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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간절히 원할 땐 숨었으면서.. 1위선자들의 사랑 (상준 외전) 2024. 11. 8. 16:36
'03. 6.
누가 나를 신비로운 사람이라고 하대? 신비함 따위 가지고 싶지 않은데..
남이 보기에 그렇다 해서, 그게 정말 나인 걸까?
"무릇 인간이란 내면에서부터 끊임없이 그윽한 향기가 우러나와야 한다"고 생각해.
강하기만 하면 사람을 금방 질리게 하지만 그윽함은 그러지가 않잖아.
변화무쌍한 신비로움보다는, 일관된 형태로 "질리지 않는 향기"를 유지하는 사람이고 싶어.
요즘 꿈에서 유독 그가 자주 보이더라. 날 알려고 노력했던 사람..
그 사람에 대해서 좋은 점보다 나쁜 점을 더 많이 이야기했었나? 그래도 착한 남자였어 그는..
돌아올 때까지, 나.. 기다려 보려고..
그가 꼭 돌아올 거 같아서..
내가 다른 남자들과 비교질 하며 표독하게 굴 때 무척 자존심 상해하면서도 금방 자책하고 풀이 죽던 그였지.
자존감을 보완하여 새롭고 의젓한 모습으로 돌아와 주리라, 믿고 싶어. 물론 나로 인한 상처가 깊은 만큼
나를 둘러싼 환경이 가하는 부담과 두려움이 큰 만큼, 당장은 내게 손짓하지 않겠지만..
그렇지만 난 알아. 그는 이제 나 이외에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 없게 돼 버렸다는 걸..
알고 있을 거야 그도.. 내가 자길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그러니,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그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 둬야겠어.
열심히 일하고 배우면서, 그렇게 항상 무엇엔가 몰두하는 상태로 하루하루 성실히 살면서
그를 기다려 볼래...
'04. 4.급조된 소설 속 시간을 함께한 우리의 행복은 "현실 앞에서 긴장하고 주눅들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녔었지.
견디기 버거워 도피하였을 정도로..
지금은 누나나 나나 잔잔한 시처럼 현실을 달래며 살고 있으니
비겁한 내 사랑도 감히 용기 내어 다시금, 그리웠던 누나 곁을 찾아들었나 보다.
애절한 그리움의 시기를 넘긴 심심한 재회에 안도하며. (자격 없는 섭섭함의 망동을 경계하며..)
누나는 그렇게 거기 있고 나는 이렇게 여기 있으면서
"남녀 간의 공인받지 않은 사랑은 결국 부질없음"을 서서히 서글프게 통감해야
"죄 많은 사랑이 어떻게 식어가고 얌전하게 순치되는지"를 기어이 체감해야
우리의 마음이 놓이게 될까. (판타스틱한 전개도 드라마틱한 반전도 필요 없는) 고독 속에 내가 숨었을 때처럼.
보고 싶었지만, 다시 만나기가 두려웠어.
"격정의 나오미" 그 치명적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감정 과잉을 허겁지겁 떠나 무미건조한 일상 속에다 (씁쓸한 세상 속에다가) 겁 많은 나를 간신히 숨겨 놓았는데,
누나 품이 참 좋아 안기면 안길수록 죽기 살기로 도드라졌던 "내 이기적 욕망"이,
애욕의 노골성에 맛 들인 소심한 사내의 앞뒤 살피지 않을 (절정을 갈구하는) 질주가
또 지겹게 반복될까 봐..
지난날 누나의 아방가르드한 순수함이 현실을 발기발기 찢을 때마다
나의 정돈된 속물 근성은 강박적인 공포로 경기를 일으켰지.
누나인 척 발버둥 쳐도 난 누나가 될 수 없었다.
이처럼 코드가 전혀 맞지 않았는데도 나를 좋아해 주는 누나가 신기했었다. (덕택에 난 행복했지만..)
그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지. 내 인생에 결코 두 번 찾아올 수 없는 기괴한 사건이기도 하였고.
당시의 난, 배배 꼬인 헛똑똑이에 그로테스크할 정도로 의기소침한
그리고 퇴행과 비약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겁쟁이였다.
아나키즘을 꿈꾸며 부적응을 합리화하는 무능력자에게
저주받은 외로움이 상장처럼 주어지는 건 당연한 업보이거늘..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여 만성 절망과 조금씩 친해져 가고 있던 내 쓸쓸한 권태 앞에
나오미가 갑자기 나타난 거야. 노골적인 정염과 화려한 고통, 농축된 슬픔의 육화로서 강림한 듯
난데없이 누나가 다가온 것이야.
내가 받은 첫인상 첫 느낌은 그랬어. 누나도 처음 얼마간은 그런 쪽으로의 관계 발전을 분명 바라는 것 같았고..
아무튼 그래서 난 간택받은 후보처럼 기뻤고 동시에 "막연한 불안이 생동감을 입는" 신선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듯 - 비싸고 맛있는 과자를 처음 본 어린애같이 - 마냥 들뜨면 안 되었어.
어떻게든 끝이 보여야 하는 게임을, 애초에 나는 할 자격이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난 외로움을 핑계로 누나를 기만하였다. 나 자신을 기만했듯이..
