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워터 홀Letters to D.J. (지수 외전)/SUPERMAN 2022. 10. 27. 11:55
Another stories of Jisoos in parallel universes : 1. Superman (원본) (24)
유감스럽지만 널 부정하는 넌 여기가 아니라 다른 시공에 있어. 그런 너와 함께 사라질 시공 말이야.
우릴 신나게 모독하고 있는 넌 오히려 너무나 나르시시즘적이어서 탈이지. 더욱이 영체의 특성상, 각인된 자아를 초월하기란 거의 불가능이니, 되도 않는 시도는 하지 않는 게 좋아.
이런 특성 때문에 현재 넌 구조적으로 자발적 해탈이 어렵고 따라서 우리에 의해 강제로 해탈되고 있는 상황인 거지.
그리고 착각하지 말라. 우리가 할 짓이 없어 한가하게 떠드는 것이 아니야. 이건 일종의 마취제로서 지금의 네 심적 충격을 고려한 우리의 배려라 할 수 있다.
웜홀 통과 과정을 온전히 겪어내기에 무리가 있다 판단하여 우리의 대화로 너의 파장을 안정화한 것이다.
어디던 가자고? 다 왔다 이놈아!
어푸푸후! 나랑 농담 따먹기 하자는 겁니까? 아직도 이렇게 죽겠는..?
그렇네요? 와우! 여긴 또 어디야?
이 양반들 까칠하면서 해 줄 건 다 해 준다니깐. 미워할 타이밍을 못 맞추겠어.
그래도 아까는 너무 무서웠다고요.
령이면 령답게 죽겠단 타령은 그만 좀 해! 물리적으로 죽을 수 없는 존재라고 몇 번을 알려 줘야 하나.
곧 분신에게 입식 되어야 하니 정신이나 바짝 차려!
암흑의 공간과 나 사이에 명확한 경계가 된 것은 장대한 물벽이었습니다.
실은 초거대 파이프라인 같은 원통형 통로였으나 워낙 엄청난 규모라 테두리가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벽면으로 보였습니다.
우둘투둘한 면이 거세게 꿈틀대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괴생명체와 같았습니다.
물고문의 극악함에 정신없이 휘둘리던 제 앞으로 갑자기 들이닥친 광경이라, 경황이 없어 그저 기괴하다고만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요동치는 것들의 정체는 물 분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H2O 그물망의 실물이 보일 정도로 제가 미세화된 것인지 아니면 워터홀의 규모가 상상초월인지는 묻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그들 말대로 저는 잠깐 마취되었거나 최면에 걸린지도 모르겠습니다.
운송자가 꼰대 멘트를 마치자 기다렸다는듯 암흑은 눈부신 빛으로 물들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워터홀 통과 완료의 신호였습니다. 강렬한 조명 수만 대가 한꺼번에 켜지는듯한, 순식간의 변화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수조 개도 넘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비말들이 빛을 받고 찬연하게 비산하는 장관을 연출하였습니다.
비말이 시작된 지점은 워터홀의 말단부이자 다른 시공으로의 출구였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워터홀(WATER-HOLE)에서 뿌려진 물방울들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시공 어딘가에서 급격히 퍼져 나오는 것들이었고 그 중 하나에 제가 갇혀 있었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 그들이 옮겨놓은 걸까요? 아니면 이것이 워터홀을 영적으로 통과하는 자연스런 모습인 걸까요.
커다란 물방울도 아닌 마이크로 입자 수준의 작은 방울이 일 인승 우주선인 양 나를 태우고 다음 타깃을 향해 맹렬히 돌진합니다. 여태까지의 웜홀 체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분명 이곳의 상념 분신 속으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대부분의 비말은 자유 낙하 도중 밝은 공중에서 증발하고 있었지만 나를 담은 것만 유독 비장한 임무를 띤 정찰기처럼 끝까지 살아남아 목적지로 날아가는군요. 나를 보호하면서 말입니다.
으음.. 여기가 아닌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좌표 설정에 문제 있었나 확인해 봐!
이상 없습니다.
아무래도 웜홀 활성화 초기에 폭발적으로 증가한 그의 상념 불안이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저희가 시도한 안정화 작업이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하였고 아울러 궤도 이탈이 유발되지 않았나 추정해 봅니다.
그것은 표면적 이유고, 우리의 안정화 작업에 완전히 동조되지 않을 만큼 녀석의 해탈 지수가 우리의 예상보다 높아졌단 증거다.
그렇군. 우리가 예상 못한 바는 아니나, 그와의 동행이 주는 이 미묘한 부작용을 이번에는 간과한 셈이 되었군.
변수를 좌표에 감안했어야 하는 건데.. 우리답지 않았어!
그의 두려움마저 진화 패턴과 공명한 모양입니다.
