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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미련한 시도, 달콤한 허탈이상한 연애편지 (상준 외전) 2022. 10. 26. 01:26
3학년.
고등학교의 마지막 봄소풍이었지.
지난 십일 년 동안 한 번도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구경만 해오던 오락 시간에, 전교생이 둥그렇게 둘러앉은 자리에서, 무슨 용기가 났는지 난 죽이 잘 맞던 같은 반 친구와 함께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를 쥐고 어쭙잖은 솜씨를 뽐내며 팝송을 부르고 있었어. (아마, 전설적인 듀엣의 명곡이었을 거야.)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보는 건 생전 처음인지라 너무 부끄러워 얼굴은 금세 홍당무가 되었고
친구의 멜로디에 서투른 화음을 넣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수많은 시선이 나를 발가벗기는 곤욕스런 순간에 갑자기, 아득한 각성이 찾아오더라.눈앞이 캄캄해지고 주변의 소음은 사라지는데 여기저기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만 증폭되어 귀를 간지럽혔어.
될 대로 되라는 포기가 긴장을 쫓아내고 몽롱한 환각을 불러오는, 소소한 기적.
그래, 경미 네가 날 보고 웃네.
불쑥 다가와 공간을 채우는 어여쁜 환상이,
내 용기가 가상한지 날 보며 박수를 다 쳐주네..
며칠 뒤, 사진을 찍어주기로 약속했던 급우가 현상된 몇 장을 건네더군.쥐구멍 생각나는 쑥스러운 피사체들을 급히 넘기던 손이, 아주 멀리서 찍어 백여 명이 다 들어오는 사진 한 장에 멈추었다.
주인공과 배경의 구분을 무색케 하는 촘촘한 머리들 사이에서, 귀퉁이를 장식한 "벅찬 실재"가 빛을 발하며
그때 날 덮친 생생한 환영이 오롯이 환영만은 아니었음을 입증하고 있었어.
롱샷 속에서도 더욱 멀리 있어 이목구비조차 선명하지 않았지만 분명 느낄 수 있었어
네가 포착됨으로써 2차원 평면 위에 생기가 돌고 종이에선 파릇한 정감이 배어 나오고 있음을.
마이크 잡고 얼어버린 나를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는 너..
저렇듯 티 없이 해맑은 웃음꽃이 실제 있었기에
그 내음으로 그날 나를 환상에 취하게도 하고 각성하게도 했나 봐.
사진의 덫에 갇혀 박제된 "찰나의 스마일"이, 기분 좋은 착각을 수도 없이 유발하더라.그 웃음의 의미를 굳이 여러 갈래로 해석해 일희일비하는 청승마저, 알싸한 그리움의 기대에 찬 두근거림이었지.
만약에 네 웃음의 상대가 나 아닌 같이 노래한 친구라면 어떡하나,
날 위해 웃어준 게 틀림없다고 믿는 그 믿음이 오해로 판정 나면 어쩌나 초조해하기도 하고.
또, 노래 실력이 형편없어 비웃는 중 아니었을까 지레 걱정도 해보고. (그렇다기엔 너무나 꾸밈없는 밝음이 아니던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노래라서 기뻤던 거니?기특한 용기를 대견해하는 "엄마 미소"도 살짝 묻어나 있었던 것 같고..
소심해 여자와 말도 못 섞던 애가 웬 일로 장기자랑에 다 참가했나 싶은,
그런 흐뭇함 말이야.
(그나마 사라져 버린) 감질나던 미소가
중간 과정 생략하고 저리 화사한 함박웃음으로 급 도약하다니!
비록 사진 속이긴 하나, 날 향해 아낌없이 베풀던 천진한 호감이 참으로 오랜만에 회생한 것 같아 반갑기 그지없었어.
경미야, 지금 넌 무엇을 하며 지내니.대학에 갔니? 직장을 다니니? 아님 일찍 결혼하여 남편의 사랑을 받고 있니?
하루하루가 보람차니? 아니면 나처럼 방황하고 있는 거니.
설마.. 죽진 않았겠지?
부디 살아 있어 줘..
생사도 모르고 처량하게 편질 띄우는 비참함은 견디기 힘들어...
경미야, 지금 네 마음은 어떠하니.관심 밖으로 사라져 흔적만 남은 남자가 몇 년 후 갑자기 정체를 드러내고
좋아했다면서 연서 같지 않은 연서에다 사변과 장광설만 잔뜩 늘어놓고 있으니, 참 난감하지?
답장이 없으면 그게 무슨 신호인지 즉각 눈치채고 떨어져 나가야 하는데
이건 뭐 자기도취에 빠져 센스 없이 줄편지질이나 하고 있으니 말이야.
그래서 기분이 나쁘니?
아니면, 너도 나처럼 세상 살아내기가 팍팍하여 나 같은 별종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는 거니?
내 현학적 시름과 고뇌는 귀여운 앙탈에 불과할 만큼
세상 앞에서 너의 내면은 변화무쌍하게 요동치고 있는 거니?
증오로 가득 찼다가, 허탈했다가,
우울했다가, 즐거웠다가,
황홀했다가, 가소로웠다가, 그도 저도 아닐 땐 잔잔한 호수와 같았다가..
