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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괴상한 낭만이상한 연애편지 (상준 외전) 2022. 10. 28. 13:01
아..
3월이 가까워올수록, 답장을 기다리는 난 점점 초조해졌어.
곧 각박한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니까.
2월 26일 금요일 오후 2시. 너도 아는 장소.일방적으로 약속을 잡고
ㅂ동 정류장 KK제과점으로 나와달라는 당돌한 부탁을 했었지.
약속 시각 이후에 편지가 도착할 경우 29일 월요일 같은 시각 같은 장소로 나와 달라는
엉성한 치밀함까지 첨부해서 말야.
나와주지 않으면 집으로 다시 쳐들어가겠다는 맹랑한 협박(!)까지 동봉해서 말이야.
싫다는 의사도 내 면전에다 표명하길 그래서, 기한 없는 답답함이나 좀 풀어주길 감히 바랐었다. 참 이기적인 바람이지?얼굴 한 번 보는 걸로 만족하고 미련 없이 돌아설 수 있는, 깔끔한 기회를 달라고 매달린 셈이야.
약속(?)이 지켜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제과점 앞에서 두 시간을 떨고 서 있는 내내괴팍한 변덕이, 네가 오지 않아 안도하며 귀찮게 보챘다.
미련 그만 떨고 따뜻한 게으름 속으로 빨리 복귀하라고..
청승맞은 시도가 그렇게 해프닝으로 끝나고 어느 날,"우수에 찬 비련의 주인공" 놀이가 쏠쏠하니 재미져서 혼자 신나게 센치함을 즐기고 있던 늙은 사춘기한테
정신이 번쩍 드는 기합이 찾아왔다.
빠따 열 대, 싸대기 넉 대의 강도라 순간 얼이 빠져 어벙벙해지는 기적이었다.
경미 너한테서 전화가 온 것이다!
연탄보일러가 뜨끈하게 덥힌 안방에 모여 다들 주말 드라마 시청에 여념이 없던 때였지."형, 전화 받어 안경미래."
답장을 요구했으니 와도 편지로 오겠지 방심하고 있던 난
앨범 뒷장 주소록에 - 넌 번호를 공개하지 않았지만 - 내 전화번호가 기재되어 있음을 간과하고 긴장을 푼 대가로,
먹잇감 포착한 하이에나의 느물거리는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우리 집 전화 담당이던 동생으로부터 수화기를 건네받아야 했어.
그나마 전화기가 거실에 한 대 더 있어 다행이었다. (단, 안에서 엿듣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웬 일이래, 여자애가 전화를 다 주고 블라블라.."황급히 방 문을 닫아 가족들의 수군댐을 차단하고 겨우 입을 떼긴 하였으나
막상 네 목소리를 들으니 지은 죄(?) 많은 난 어디서부터 얘길 시작해야 할지 황망하여 말문이 쉬이 터지질 않았다.
안방 수화기에 몰래 귀를 갖다 대려 하시는 어머니까지 제지하고 나서야 나는 간신히 너와의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어.
낯 뜨거운 편지를 보낸 당사자가 민망해할까 봐 넌 첨부터 농담 섞인 가벼움으로 분위기를 주도하였고이에 용기 얻은 나 역시 조금은 편하게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고마웠어.
그런데..난 여전히 몽상을 원하나.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가상의 정원 안에 우락부락한 현실이 침입하는 걸 도저히 용납 못하는 것인가.
사랑이 현실을 입고 오면 그 사랑마저 멀리 하고픈 "융통성 없음"이 나의 한계인가.
나태한 우유부단은, "어른의 사랑"이 성사됨을
결정적인 순간에 망설이는가.
경미 네 음성이 정말이지..아아, 난 왜 이리 못됐을까.
같은 학교를 삼 년 간 다녔으면서도 말 한마디 나누지 못했음을, 그 엄연한 사실을 난 잠깐 망각한 걸까.
앳되고 귀여웠던 사 년 전 너와 좀처럼 매치되지 않는 걸걸한 목소리.
아줌마 같은 말투에서 묻어나는 촌티.
원래 저랬다고,
나만 못 들었을 뿐 고1의 어린 소녀 때도 저랬고 스물한 살 여인인 지금도 저렇다고,
단지 개성일 뿐이라고
자위하면서 속 좁은 편견을 스스로 책망하여도
이 요사스런 기분은 좀처럼 희석되지 않았어.