리셋을 거부하고 익숙한 상념에 안주하려는 인간 무의식의 심층 구조가 와해되는 와중이라, 유사한 지향성을 유지하면서도 여기로 이끌린듯합니다.
일리 있는 분석이야. 비슷한 상념 유형의 시공임은 분명하지만 상대적으로 해탈계의 권역과 가까워지긴 했네.
위대한 긍정의 포톤 에너지가 비교적 충만한, 근본적인 새로움의 영향을 받는 영역임에는 틀림없어.
그닥 반갑지 않은 상황이지만 크게 보면 우리의 목표와 부합하는 유리한 시나리오가 전개될 수도 있으니 일단은 관망해도 나쁘지 않겠어.
다만 이 우주에서의 체류 시간은 가급적 단축하고 동일한 오류가 발생하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해서 차질 없이 본래 예정지로 운송해야 할 것이야.
당연하지. 더 이상의 시행착오를 용납해선 안 돼!
형, 엄마한테 호출 왔어.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애.
야, 이제 한창 재밌어지려는데 간다고?
급한 일 아니면 마저 보고 같이 가자 지수야.
급한 일이니까 이러지.
진짜 보고 싶은데 아쉽네. 아직 반도 안 지났는데.. 쩝.
짜식 많이 서운한가 보네.
나중에 시간 내서 형이랑 한 번 더 오자. 종영일까진 아직 여유 있으니 조만간 날짜 잡아 보자고.
응 알았어. 고마워 상준이 형.
나도 어차피 이 영화를 한 번만 보고 끝낼 생각은 없었어. 한 번으론 섭하잖아. 홈 VR 출시를 기다릴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편집본은 이 맛이 안 나거든 현장감도 부족하고.
볼 일 끝나는 대로 연락할게.
그래 인마.
주은아 지수 먼저 간대.
하이고 아주 푹 빠졌네 빠졌어. 야 주은아!
놔둬 형, 관람 방해하지 말고.
크크, 주은이 누난 형보다 영화를 더 좋아할걸?
소리 지르니 목 아프다. 말 그만하고 이만 꺼질게. 에스컬레이터 멈췄어.
알았어. 조심해서 내려가고.
흑인 여자 하나에 백인 남자 둘.
신기하게도 이들 젊은이들이 유창하게 한국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름도 상준, 지수, 주은. 전형적인 한국 이름이로군요.
처음엔, 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십육 칠 세 가량 되어 보이는) 앳된 소년이 제 분신인 줄 알았습니다. 비록 서양인이긴 해도 풍기는 분위기가 왠지 청소년기의 저를 떠오르게 하였기에 충분히 그리 짐작할 만한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제가 이 소년을 바라보고 있네요 상준의 시선에서 말이죠. 스무 살을 갓 넘은 듯한 젊은 청년이 저와는 다르게 꽤나 원기 왕성하고 씩씩해 보여서 전혀 생각지 못했는데 뜻밖에도 그의 차크라가 저를 강하게 끌어당긴 것입니다.
고로, 이곳에서의 제 아이덴티티는 지수가 아니라 상준이고 게다가 외국인입니다.
이럴 수도 있군요. 짐승이 분신인 상념계가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한데 얘네들 자세가 특이합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얘들이 앉아 있는 호화로운 일인용 소파가 구십 도 가까이 뒤집어져 있네요.
저런 상태면 이들의 시선은 정면이 아니라 천장을 바라보게 됩니다.
먼저 가겠다 하는 지수의 좌석만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고 소년은 그 옆에 서서, 눕다시피 한 일행들을 내려다보며 대화를 하는 중입니다.
대화 내용에 따르면 현재 아이들이 있는 장소가 극장이라는 건데 (또 극장? 뭔가 공교롭게 돼가는군..) 세상에 이런 극장도 있었나? 스크린이 천장에 달려 있단 이야기인가.
궁금증을 해소하려면 영혼을 부풀려서 시야를 대폭 확장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엄청난 소음이 공중에서 쏟아져 내리네요. 이들이 고함치듯 말을 주고받아야 했던 게 무리는 아니었어요.
예상보다 훨씬 커다란 스크린이 공중에 설치되어 있나 봅니다. 굳이 이렇게 설계할 이유가 있나..
얼마나 대단한 극장인지 자세히 살펴봐야겠군요. 악!
너무 까마득합니다! 너무 높아 천장이 보이지 않는 건지 아예 노천극장인 것인지 이조차 확실치 않습니다.
그냥 하늘이라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저 아득한 하늘 아래 상공을 가득 채우며 스펙터클한 혈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얘네들은 저걸 영화라면서 누운 자세로 신나게 감상하고 있던 거였군요.
어디에도 장대한 스크린 같은 건 보이지 않았고, 막막한 상공 전체에 또 다른 세계가 완벽히 들어앉아 입체적으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꿈에서도 본 적 없는 장관이라 입이 떡 벌어지는 느낌입니다.
