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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해피 데이트? 자격 미달!이상한 연애편지 (상준 외전) 2022. 11. 4. 16:01
"그쪽이 편지에 쓴 대로 집에 쳐들어올까 봐 내가 먼저 전화한 거야."
여기서 난 너에 대한 두 가지 감정을 느꼈다.
우선 첫째, 순진함.
아무려면 쳐들어가기까지야 하겠니.
(그래 널 찾아 네가 사는 동네를 헤맨 건 인정. 하지만 거기까지가 전부야.)
애초에 그럴 용기도 없어 난.
초인종 누를 용기가 안 생겨 돌아선 나잖아.
그런데 경미 넌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모양이지?
사뭇 떨리는 듯한 음성으로 "쳐들어올까봐"를 유독 강조하던 널 떠올리면 난 지금도 자꾸 웃음이 나와.
혹시 얼마 전 이런 악몽에 시달린 건 아니니?
복면을 쓰고 손엔 흉기를 든 내가 네 방 안까지 쳐들어와
"왜 약속 안 지켰어? 너 죽고 나 죽자 앙!"하며 달려드는..
그리고 둘째, 나를 위한 배려.널 만나려는 일념으로 하염없이 기다렸을지 모른다는 안타까움 때문에,
너에 대한 야속함에 괜한 속만 태우며 전전긍긍하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내키진 않지만 결국엔 다이얼을 돌려야 했던 ("쳐들어올까 봐"란 핑계를 댈 수밖에 없었던) 네 마음.
이해할 것도 같아.
편지의 구구절절마다 널 향한 사무친 그리움이 묻어 있음을 강하게 느낀 네가 택할 수 있는 건
숨거나 다가가거나..
전자가 미련없는 차가움의 외면이라면, 후자는 일말의 관심 또는 연민이 존재한단 증거.
네가 전화를 걸어준 그 사실이, 후자를 선택했단 걸
그래서 - 언젠간 애정으로 만개할 - 가능성의 씨앗이 뿌려졌단 걸 입증하고 있어.
위의 두 가지 가설(?)도 물론,
이성에 대한 (긍정적 측면에서의) 두려움이 경미 네게도 있었구나
천하의 센 여자 안경미가 - 자기한테 구애하는 남자란 이유만으로 - 소심한 샌님을 두려워할 수도 있구나
라는 전제 하에서만 성립하겠지. 아무튼..
네게 상기 두 가지 본성이 있는 한, 네가 설령 자기 비하에 빠진다 한들
너를 아는 어느 누구도 널 그렇게 놔두지 않고 곁에서 기꺼이 위로가 되어 줄 거야.
주변에 널 알아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깨달을 때 넌 자신감을 갖게 되고
그것은 험난한 세파 속에서 꿋꿋이 살아낼 힘이 되겠지.
그리되면
허무의 굴레에서 벗어나 삶의 의미가 분명해지고 세상을 바르게 비판할 안목도 생기겠지..
이제 화제를 돌려 내 이야기를 좀 해야겠어.
너와의 전화 통화 후 스스로에 대해 다시 한 번 실망하게 되었단 내 말 기억하니?(넌 어땠니? 너 역시 실망을 넘어 혐오감마저 느껴지진 않던?)
난 네게 "결국은 같은 의도"의 질문들을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몰라.
"요즘 뭐하고 지내?"
"학생이니?"
"학력고사는 치렀어?"
"재수는 안 했고?" 블라블라..
처음 대화하게 된 너에게서 대체 무얼 캐내겠다는 건지..
도대체 어떤 확답을 얻어내겠다고 그 따위 속 보이는 질문 공세를 퍼부었는지..
안부 정도의 가볍게 묻는 말들일 거라 정작 넌 부담 없이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러니 "나 죽었어" 식의 엉뚱발랄한 우문현답이 나왔던 거고.
그런데 말야.이제 와 생각해보니
난 어쩌면 네가 대학생이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는지 모르겠어.
툭하면 수업에 빠지고, 술집이나 디스코텍을 자기 집처럼 들락거리고, 학점 미달에 낙제를 밥 먹듯 해도 좋으니
그저 무늬만이라도 대학생이었으면 하고..
산골 구석에 처박힌, 간판만 대학이라 붙인 곳이어도 좋으니
그곳에라도 적을 둔 여대생이었으면 하고..
눈만 뜨면 순수를 외치고 혼자 선각자인 척하다가
너와의 대화에서 그만 본색이 드러나버린 게지.
