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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사귀자는 건지..이상한 연애편지 (상준 외전) 2022. 11. 2. 11:42
경미야, 네 자학(?)성 조크에 내가 너무 진지하게 맞장구친 건 아닌가 모르겠다. 웃자고 한 소리에 죽자고 덤벼든 꼴이니..
지난번 편지 내용 중 "죽은 너"란 표현이 혹시 거슬렸다면 사과 하마.
내가 누차 강조했듯 그건 "지난날의 너", 이젠 돌아오지 않는 시간 속의 너를 의미함이었다.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라, 내 상념 속에서 너에 대한 부정성이 사라졌음을 일컫는 말이었어.
그러니 혹여 기분 나빴더라도 오해 풀려무나.
잔뜩 힘 들어간 어설픈 문학적 수사였음을 경미 네가 너그러이 양해해준다 하여도
어쨌든, 과거의 널 멋대로 추정한 것도 모자라 입에 올리기도 뭐한 "죽음"이란 단어까지 거론한 점은 좀 과했던 것 같아.. 미안해.
널 처음 본 고교 1학년 시절 그때의 네가 변함없이 그대로 소환되었다 해도 물론 난 무척 기뻤을 거야.
꾸밈없는 해맑음도 소중한 덕목이고 충분히 내 가슴을 뛰게 하니까. (그러나 그건 불가능하잖니!)
사 년의 세월을 타고 온 넌 애벌레도 번데기도 아닌 분명 나비였어. 너는 내게 전화를 걸어왔고 그 자체가 선명한 증거야.반응이 오지 않아 애가 타는 남자의 절절한 기다림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번호를 아는 쪽이 신속히 행동한 젠틀함.
그것은, 보듬을 줄 아는 넉넉함이고 사랑 이전의 따스한 인간애.
편지 수신란 주소지에 네가 산다는 보장이 없어서, 우편함에 쌓여가는 "네게 보낸 편지"들을현주인이 호기심으로 뜯어볼 수도 있다는 전제 하에, 우표와 봉투까지 동봉하여 심심한 사과의 멘트와 함께 양해를 구하고
백지를 넣어 발신란 주소지로 보내주십사 정중히 부탁드렸었는데..
요렇듯 순진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 나름 귀여워 한 번 정도는 연락하고픈 시혜 의식이 생겼던 거니?
(정말로 부담되고 싫었다면, 제 무덤 제가 판 내 우둔함을 실컷 비웃으며 넌 시침 뚝 떼고 백지 편지를 보내었겠지.)
그리고 통화 내용..
한 가닥 회로 속을 오가던 우리의 대화는, 너와 나 사이 간극만큼이나 대조적이었어.난 너의 거짓 없는 솔직함에 연거푸 감탄했고, 스스로에겐 - 늘 그래 왔듯 - 실망만 해야 했지.
숨 막히는 긴장으로 사고가 부자연스러워져 본의 아니게 말이 어눌해지면 이상하게 주눅 들어 날 자꾸 숨기게 되고
여유가 없어지니 자주 맥락이 끊기면서 담백하고 유쾌한 토킹 어바웃은 어느새 물 건너 가 있고.
자격지심이라면 대체 누구에 대한..? 경미에 대한..? 아니 왜??짝사랑에 눈시울 적실 땐 언제고.
앞뒤가 안 맞잖아.
내 속의 두 자아가 싸우기라도 하나? 목소리 가지고 트집이나 잡는 옹졸한 놈과
사랑의 콘셉트를 못 잡고 갈팡질팡하는 얼뜬 놈이 한판 붙었나? 도긴개긴인 주제에?
나르시스처럼 자기 감성에 빠져 똥폼 잡는 조증의 말로는 사랑 불구자인가.
현실의 경미가 떡하니 나타나, 내 머릿속 정돈된 마돈나가 위기에 봉착했나.
확신이 서지 않아 네 전화번호 따는 걸 망설였나?아니면, 편지를 선호하고 글로써 우위를 고수하려는 나의 시나리오에 첨부터 네 번호는 들어 있지 않았나?
전화 건 사람이 먼저 말해주길 바랐나? (아니, 말하지 않길 바랐나..)
이도 저도 아니면 물을 새가 없어서? 거절당하는 게 두려워서?
총체적 난국이군!
배가 산으로 가는 혼란과 진땀 속에서도 경미 넌 혼자 의연하였지. 네가 하려는 이야기의 큰 줄기를 꽉 잡고 놓지 않더군.
지금의 네 입장, 너의 심경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토로하는 듯했어.
꿀릴 게 없으니 숨길 것도 없어서였을까.
아니, 꿀릴 게 많아 버겁다는 뉘앙스로 "난 네게 걸맞은 상대가 아니야!"라고 말했지.
맘에 안 드는 이성에게 완곡한 거절 의사를 표할 때 흔히들 애용하는 진부한 문구지만,
진솔한 너에겐 곧이곧대로의 절실한 표현인 것 같았어.
