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13. 현실 인정, 쓸쓸한 포기
    이상한 연애편지 (상준 외전) 2022. 11. 30. 03:39

     

     

     

     

     

     

     

     

     

    그리운 경미..

     

     

     

    내겐 지금 그리움이란 감정이 절실한가 봐.

    그리움의 대상이 누구든 무엇이든 그런 건 부차적 문제인지도 모르겠어.

     

    신을 절실히 그리워하면 독실한 신자가 되겠지.

    자연을 사랑하여 이상향을 꿈꾸면 투철한 환경 운동가가 되겠지.

     

    난 무엇이 되고자 그리워하는 건 아닌 것 같아.

    또, 그리움의 끝에 무엇이 되어 있는 것도 원하지는 않는 것 같아.

     

    그냥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살고 싶어.

    아니, 그렇게 살도록 운명 지어진 것 같기도 해.

     

     

     

    그리워서 보고파서 용기 내어 다가가는 것까진, 아마 누구나 그러하듯, 나 역시 마찬가지일 거야.

    그러나 그리움의 대상을 획득(?)한 이후부터

    그 "누구나"들과 나의 차이가 존재하면 어쩌지?

     

     

    상대도 날 마음에 들어하도록, 날 연모하도록

    좋은 모습 보여 주며 열심히 노력하며

    쌍방 간의 진정한 사랑을 성숙하게 이뤄내는 것이,

    평범한 "누구나"가 하는 다음 단계겠지.

     

    때로는 대립하면서 때론 화합하면서 미운 정 고운 정에 익숙해지는 삶,

    궂은날 슬픈날엔 서로의 위로가 되고, 좋은 날 기쁜 날엔 서로 축하해 주는

    다사다난한 삶을 공유하며,

    어쩌면 평생의 파트너가 될지도 모를 친밀감을 쌓아가겠지.

     

     

    그러다 도저히 견디지 못할 만큼 갈등이 심해지면 냉정하게 헤어짐을 대비하기도 하고,

    이별 후에 못 잊어 재회하기도 하는 그런,

    우리네 "누구나"들의 익숙한 패턴과 내가 혹시라도 차이를 보이면 어떡하지?

     

    해보지도 않고 망설이는 우유부단의 차원이 아니라,

    아예 그렇게 태어나 온몸의 세포가 - 파노라마 같은 - "예정된 인생"을 기억하고 있으면서

    그 방향으로 나를 악착같이 밀고 있다면..?

    그럴까 봐 겁이 나.

     

    안 보면 곧 그러워질 대상을 바로 옆에 붙여두고도,

    멍하니 초점 잃은 그리움이

    시공과 시공 사이를 두리번거릴까 두려워.

     

     

     

     


     

    8월의 열대야가 유난히 기승을 부리는 오늘

    너에게 보낼 마지막 편지를 쓰는 내 심정이 참담하다고까진 할 수 없겠으나

    굳이 진부한 비유를 들자면 명치 위에 큰 돌을 올려놓은 듯 무척이나 답답하구나.

     

    너의 미지근한 반응엔 이제 많이 익숙해져서 그로 인한 실망이나 자괴감은 졸업한 지 오래이므로,

    옹졸함을 감추려는 입발린 소리가 아니라

    정말이지 너 때문은 아님을 우선 분명히 해둔다.

     

    염세적인 성격의 소유자들이 겪는 (개인적 성질과 연관된) 증세가 아니라,

    인간의 집단 무의식에서 배어 나오는 (실체가 불분명한) 절망과 허무가

    두루뭉술하게 범벅이 되어 가슴을 조여온다고나 할까.

     

    물질문명에 지배당하는 현 인류의 집단 증후군 같은 것이,

    남들보다 민감한 나를 더욱 노골적으로 괴롭히는 형국이랄까.

    (면역력이 떨어지는 사람일수록

    바이러스의 침투와 그것이 야기하는 증상에 취약한 이치랄까.)

     

     

     

    어쩌면 경미 너한테도 생소하지 않은 증세이리라.

     

    혹여 나로 인한 불면증이라면 황송한 내가 기쁘게 용서를 빌어 해결될 문제이지만,

    알 수 없는 불안이 이 순간에도 널 초조케 하고 잠 못 이루게 한다면,

    나와 비슷하여 동질감은 느낄지언정 내가 해결해 줄 방도가 없어

    아마 난 몹시도 서글프겠지.

     

     


    테두리 안의 기성 세대는 본인들 위치의 불안정성으로 번민하고 좌절하지 사회의 중심부에서.

    테두리 밖 청년 세대는 꿈과 현실의 괴리,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고뇌하고 절규하지 사회의 변두리에서.

     

    계층과 세대는 이렇듯 각기 다른 이유로 절망과 허무라는 공통의 병증에 시달리고 있어.

     

    부지불식간에 서서히 의식을 갉아, 둔감한 사람은 느끼기조차 힘든 만성 질환.