어쭙잖은 홀로그래피의 조잡한 퀄리티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검투사들의 피 터지는 싸움을 현장에서 구경하는, 콜로세움의 관객이 된 기분이랄까요.
그것을 목격하는 순간 생생한 현실감과 현장감에 심하게 압도되어, 사고가 정지하는 멍한 상태로 즉시 돌입하고 말았습니다.
앞선 시공에서 에프엠 마스터가 설명한 시공 프린팅 기술이 이런 걸까요? 그럼 여긴 에프엠 문명의 중심지?
그는 시공 파편을 복사하여 가공한 후 그렇게 처리한 시공을 상영 시 재생해 내는 방식이라 한 것 같은데, 저를 사로잡은 저 4차원적 파노라마는 그런 수준도 가뿐히 넘어선 무엇인가를 강렬히 내뿜고 있었습니다.
운송자의 사념 전송에 따르면, 상념계의 폭발적 증식으로 인해 시공 버블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늙은 평행우주들은 결국 초우주적 상념 쓰레기장에 포획되어버린다고 합니다.
고차원의 화이트 코어가 주관하는 상념 쓰레기장이기에 이 잉여 시공들은 역설적으로 영원성을 획득하고 사건계 진열장에 전시되어 무수히 반짝이며 하늘거리게 되는 것이죠.
이와 같이 노쇠하여 표구된 시공들로부터 시공파편이 제공되는데, 갓 탄생했거나 상념 조화가 왕성한 시공을 섣불리 건드렸다간 대우주 섭리에 반하는 상념계 교란을 야기하므로, 근원의 엄격한 통제 하에 오로지 표구 시공들만 활용하도록 제한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전달하고는 다시 묵묵부답이네요. 극장 내부 정황은 스스로 추론하라는 무언의 암시인듯합니다.
이들 허가된 우주 가운데에서 스토리로 가져올 사건계의 시간선만 떼어내어 통째 옮겨 놓았다 해야 할까요.
원본을 투사하는 개념이 아니라 원본을 아예 이리로 투척해 넣은 것 같습니다.
시공 파편이 이곳을 타깃으로 우주 밖에서 날아와 저 위에 박혀버린 양상이랄까.
그리고 신비한 만능 설비가 있어 극장이 수용할 수 있는 적정 크기로 시공 조각을 실시간 자동 재단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재차 공교롭게도 이 영화 또한 슈퍼맨이었습니다.
크리스토퍼 리브가 아닌 구리스돕 하립님이 등장하고 있네요. 이젠 새삼 놀랍지도 않습니다.
별 감흥은 없지만, 사악한 마스터가 아니라 하립님이 직접 나오신 건 어쨌든 나쁘지 않은 조짐인 것 같습니다.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시공이 펼쳐지고 있다는 증거가 바로 저 하립님인 것 같기도 합니다.
마침 공간을 찢고 평행우주의 하립님이 나타나 열세에 몰린 하립님을 돕기 시작하네요.
슈퍼맨이 시공 포켓을 타고 시공 주름에 접합하여 목표 우주로 진입하는 과정도 컴퓨터 그래픽이 아닌 진짜 같습니다.
멀티 시공을 품고 있는 초거대 시공의 축소된 파편이 아닐까 합니다. 보통 씬들의 흐름에 따라 순차적으로 시공 파편이 도입되고 있지만, 이렇게 스토리와 연계된 시공파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어우러져 하나의 씬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조화가 어찌 가능한 것인지..
에프엠의 행성도 아니라면 이곳은 정녕 전지전능한 신들의 세상이란 말인가!
소위 천국이라 불리우는 세계로 내가 온 것이라면 다행을 넘어 축복이지 않은가. 천국의 아이들 치곤 매우 소박하고 수수해 보이기는 해도..
우주 미아가 되어 고생하는 나를 위해 저 깐깐한 운송자들이 베푸는 특별 보너스라면 좋으련만..
만에 하나 그렇다 해도 내가 행복해하는 꼴을 이들이 오래 지켜봐 줄 린 없고, 다른 때와는 달리 조금 있으면 내게 닦달할 게 뻔해 곧 떠나야 한다며 말이지.
떠날 때 떠나더라도 지금을 즐겨야겠어.
성스러운 에너지를 나의 아우라에 맘껏 흡수하리라 여기가 신성한 세상이 맞다면..
'Letters to D.J. (지수 외전) > SUPERMAN' 카테고리의 다른 글
26. 텔레포트 1 (0) 2022.11.01 25. 궁극의 당신 (1) 2022.10.29 23. 에프 엠 마스터 (0) 2022.10.25 22. 시공 파편 (0) 2022.10.24 21. 크리스토퍼 리브 (1) 2022.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