그리 단정하는 네 마음엔 너무도 소박한 착한 심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나의 직감은 알아.
그래서 난 물러서지 않고 확실히 말해줄 테야
그건 잘못된 생각이라고.
널 버리고(?) 범생이란 타이틀을 굳게 지킨 덕에, 공부깨나 하는 녀석으로 교사와 학생들 사이에선 제법 명성이 자자해졌고그것에 어울리는 그럴듯한 대학에도 진학할 수 있었지.
적성이 개무시된, 학교의 "밀어붙이기"식 진학 정책 덕택이랄까. 비꼬는 건 아니고 뭐 사실이 그렇단 얘기.
희생양을 자처하며 고뇌하는 지성인 양 우쭐하는 게 내 취미이긴 하나, (남들 다 까는) 국가 교육 정책, 학교 지도 방식 까는 일에 나까지 동참하고 싶진 않네.
적성이 뭔지 알면 뭐해.
어차피 소수의 천재가 아니고선 주야장천 적성 붙잡고 있어 봐야 자아실현은 하늘의 별 따기.
(자수성가한 이들은 그럼 뭐냐고? 뭐긴, 노력으로 하늘의 별을 딴 운 좋은 사람들이지..)
친절하게 적성 발굴해줬어도 내가 거부했을걸. 우리 같은 범부는 남들 사는 만큼 살아내는 것도 녹록지 않잖아.
고상하게 적성 따지는 건 속 편한 귀족들이나 하는 짓이고, 우린 그저 먹고살기 위해 몸부림치다 갈 팔자.
피라미드 상층 기득권이 아닐 바엔 살벌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각자의 주관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수밖에.
자신 만의 행복 비법을 터득할 수만 있다면, 돈 없고 빽 없고 애인 없고 친구 없는 루저라도 사는 재미가 생기겠지.
혁명이 간절한 시대에 비겁자로 낙인찍힌 젊음이, 두려운 현실과 미래를 피해서 가상의 파라다이스로 도피하고 있다.
작정한 퇴행이, "아낌없는 사랑으로 날 아프게 하는" 부모를 벗어나지도 못하는 주제에, 자괴감 없이 안길 가상의 연인을 찾아 뒤틀린 착각의 저편으로 넘어가고 있다.
내가 너에게로 가고 있다. 행복하려고..
이른바 일취월장의 단맛에 길들여진 나와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였고 따라서 활동 반경도 거의 겹치치 않는 너였지만,
좁은 교내에서 이러한 내 소식이 네 귀에까지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
뭣도 모르는 범생이를 만나봤자 X나 따분할 뿐인 (놀 줄 아는) 너에게 난 도저히 "걸맞은" 상대가 아니었으리라.
파란만장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해도 본디의 명랑함, 뒤끝 없는 쾌활함은 어디 가질 않았을 테니
음울한 자격지심 그딴 구질한 걸 넌 키우지 않았을 거야. 그치?
그래서, 내가 삼 년 내내 널 좋아하고 있었으리란 생각을 넌 꿈에도 못한 채,
첨부터도 네게 다가가지 않은 나였기에 날라리가 돼버린 너를 뒤늦게 거들떠볼 일은 더더욱 없을 거라 속단하여
일말의 미련까지 싹 다 접었던 거로구나.
그리고 그런 쿨한 단념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라, 오버하는 범생이의 고리타분한 편지 몇 통에 쉽사리 흔들릴 성질의 것은 아니겠구나.
갑작스러운 충동으로 시작된 가슴앓이가 피 끓는 애모를 잠 못 이루고 써 내려간다 한들,
이러한 그녀에게 새삼 무슨 감동을 줄까.
그녀가 몰랐던 (나도 몰랐던) 내 사랑을 내가 강력히 피력한다 한들,
몇 년이란 세월이 흘러 누군지 기억도 희미한 나에게서 그녀는 과연 감흥이나 느낄 수 있을까.
나조차 헷갈리고 믿음이 안 가는 진심인데, 그녀 가슴엔들 와닿을 것인가..
방법은 한 가지.
그녀도 갑자기 내가 못 견디게 그리워지는 얄궂은 체험을 하게 된다면 또 모르지.
하지만, 나와는 코드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방식이 아예 다른 그녀일진대, 그것이 가능할 리 없잖은가..!
정곡을 찌르는 센스로 여심을 후리는, 섹시한 글솜씨가 부족하긴 해. 인정.
스스로도 갈피를 못 잡는 지루한 만연체, 반성한다.
그러나 수단이 목적이 되어선 안 돼.
널 사랑한다 천명하는 게 끝이 아니고, 널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모색하고 강구해야 해.
펜을 들고픈 욕망이 생길 때마다 초심으로 돌아가 고민하고,
널 기쁘게 할 더 좋은 대안이 있다면 과감히 펜을 분질러야 해.