     

    그래서 더 무서운 게,

    평소엔 희석되어 의식의 기저에 도사리고 있다가

    개개인이 맞이할 "인생의 폭력", 저마다의 아픔과 괴로움이 발발하면

    과격한 형태로 농축되어, 기다렸다는 듯 분출할 수 있다는 거지.

    경우에 따라선 회생 불가능한 타격을 가하는 방향으로..

     

     


    오염된 인류의 정신이 사악하게 날뛰는 그러나 그 날뛰는 스타일이 너무도 세련되어 마치 유토피아의 춤사위 같은

    이 평온하고 희망찬 말세의 한 귀퉁이에서,

    한 없이 보잘 것 없는 나란 존재가 인류 공통의 미미한 고통을 쓸데없이 증폭하고 있나 보다.

    세상이 잠 든 새벽 2시의 고요 속에서 말이야.

     

     

     

    앞날에 대한 불안도 아니요

    좀처럼 타오르지 못하는 열정의 씨앗이 안타까워서도 아니라면

    난 무엇 때문에 이처럼 답답한 걸까.

     

    엔트로피의 증가만이 진실인 아득한 우주가 갑자기 턱 밑까지 차서 공포스럽고,

    엔트로피 증가의 기운을 받아 당당하게 타락해가는 천지가 나를 감싸고 있다 생각하니

    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생각하니 너무 무서워 절로 소름이 돋는,

    (다리가 후들거려 곧 쓰러질 것 같은) 이 놈의 공황 때문인 걸까.

     

     


    요 따위 어이 없는 두려움에 처절하게 짓눌리는 그래서 자칫 놀림감이 될 수도 있는 못난 사내에게

    과연 어떤 것이 힘이 되고 위로가 될 것인가.

     

    그래 사랑!

    아니, 감히 사랑을 논할 자격 없는 나라면 사랑 비슷한 놀음이라도..

     

    그것이 허한 가슴을 충만케 해 준다면 적어도 그 순간만은

    절망적 허무에서 헤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난 사랑이란 안정제를 시험 삼아 복용해 보기로 하였지.

     

    그런데 거창한 결심과 함께 실행에 옮긴 것이 고작 이러한 형태.

     

    사랑에 집중하면 대상이 소외되는, 나의 딜레마.

     

    행함이 없는 사랑, 이루지 못하는 사랑은, 배경만 그려진 그림.

     

    사랑스러운 피사체도 뿌옇게 번져 흐릿한 배경이 되고 마는, 저 혼자 절절한 착시.

     

    현재의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관계를 형성하진 못하고

    다 지나간 다음 빛바랜 세월을 뒤적여 소설의 주인공을 찾는,

    나란 인간의 한계.

     

    "자연스러움이 예열될 시공"을 통째로 걷어내고 뭉뚝 잘린 일상에서

    행복을 몽상하니, 모든 게 생뚱맞고 부자연스러울 밖에.

    내가 쓰는 편지처럼..

     

     


    어차피 내가 살고자 시작한 놀이이므로 너의 반응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겠지.

     

    이렇게 맹렬히 뒷걸음치는 기이한 대시를, 따분한 프러포즈를 받아줄 여자는 없다는 걸

    바보가 아닌 이상 잘 알면서, 이러고 있는 난 참 이상해 그치?

     

    나를 닮은 바보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집념일까.

    바보라기보단 게으름뱅이에 가까우면서 바보인 척을 하고 있으니

    사랑스런 "진짜 바보"가 다가와 즐 리 없지.

     

     

     

    그래도 자기 주제는 파악하고 있으니

    여자를 애태우고 울리는 뻔뻔한 "사랑 사기꾼"보다야 덜 백해무익한 남자일 거라 씁쓸히 위안하면서

    오늘도 해탈한 시늉을 하여 본다.

     

    경미 너의 마음이 완전히 떠나 버렸다 한들 무슨 상관이랴.

    내 마음의 표면에 사랑의 그림자나마 스칠 수 있다면, 뒷산 소나무한테라도 편지를 보낼 나인 것을.

     

    너한테 나 나름의 사랑이란 걸 꾸준히 전달한 것만으로 난 만족한단다.

    내 정신의 안정을 위해 널 내 상념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 한

    가증스러운 심보를, 네가 혐오하고 저주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것 봐 경미, 좋은 쪽으로든 안 좋은 쪽으로든

    먼 훗날에도 지금의 나를 기억해 주겠니? 크나큰 욕심일까..

     

    내가 널 생각하며 그리며 아끼며 사랑하는 만큼의 십 분지 일만 너도 그리하여 준다면

    이 주눅 든 이기심이 조금은 우쭐할 수 있까..

     

       


    경미 네가 여자라서 그리고 내가 남자라서, 이러고 있나 보다.

     

    여자가 넘어올 수밖에 없는 매력을 안팎으로 겸비한,

    별 노력 없이도 유전자가 그런 쪽으로 발현되는 카사노바까지는 아닐지라도

    내 주변엔 적당한 노력과 영리한 센스로 여자를 곧잘 사귀는 남자들이 많다.