누가 봐도 나보다는 나은 사람들한테까지 "먼저 인간이 되어라" 지껄이던 경박한 주둥이가
너의 신상 조사를 하려 하였구나.
실재와 이상 사이에서 곧잘 드러나는 인간의 가식과 이중성을 머리로는 멸시하면서도
야비한 본능이
나 자신의 자가당착은 뻔뻔하게 허용하고 있었구나!
이런 내게 네가 욕설이라도 퍼부어준다면 메스꺼운 속이 조금은 시원해질 것 같다.
"나는 너에게 걸맞은 상대가 아니야!"
처음엔 그러려니 흘려듣던 너의 이 한 마디가 이제야 비수처럼 가슴에 꽂힌다.
아무렇지 않게 뱉은 투박한 한 마디가 실은 굉장한 의미심장함을 내포하고 있었음을
난 왜 이제서야 알아챈 걸까 멍청이 같이..
그래, 비록 조금 거칠긴 해도 너의 순수함은
그것에 걸맞은 상대를 판별할 능력쯤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어.
비록 초라해 보여도 너의 소박한 지혜는
"적어도 넌 아니야!"라고 판단할 정도는 되었건만,
그걸 난 간과했었어.
널 여신인 양 찬양하는 순간에도 내 무의식은이 거지 같은 사회처럼 서열을 매기고 네 위에 군림하여 널 적당히 무시했나 보다.
너란 여자를 만나려고 이토록 발버둥 치면서도
네가 여자임을 난 왜 이리 자주 망각하는지..
천생 여자이므로 여자의 본능이 날 거부할 수도 있는 것을...
걸맞은 상대가 아니란 네 완곡한 표현 안에서 - 서열상 열세를 순순히 인정하는 - 착한 아이만을 보고
혼자 오버하여 감동하기 급급했던 난,
이래저래 아직 멀었나 보다
네 마음속 아픔을 알고 보듬어 줄 든든한 남자가 되기에는.
여자의 자존감을 북돋아 줄 센스 있는 남자가 되기에는..
진정한 남자가 되기에는...
멍청한 순수에 매몰되어 여자의 언어를 해독하는 데 게을렀던 점, 뒤늦게 후회한들 뭔 소용 있을까마는늦었다 생각할 때가 진짜 시작이란 얘기처럼 이제부터라도 심기일전하여
사랑의 시행착오를 줄여 나아갈까 한다.
시적 흥취가 폴폴 나는 감상적 연애 이론에 도취하지 말고,
여자를 여자로 볼 줄 아는 세련된 현실 감각을 열심히 길러야겠다.
그래서 너에 "걸맞을" 수 있는 남자로 거듭나야겠다.
방 안에 갇혀 사랑을 표구하는 꼼꼼한 문학소년에서 벗어나,
생동하는 몸짓으로 현실을 휘저을 줄 아는
그렇게 여자를 사랑할 줄 아는
행동하는 남자가 되어야겠다.
그러니 아직은 속단 말고 내게 기회를 더 다오.
무책임한 열정으로 훅 하고 다가와 다짜고짜 사랑을 갈구하는 내가 여전히 못 미덥겠지만,
청춘의 소중한 열병이 헛되이 낫지 않도록
쉽게 찾아온 정열이라 쉽사리 꺼져 버렸단 소릴 듣지 않도록
이 순간부턴 책임 있는 사람이 되어 볼께.
꿈꾸던 사랑이 결실을 맺을 수 있게 책임지고 우리의 사랑을 관리해 볼께
믿음직한 행동으로.
이 또한, 상대의 양해를 구하지 않은 내 멋대로의 다짐일 수 있겠구나.그럼 말해보렴. 넌 내가 어땠으면 좋겠니..
현재 이성을 사귈 수 없는 (사귀어선 안 되는) 기구한 상황이거나 혹은
내가 뭘 해도 싫은 (진저리 쳐지도록 내가 싫은) 것만 아니라면
나도 희망이란 걸 가져볼 수 있잖아. 그치?
'한 땐 내가 좋아도 했던 앤데, 이런 확 깨는 짓만 안 하면 더 좋으련만..이왕이면 이렇게 대시해주지 그럼 참 괜찮을 텐데..'
이러한 생각 해본 적은 정녕 없는 거니? 네가 원하는 내가 되도록 노력할게.
만약 고분고분한 건 딱 질색인 (한 성깔 하는) 너라면 부담 갖지 말고 수동적인 나를 리드해보렴.
(지금 이대로의 내가 좋다면 나야 땡큐지만 가능성은 가장 희박한 시나리오일 테지..)