(이렇게 나열하다 보니, 왠지 내 편지에 대한 반응들일 것 같아 쓴웃음이 지어지는구나.)
너의 현재 감정은 고려치 않고 일방적인 내 논리만 줄기차게 피력한 것 같아 미안하다.그러나, 너와의 보잘것없는 추억이 민망하게 회춘하여 느닷없이 절절해진,
짝사랑을 더는 가슴에 묻어둘 수 없었어.
심심하여 졸업 앨범을 뒤적이다 어이없이 찾아온 열병.일진의 포스를 발산하는 사진 아래 또렷이 박혀 있는 이름 석 자,
안 경 미.
섹시한 카리스마가 보강되었어도 미처 가려지지 않은 청순미, 상처로 얼룩진 가련한 그것이
날카로워진 콧날 아래 널브러져 결박을 풀어달라 애원하는 것 같았다.
(세상과 타인이 뱉어 낸 그리고 너 스스로 뱉어 낸) 만성적 살벌함에 일상처럼 시달려왔을 맑은 영혼이 가여워,
울컥하는 연민을 펑펑 쏟아내고 말았어.
그때 섬광처럼 뇌리를 스쳐 간 생각.
아아, 무조건 만나야지.
만나서 아무 얘기나 실컷 나누고 싶었어 미치도록..
앨범 뒤에 적혀 있던 주소지.전화번호가 누락된 주소지만 내겐 오아시스 같았어.
찾아가자!
버스로 통학하던 모교에서도 한참을 벗어난, 외곽의 시골스러운 동네..
논과 밭이 함께 어우러진 낡은 연립주택을 찾아, 영하의 얼어붙은 동토를 무작정 걷고 또 걸었어.
가난한 대학생의 발이 되어줄 버스 노선조차 알 길 없어, 다리가 끊어지도록 정처 없이 걷기만 했어.
한 때나마 널 아프게 한 난 편하게 갈 자격이 없지..
타야 할 버스가 몇 번인지 알았어도 그냥 걸었을 거야.
그리운 널 목표로 하는 달콤한 여정이기에, 15킬로미터 이상의 이를 악 문 행군이 고통스럽지만은 않았어.군부대를 두 세 곳이나 지나, 물어 물어 간신히 도달한 곳에, 이제 너만 있으면 돼.
살을 에는 찬 바람을 맞으며 네다섯 시간을 헤매어 너의 문 앞에 섰건만..
난 역시 소심한 놈인가 봐.
결정적인 순간, 벨을 누를 그 사소한(?) 용기는 왜 또 사라진 건지..
네가 집 안에 있고 없고는 중요치 않아. 외출했으면 기다리거나 다음에 또 오면 되니까.문패가 없어 백 프로 맞는 주소인지 확신이 안 든다면, 더더욱 벨을 눌러 네가 사는 집임을 확인했어야잖아.
그런데 그러지 못했어.
네 집이 아닐 경우의 바보 같은 헛수고를 인정하기 싫어서였을까.
너의 부모나 가족을 대면하여 내가 누군지 밝혀야 하는 상황이 겁나서였을까.
말도 안 돼. 그런 이유들은 아니야! (아닐 거야..)
단지 널 만날 준비가 덜 되었을 뿐.
그래서 이건 아니다 직감했을 뿐.
기절하고픈 피로감이, 추운 겨울 땅거미 내리는 하루를 서둘러 마감코자
내 주특기인 서글픈 합리화를 다시 작동시키는 순간이었지.
주소지에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는 안전한 방식으로의 급선회."이 고지가 아닌가벼" 하고 퇴각을 명령하는 나폴레옹의 당당함과, 죽을 맛인 병사들의 심정이,
내 안에 함께 자리하는 순간이었어.
만족될 리 없는 차선책에 억지로 만족하면서,
절뚝거리는 배고픔이 이번엔 당연하다는 듯 - 오던 길의 반대로 가는 - 아무 버스나 올라탔어.
그러면 그렇지.
푸근한 누이 같은 안내양의 초탈한 추파에도 경직되는 주제에 무슨 드라마틱한 만남?
아직 멀었어 난..
이런 편지들을 읽고도 내가 누군지 기억이 안 난다면, 심심해 주리가 틀리는 놈의 장난질이나글 쓰고 싶어 환장한 자격 미달 작가 지망생의 거짓투성이 형편없는 습작쯤으로 치부해버리렴.
그리고 읽어볼 가치 없는 이것을 찢어버리든 태워버리든 하렴.
그러나 내가 누군지 짐작이 가고,
과거에 머물러 새로운 사랑을 갈망하는 딱한 스무 살에게
지난날 한 때나마 풋사랑이었던 상대에게 - 내가 네게 그러하듯 - 앞뒤 안 재는 연민이 생긴다면,
답장을 다오.
아니 짧은 메시지라도 좋아 친구로 지내자는.
물론, 넌 이미 이사 가고 없는 (너와는 상관없게 된) 곳으로 부쳐진 편지라면반송되거나 행방불명되겠지.
그것은 미련한 자업자득의 당연한 결말.
그렇다면,
내 배부른 절망도, 주인 잃은 편지와 함께 부디 행방불명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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