     

    어쩌면 지구상 남자들의 대다수가 그러할 것 같고

    나와 같은 족속은 희귀종일지도 모른다는, 착각(?)마저 든다.

     

    능력은 안 되면서 여자 마음 사 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이 애처로운 마음부림도

    암컷을 쟁취하려는 수컷 본능의 진화한 형태일까.

     

     

     

    우성인자들이 깔아놓은 지름길 마다하고, 택도 없는 모종삽으로 자신만의 길을 파는 고집불통.

     

    누구도 인정 안 할 (길 같지도 않은) 길을 내면서

    지구상엔 없을 천상의 여인이 그 길로 사뿐히 내려앉길 염원하는, 자의식 덩어리.

     

    일찌감치 예약된 미치도록 쓸쓸하고 외로울 미래를 어렴풋이 짐작은 하면서 동시에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상대방도 자길 좋아할 것"이라 희희낙락 망상하는, 조울 기질의 열성 형질.

     

    이런 것들이 환골탈태의 특징일 수 있을까.

    암컷을 갈구하며 으르렁대는 정통 수컷에서 젠틀하고 지성적인 변칙 남성으로의..

     

    아니면, 수컷에서 남자로의 진화 도정 그 중간 어딘가로부터 이탈해버린

    돌연변이에 불과한 것일까.

     

     


    서로를 향하는 남녀의 마음만큼 오묘한 조화가 또 있을까.

     

    그것은,

    태초 이래 온전히 유지되는 우주심이 생명의 에너지로 인간의 심성에 각인한,

    꿈틀대는 순수.

     

    세상 모든 것이 분열과 타락의 길로 나아갈 지라도,

    사랑마저 그러할 지라도,

    이성에 대한 애끓는 마음은 가식 없는 순수로 수렴하여 결국 세상을 구원하리라.

     

    이는,

    유치한 "청춘의 사랑놀이"를 지키고 가꾸는 의무가 인류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이유.

     

     

     

    말이 사라지고 영혼의 몸짓만 남을 때,

    화려한 수식어로 치장한 무거운 사랑, 거느리는 사랑은 추락하고

    발가벗어 가벼워진 감동이 도약하여 찬란한 실존들을 따르리라.

    그렇게 따르는 것은 사랑이어도 좋고 아니어도 좋다

    추상(抽象)이 구현된 결정체, 사랑의 육화에겐 더 이상 부족함은 없을지니..

     

     

     

     

     


    비록, 세상을 구할 "평범한 남녀들의 평범한 사랑"과는 동떨어진 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지금의 이 마음을 간직하겠어.

     

    이리 할 수밖에 없는 (끝내 극복 못할) 한계가 날 한없이 초라하게 하여도,

    널 향한 마음만은 마지막 그날까지 간직하겠어.

     

    일평생 깨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영혼 속 순수"가 살포시 고개 들어 기지개를 켠,

    그 감격의 순간을 잊지 않겠어.

    (이것만으로도 너에게 감사해.)

     

     

     

    그리고 주제넘게 부탁 하마. (상대가 꼭 나여야 한다는 되지 않은 몽니는 부리지 않을게)

     

    너 또한 이러한 마음을 간직하렴.

    살면서 누군가를 계속 사랑하렴.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건방진 소릴 하는구나 싶어도 너그러이 이해해 줘.

    이렇듯 객쩍은 소리도 오늘로써 마지막이니까..)

     

     

     

     

     


    난 지금, 시간조차 정지한 적막의 공간에서

    희미한 형광등 아래 몸을 묻고 이 편지의 끝 부분을 적어가는 중이야.

    그렇게 너와의 마지막을 정리해가고 있어.

    늘 그래 왔듯 나 홀로..

     

     

    주위엔 칠흑의 어둠이 파도처럼 넘실대며 불빛 가장자리를 조금씩 침범해 오고 있어.

    어둠에 저항하는 나를 기어이 삼키겠다는 기세로..

     

     

    이제 그만 펜을 놓을 때가 되었나 봐.

    널 의미하는 내용은 이제 접을 때가 되었나 봐.

     

     

     

    아, 마침 새벽 비가 내리기 시작하네.

     

    창을 두드리는 리듬이 저리 여리고 서정적이니 빗줄기도 연약하겠지. 더는 어찌할 도리 없는 나처럼..

     

     

     

     

     

          
    경미야

    널 영원히 그리워할 수 있게 되어 기뻐.

     

    이만 줄일게.

    잘 자..

     

     

     

     

     

     

     

     

     

     

     

     

    '이상한 연애편지 (상준 외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필로그 : 마음의 반작용..  (1) 2022.12.01
    12. 다시 만만한 추억으로  (0) 2022.11.28
    11. 다 안다고 외치는 무지  (2) 2022.11.26
    10. 현실 부정  (0) 2022.11.12
    9. 바보..  (0) 2022.11.06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