전화 걸기, 찾아가기, 만나 얘기하기, 데이트 하기, 정 쌓기, 사랑 나누기 등등..
내 사랑이 거짓이 아님을 단계적으로 증명해야 해.
너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해야 해.
거절당할 것을 두려워 말고 계속 시도해야 해.
내가 살아있음을, 내가 살아 움직이는 실체임을 그렇게 어필해야 해 지속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용기 내지 않으면, 널 놓치게 될 거야. 그걸 잘 알지만..
알아도 어찌할 도리 없는 나일까 봐, 그렇게 생겨먹은 운명일까 봐, 무서워...
무례한 (그러나 싫진 않은) 열정남을 대하는 여인 특유의 발랄한 자존심이 경미 너에게도 있었나 보다."약속이 아니고 일방적 통보잖니. 안 만나준다 해서 네가 날 원망할 자격 없어!"
톡 쏘는 이 한 마디가 내겐 당황스러우면서도 그다지 어색함을 주진 않더군.
약간씩 튕기는 듯한 말투가 통화 내내 계속되었지만 전혀 거슬리지 않았어.
오히려, 차가움과 재치가 적당히 공존하는 너의 화술에 난 내심 감복하고 있을 따름이었지.
"형 전화받아. 안경미래. 과 친구라는데?"
너의 능청스런 연기가 나를 잠시 멍하게 만들어, 우리 과에 그런 이름 가진 여자애가 있을 법도 하단 착각까지 유발하더라.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직감하면서도 한편으론 반신반의하는 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지.
그 장난기 다분한 거짓말은 누굴 위한 배려였니. 날 위한? 아니면 널 위한? 뭐 어쨌든 재밌었다.
덕분에,
방학 기간인데 같은 과 여학생이 무슨 일로 전화를 줬냐고 신문(?)하시는 어머니 앞에서
대충 얼버무리느라 진땀도 빼고.
아까도 얘기했지만, 처음 전화받았을 땐 사실 몸이 경직될 만큼 긴장됐었어.전화 준 넌,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아는 그 안경미였으니까.
남자의 알량한 존심을 팽개치고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매달린 바로 그 여인이었으니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얼떨떨한 기분을 겨우 떨쳐내고 처음 꺼낸 말이
"그래, 요즘 뭐하고 지내니?" 였는데,
넌 다짜고짜 한방 먹였지.
밑도 끝도 없이 "응, 나 죽었어."
내 편지의 관련 문구를 재미있게 읽었다는 증거이자 위트 있는 반응,
(나와야 할 순간에 나온) 촌철살인 같은 농담이었어.
이때부터 분위기가 급선회하면서 내 긴장도 다소나마 풀릴 수 있었다.
경미야, 네 전화받기 전까진난 너에 대해 "방황하는 작은 별", "길 잃은 어린 양" 등의 편견을 품고 있었다.
좀 더 심하게는 "상처로 얼룩진 슬픈 영혼"이라고까지 생각했었어.
너에 관한 한 오라기 정보도 없이 - 내 특기인 - 망상의 한 조각을 함부로 네게 투영했다고나 할까.
그러나, 너와 대화를 나누면서,
쉽게 단정 짓는다는 게 얼마나 경솔한 짓인가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넌 그저, 건강한 몸과 마음을 지닌 평범한 아가씨들 중 한 명이었을 뿐.군더더기를 싫어하고 단순 명쾌함을 쫓는, 그러면서 적당히 순수한..
그래 적당히.. 용기 있고 솔직하고 착하고 자존감 있고 재치 있고 유머러스하고,
게다가 아가씨에게 필요한 "적당한" 두려움까지..!
선사 이래로, 허점(?)을 보이면 돌변하는 음흉한 남심을 경계하고 다루는 여성의 기술이 계속 진화되어 왔지.
호감을 주는 남성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야.
너무 쉬운 여자로 보이면 득보다 실이 많음을 잘 알고 밀고 당기는 기술을 적절히 구사하지.
일종의 기분 좋은 경계랄까.
허스키한 중음의 보이스로도 마스킹되지 않던 그 미세한 떨림은,
센 척하는 너의 수줍은 긴장과 두려움이었니?
남자인 내게도 막연한 두려움은 있어.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기뻐. 적어도, 다른 누구처럼 네게 함부로 하진 않을 테니까.
공포심이나 거부감 같은 건 당연히 아니야. 자다 깨서 베개를 적실 정도로 그리운 너이므로..
대자연의 섭리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듯 너에게 경외심을 가진다면 믿겠니?
널 존중하고 싶고, 너와의 조화로운 공존을 위해 노력하고 싶은, 내 절실함이 느껴지니?
이렇게 번지르르한 말잔치,
점수 깎일 각오하고 하는 추상적인 고백들,
따분해도 그냥 이쁘게 봐주렴.
나에게 가지는, 너의 단순한 호감 아니 호기심만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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