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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연민..이상한 연애편지 (상준 외전) 2022. 10. 24. 01:23
내 소극적인 태도가 초래한, 한동안의 잠잠함.
그것이 길어질수록, 커가는 그리움을 나는 떨쳐낼 수 없었다.
겉으론 아무 일 없듯 굴어도, 간헐적으로 널 접할 때마다, 애써 평정한 마음은 출렁이는 파문을 일으켜야 했다.
부지불식간에 죄인이 되어버린 나.널 보면 왜 죄의식이 느껴졌을까.
너와 난, 절절한 스토리를 공유한 (우여곡절 풍성한) 연인 사이가 아니었는데.
사실, 흔한 대화 한 번 나눈 적 없는 남남일 뿐이었는데..
너와 나 사이 불미스러운 사고가 발생한 것도 아닌데 그저 네게 미안할 따름이었어.
그래서 널 더욱 피하게 되었지.
언제부턴가, 길 저편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네가 걸어오면 난 화들짝 놀라 얼른 몸을 숨겨야 했다.
그리고는 네가 어서 지나가기를 기다렸지.
멀어져 가는 너를 한참 보면서 까닭 모를 (아니 알 것 같은) 슬픈 감정에 휩싸이기도 했어.
경미 넌 아주 예쁜 편은 아니었지만동글동글 귀여운 얼굴이라 뭇 남학생들의 두근거리는 시선을 제법 많이 받았었지.
어느 날 너와 어떤 남학생이 얘기 나누고 있는 광경을 난 우연하게 목격하고 말았다.
무척 다정해 보였어.
그렇게 넌 무리 없이 하나 둘 남자 친구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어.
아, 질투라기보단 주제넘게 네가 원망스러웠다.
그리 쉽게 자격이 부여되는 남친 대열에서 왜 유독 나만 빠져야 하는 것인지.
먼저 다가서지 못하는 내가 야속하고 한심해 보여서였을까.
"과감하게 표현된 여심"을 외면한 냉정한 못난 놈은 더 이상 가망이 없어
넌 가느다란 희망마저 접어버린 것이겠지..
단지 그것이 이유라면,
(이보다 더한 이유가 어디 있다고.. 내가 생각이 짧았다.)
너의 남친들은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는 데 인색하지 않았단 거니?
그들은 하나같이 무릎 꿇고 사귀어달란 프러포즈라도 했단 말이니?
속절없이 사라져 가는 너의 희미한 자취를 움켜쥐려 애쓰면서 나는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곤 하였다.고2 때던가,
유리창에 반사된 햇살이 알알이 부서져 흩어지는 화창한 오후의 어느 날이었지.
방과 후 텅 빈 교실의 창틀 쪽 구석에 앉아 멍 때리며 상념에 잠겨 있을 즈음
돌연 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친구와 담소를 주고받으며 건물로 들어오더구나.
분명 네 얼굴인데 이전과 달리 생소한 분위기가 강하게 느껴졌어.
그리고 그 느낌의 원인을 금방 발견할 수 있었지.
변화된 헤어스타일..
줄곧 유지해왔던, 양갈래로 땋은 머리,내게 깊은 첫인상을 심어 준 앙증맞던 말괄량이는 간 데 없고,
도회풍의 성숙한 쇼트커트가 깡똥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너와 관련된 (나만의) 애틋한 추억이 일거에 무너져 내리는 서늘한 경험이었어.
가슴을 짓누르는 먹먹함에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그 후로, 속없이 웃어주던 앳된 갈래 머리를 다시는 볼 수 없었고,
이것이 또 나를 슬프게 하였다.
변한 건 머리 모양만이 아니었어.널 두르고 있던 순진함의 태가 어느샌가 벗겨져 있었고 (순전히 내 추측일 뿐이야. 기분 나쁘다면 사과할게.)
그것은 널 향한 나의 애정을 연민으로 바꿔놓기에 충분한 변화였다.
또 어떤 날은, 복도를 걷다 너와 마주치게 되었지. 실로 오랜만의 해후였어.그런데..
너의 트레이드 마크인 수줍은 듯 엷은 미소를 내심 기대하던 나의 예상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넌 싸늘한 표정으로, 시선도 맞추지 않은 채 계단을 총총 내려가 버렸어.
난 민망함도 잊고, 차갑게 굳어 있던 너의 뒷모습을 쫓기 바빴다. 공허한 눈빛으로..
그때 네가 입었던 청자켓 등 부분엔 의미를 알 수 없는 영어 문구가 새겨져 있었어.
칠판에 적혀 있었다면 물론 번역 가능했겠지만,
원체 작게 새긴 데다 넌 점점 멀어져 가니 그 뜻을 파악하기란 당연히 어려웠지.
그래서 내 멋대로 해석하고 말았다.
"난 예전의 순진했던 경미가 아니야. 너 같은 샌님 이제 관심 없어!"
넌 자꾸만 타락(?)해 갔고
그에 따라 나의 당돌한 연민도 깊어져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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