.)

     

    진부한 자학 코드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 저주받은 악취미가

    언감생심 예술의 탈을 쓰고

    풋풋한 연애 감정을 집요하게도 괴롭히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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