우린 잘 섞이지 않는 "각자의 모노드라마"를 억지로 공유하며 "부자연스럽게 겉도는 공동 슬픔"을 확대 재생산했지만
그 와중에도 가끔씩 - "치장이 안 된 맨얼굴"을 서로에게 들키듯 - 진실로 슬플 때가 있었고
참사랑의 정수를 느낄 때가 있었어. 아이러니하다고나 할까.
삶이란 것의 누추함을 최대한 가리고 세련된 남녀의 품위 있는 사랑을 지향하는 방식으로 순수에 도달하고 싶었던 우리가 간혹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상대방의 - 가슴속에 수줍게 감추고 있던 - 철없고 유치한 감정 그 편린을 건드렸을 때
당황스러울 만치 속수무책으로 순수의 웅덩이에서 허우적대는 서로를 발견할 수 있었으니..
이렇게도 도달하는구나 싶은 게 나를 적잖이 혼란스럽게 하였고 허탈하게도 만들었지.
나보다 현명했기 때문일까. 누나는 가벼움과 단순함이 툭 던지는 순수 또한 가짜가 아니었음을 일찍이 간파했던 것 같아.
반면에, 누나가 싱글이 아님을 고백한 다음부터 늘 두려움에 지배당했던 난
유혹의 사과를 내던지지도 베어 물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들고 있기만 했던 난
그럴 여유까진 없었나 봐. 오아시스 같던 그 짧은 동안의 순수조차 "죽고자 하는 우리의 사랑"이었기에
두려워 애써 외면하였나 봐.
누나와 난 이처럼 달랐어.
당시 누가 더 이성적이었을까. 그래, 내가 아니고 누나야.
감정에 곧잘 휩쓸리는 누나의 모습은 (본인의 인생을 걸고픈) 지독한 현실을 잡으려는 심사숙고와 다름없었고,
게임의 끝이 버겁기만 한 나는 결국
꾀죄죄한 양심들의 난장판 속으로 도망쳐 버리고 말았으니까.
누나의 무모한 몰입은 때론 사랑으로 윽박지르기도 했고, 때론 "화석이 되어가는 삶"을 알싸한 환희로 녹이기도 했었지.
내게는 무서우면서도 그리웠던 추억들..
매정한 세파가 후려갈겨 상처뿐인 현재가 된 것은, 금단을 향해 만용을 부리던 사내의 쇠잔해진 죄책감이
더 시들기 전에 필사적으로 선택한 탈출구를 지나온 결과.
그깟 꼴같잖은 체면과 자존심 다 버리고 피폐한 고독과 헐벗은 자기연민을 양쪽 눈에 그렁그렁 담은 채
(공포가 주는) 위기감에 쫓겨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와 버렸네.
한 번 깜박이면 주르륵 흘러내릴 그것들이
자신을 토닥여 줄 익숙한 세월을 찾아 "길 잃은 아이"처럼 헤매고 있을 때,
염치없는 상처를 맞이할 푸근한 기적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시간이 멈춘 것처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구나!
이제 그냥 그렇게 거기 있고 이렇게 여기 있어도 우리는 서로에게 한결같이 소중한 사람일 것 같다.
적당히 영리하게 생활과도 타협하면서 살아 보자.
타협하는 사랑은 역겨워도, 타협하는 삶은 생존의 밝은 지혜일 수 있으니..
더는 못 참고 기진의 직전에 손을 내밀자 누난 조금의 망설임 없이 "탕자의 배은망덕"을 감싸 주었어 고맙게도.
그리고 거기 있는 나오미의 존재감만으로 난 원격 진료를 받은 듯 원기를 회복하였으니
지금부턴 추억으로 복귀하여 추억을 다스릴 수 있을 것 같아.
(더 잃을 게 없는) 절망의 끝에 서서 누나의 이름 다시 부른 것이니,만에 하나 있을 "두려움으로의 회귀"조차 기껍지 않을 이유 없지.
미리 설정하지 않아도, 일부러 의식하며 자연스러움을 쫓지 않아도,
세월은 알아서 우릴 잔잔한 시(詩)처럼 (고요한 호수처럼) 만들어 놓겠지.
이제는 굳이 기승전결의 격랑을 따라 부침하지 말고 - 리듬과 이미지만 살짝 일렁이는 - 단출한 사랑으로 자리하자꾸나."애틋함마저 겸연쩍은 연정(戀情)"이 되었을 즈음에야, 우리의 사랑은 기쁘게 늙어갈 테지.
"이토록 이기적인 사람"을 믿고 좋아해 주는, 천사 같은 여인인데..
깨달음이 부족한 몰염치한 남자는 항상 누나를 답답하게만 만드는구나..
나와는 달리 진심으로 누나를 사랑하는 - 것 같은 - 사람이 생겼다고? 다행이야..누나 가까이에서 소박하고 진솔한 사랑으로 누날 보듬어 주고 있다면
멀리 있는 나보단 그쪽이 더 누나를 살게 하는 원동력인 듯.. 지금은..
그래서 행복하다면 다행이지.
누나가 행복하면 나 또한 행복해. (진부한가.. 언감생심 내가 무얼 바라겠어? 그거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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