이렇듯 머쓱해지는 내용을 굳이 편지로 주고받는 것도 이상할 것 같긴 해. 그러나 네가 날 만나주지 않으니 어쩌겠어.일방적이었단 명분을 더는 대지 않게 통화 말미 구체적 만남을 확약받았어야 하는 건데..
그러지 못한 걸 뼈저리게 후회할 뿐.
(너무 들이대서 가뜩이나 경계하는 널 더욱 자극하기가 싫었다면 비겁한 변명일까.)
어쨌거나 매몰찬 거부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난 이렇듯 미련을 못 버리고 오늘도 집념을 불사른다.
기껏 편지질이나 하는 주제에..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우린 왠지 결국엔 만날 운명인 것 같다.만나면 즐겁게 데이트만 해도 시간이 부족할 테니
제법 진지한 이야기는 편지로 허심탄회하게 나누자꾸나.
(이마저도 일방적이라면 일단 사과 하마.
그러나 방법이 없잖니. 탐색하다 진 다 빠지는 통화는 공허하기만 하고..)
삐까뻔쩍한 미사여구 화려체를 바라는 게 결코 아니니,
숙달 안 된 글쓰기라 어색하다 빼지 말고
내 눈을 보고 말하듯 거짓 없는 진심을 담담히 적어다오.
(어후, 나 같아도 부담되겠다. 쏘리!)
같이 심각해지잔 것도 아니니 부디 가벼운 마음으로 답장을 시도해다오.
추신에 적어놓은 학교 주소로 보내다오.
(그간 집으로 날아온 내 편지들이 난감했다면 너도 수신 가능한 다른 주소를 알려줘.)
호르몬 과다 작용으로 그냥 필이 빡 꽂혀서 앞 뒤 안 재고 미친 척 몸부림 좀 쳐본 것까진그리하여 상대의 직접적인 반응을 유도한 것까진
뭐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젊음의 행태였다 치고,
앞으로가 참 중요한데 말이지..
내 여전한 풋사랑이
드디어 상식과 비상식의 갈림길에 다다른 것 같다.
어쩌면,아직도 이렇게 편지나 쓰고 있다는 자체가
이미 게임 끝났음을 의미하는 걸지도..
네게 걸려온 전화를 받았을 때 당황하거나 머뭇거리지 말고 바로 승부를 걸었어야 했어.
남녀가 서로 좋아지는 게 무어 그리 복잡한 메커니즘이라고 지레 겁부터 먹었는지..
여자가 먼저 전화했으면 칠십 프로는 먹고 들어간 건데
무엇이 그렇게 자신 없어서 다 잡은 고길 칠칠치 못하게 놓치고 말았는지..
삼십 프로의 용기만 가지고도 일사천리로 만남은 성사되었을 텐데..
설사 경미 네가 "일반 남성의 상식적인 시도"조차 통하지 않는 여자라 해도
막상 저질러 보지 않고서 어찌 그걸 알 수 있으리.
일단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쿨하게 접을 줄 아는 것도 연애 잘하는 지름길.
쉽게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난 참 어렵게 돌아가려 했고 지금도 그러고 있구나.쿨하지 못하고 질척거려 미안하다 경미야.
난 정말이지 어떻게 돼먹은 놈이길래 남들 다 아는 상식이 어렵기만 한 걸까.
우리네 평범한 삶 속에 푹 파묻혀, 학습화된 본능과 습관이 이끄는 대로만 움직여도,
보통의 그저 그런 사랑쯤 너끈히 해내고 남을 텐데.
그렇게 기계적으로 행동하다 보면, 시나브로 우리네 삶과 융화하여 가정을 잘만 꾸리고 있을
나를 멀지 않은 미래에 발견하는 것도 어렵진 않을 텐데.
남들 다 잘하는 "우리 되기"가 나에겐 유난히 힘겨운 투쟁이어서 미안하다 경미야.비상식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널 함부로 대하게 될 것 같아서
"나만의 상식"에 너무 많이 의존하고 있었나 보다.
한 십 년쯤 뒤면, 내 간절한 타락이
이 절절한 부자연스러움을 누그러뜨리고 저들의 자연스러운 상식 속에 스며들 수 있을까.
그때까진,
너무 절절하여 상식으론 잘 커버되지 않는 이 순결한 일탈을
부디 너그럽게 헤아려다오.
널 향한 그리움의 이 짙은 농도가 상식으로 희석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그리하여 진실로 황홀한 "세상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면,
너와 이어질 가슴 벅찬 현실로 훌쩍 넘어가 안착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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