이제 와 잘잘못을 따지는 건 의미 없는 일이겠지. 어쨌든 넌 여고생으로서 온갖 풍파를 겪어온 것이고중요한 건 그러한 질풍노도에도 꺾이지 않고 당당하게 버텨온 네 의연함이야.
심리적 방황기에 술도 마셔보고 담배도 피어 보고, 견딜 수 있을 만큼, 무너지지 않을 만큼의 일탈도 감행해보면서,
그렇게 발가벗은 희로애락을 가감 없이 발산하면서, 넌 오히려
카타르시스로 충만해지는 건강미를 획득한 것 같구나.
현실을 치열하게 살아낼 수 있는 면역력이 높아졌을 테니
"잡념 없이 행동하는 삶"에도 익숙해져 있었겠구나.
그래서 씩씩하게 전화도 걸고, 나보다 여유롭게 긍정을 구사하였구나.
활기 띤 생활의 릴랙스 한 적극성 앞에서,
저 혼자 잘나 껄떡대던 약자 코스프레는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네.
그런데 네 허스키한 성대는 도무지..사 년 여의 거친 세월과 싸워 이긴 전투의 흔적, 숨길 필요 없는 떳떳한 생채기 같은 거라고
머리로는 수긍하면서도,
하이 톤의 나긋나긋함, 맑고 낭랑함을 상상하던 가슴은 당분간 충격에서 못 벗어날 것 같았어.
이것도 일종의 왕자병인가. 혹은 완벽을 꿈꾸는 강박증 같은 거?
에라이, 별 것도 아닌 것에 꽂혀서 방향 감각을 잃고 헤매는 꼬락서니라니..
전상준표 낭만으로의 몰입을 방해한다면 낭만의 대상마저 소외시킬 심산인가.
나란 놈, 입장을 바꾸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연습이 많이 부족했나 보다.
연정에 눈멀어 앞뒤 안 가리고 네게 뛰어든 것까진 오케이 그럴 수 있다 치자.
문제는, 기본도 안 되어 있는 내가 이런 식으로 네 마음을 자꾸만 아프게 할까 봐..
경미 너라고, 전화선을 타고 들어오는 내 촌스러운 목소리가 적응이 되었겠냐만,
인간에 대한 기본적 예의로써 차마 내색을 못하고 있었을 테지..
적잖이 실망스러워도 너는 표현하지 않는데,
(연애편지란 허울 아래 미주알고주알 다 드러내고 표현하는 이 자체부터가 잘못 꿴 첫 단추인지도..)
내가 뭐나 된다고
이리 요란을 떨며 기어이 네게 상처를 입히려는 것인지..
미안해..
정제되지 않은 감상을 사랑의 대상에게 마구잡이로 투척하는 난, 가학적인가 피학적인가..
감정의 롤러코스터가 너를 기분 나쁘게 한 것은 물론이요
(어리석음이 남긴) 날카로운 회한으로 내 심장을 이리도 아프게 긁어대니,
결국 둘 다에 해당하는 셈인가.
바벨탑처럼 쌓아 올린 진정성이 하루아침에 가식이 되어 우르르 무너져내리는
지금의 형국을 난 과연 바로잡을 수 있을까.
용서해 줘..
고작 목소리 하나에 무너져 내릴 순정이라면, 직접 만날 경우엔 어떤 사달이 날지 안 봐도 비디오.
상상에 얽매어 현실과 동떨어진, 경망스러운 선입견에 휘둘리는, 진중치 못한 순정이라면
그깟 것 개나 줘버리라지!
요렇게 머리로만 하는 자아비판이 무슨 소용 있으랴기대에 조금만 어긋나도 파르르 떨리는 새가슴도 컨트롤 못 하면서.
정말이지 거듭 미안하다.
젠체하는 복잡함 뒤에 숨은, 이 용렬한 단순 무식을 용서해다오.
"설마.. 죽진 않았겠지? 부디 그러진 마."편지 속 나의 비장한 멘트가 널 또 웃게 하였나 보구나.
웃음기 많았던 네 본래 모습을 회복케 하였나 보구나.
(번지르르한 장식용 편지가 이렇듯 소박한 순기능 하나는 가지고 있었네. 다행이다.)
아니 진작에 여유와 유머를 갖춘 매력적인 여성이므로,
첫 통화의 쫄깃한 순간에도 대담한 농을 아무렇지 않게 던진 거겠지.
"응, 나 죽었어. 그러니 어쩌지? 후훗.."
그래, 넌 깨끗이 죽었는지도 몰라.비탄과 허무에 빠졌을지 모를 너,
삶의 회의에 휘말렸을지 모를 너,
열등감으로 치를 떨며 젊음의 에너지를 까닭 모를 분노로 소모했을지도 모를 너,
죄의식의 폭풍우 속에서 길을 잃고 낭패감에 젖었을지도 모를 너,
자포자기와 무절제로 쾌락을 빨아댔을지 모를 너는
이제 없어.
(네 곁에 함께 있지 않았으니, 함께 있어도 다 알 수는 없었을 테니,
온통 추측과 가정인 것은 당연.
그러니 문자 그대로, 저러저러한 넌 첨부터 "존재치 않았을" 확률도 있지.
하지만 현실에서 저것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난
아직도, 저것들을 끌어안은 삶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녀는 화형 당하여 그 검은 재가 암흑의 우주 저편으로 영원히 날아가버렸는지도 몰라.
오염됐던 영혼이 본성을 되찾아 방금 말갛게 솟아난 참모습으로 네가 내 신호를 받아주는 것이라면..
이 기막힌 타이밍이란..
지금보다 먼저 혹은 지금보다 늦게 널 찾았다면 난 철저히 무시당했으리라
불 같이 포악한 낭만도, 얼음보다 차가운 정염도, "현재의 나"를 필요로 하진 않았을 테니..
그렇담 너의 참모습이란..?어떤 식이든, 네게 도래한 전성시대.
아무것도 모르는 큐티한 순진함도
진화(!)하면 농염한 백치미를 거쳐 원숙한 사랑이 되지.
원숙하게 다가온 너에게 걸맞은 내가 되어야 할 텐데..
그것이 진정한 타이밍인데...
햇빛 머금은 이슬 달고 잎사귀 위에서 꿈틀대는파란 애벌레 본 적 있니?
곁눈질 말고 똑바로 주시해 보면 징그럽다기보단 색이 이쁘고 청초한 것이 귀엽기까지 하단다.
그러나 느릿느릿 굼뜬 움직임은 답답하다 못해 지루할 정도지. 삼 프로 부족한 아름다움이랄까.
아쉬우나마 기특하던 슬로모션도 멈추고 몸 주위가 온통 허물로 덮이면
우중충한 빛깔의 번데기는 생명의 온기 없는 낙엽 부스러기 같아서,
짓궂은 개구쟁이들이 가지고 놀다 밟아버리지나 않을지..
마음의 동요 없이, 측은지심도 없이..
그런데, 이처럼 흉물의 생을 반드시 거쳐야만 수려한 나비가 되어 화려한 날갯짓으로 도약할 수 있다는 사실.
잔인한 훼방꾼들한테 희생되지 않고 (변화무쌍한 보호색으로) 꿋꿋하게 버틴 애벌레와 번데기만이
허물 벗을 자격을 얻어 싱싱한 날개를 펄럭일 수 있는 법.
청순한 애벌레는 귀여우나 위태롭고, 매혹적인 나비는 비상하니 아름답구나!
천적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순 없어도,
날갯짓하는 나비가 하늘과 더 가까워 행복해 보인다.
껍데기는 죽어 땅에 묻혔지만 사랑스러운 알맹이가 살아 숨 쉬니 이로써 너의 전성기.
순진함이 성숙하여, 해맑은 모성애로 변두리 과거까지 포옹하는구나.
더도 덜도 아닌 지금, 원석이 다듬어져 다이아몬드가 되어가고 있는 지금,
"지금의 너"니까 "지금의 내"가 눈에 들어오는 것일 게야. 이를 두고 남녀의 조화라 하던가..
그러기에 이 시점, 너와 잘 되고픈 욕심이 든다.
내 의지로 얻은 기회, 놓치면 땅을 치고 후회할 것 같다.
오글거리는 미사여구의 향연에 이제 좀 적응될 때도 되지 않았니? 아니면..
자기를 얼마나 안다고 이런 발칙한 감언이설로 사람을 홀리려 하나
가소롭고 괘씸해 기가 찰 노릇이니?
그래서 실소를 금치 못할 지경이라면,
그렇게라도 너에게 웃음 비슷한 걸 줄 수 있다면, 행복하겠어..
그런 의미에서,
"참나 별꼴이야, 웃기지도 않네"보다는
"흥! 웃기고 앉았네"였으면 좋겠어.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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