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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사건계(界)
    평행 지구 (판타지) 2023. 10. 5. 15:01

     

     

     

     

     

     

     

     

     

     

     

     

     

     

     

     

     

     

     

     

     






    블랙홀의 경계로 접어들자 그의 몸은 반(半)투명 유체로 화하여 초(超)공간 속에 급속도로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마치 초공간 속의 초(超)입자들을 매질로 하여 퍼져 나가는 하나의 파장이 된 것 같다고나 할까.


    블랙홀에 갇혀 인간으로서의 생사가 불투명하게 되었지만 신기하게도 의식은 또렷하였다.

     

     



    '아차,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물어본다는 걸 깜빡했네.


    이대로 나의 현재에 복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것이 그대로인 비참한 현실만이 기다리는 곳이지만, 우주의 미아처럼 떠도는 것보단 백 배 낫겠지..


    아니야! 조금의 변화도 가져다 주지 않는 "현실로의 복귀"가 무슨 의미 있단 말인가.

     

    인생에서 미해결 상태로 덮인 지점들 중 한 군데를 나는 찾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삶의 궤적에 응어리진 상처들 가운데 하나를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의식 분열의 조짐이 시작되는 것일까. 횡설수설 이랬다저랬다.. "상념의 진폭"과 심적 갈등이 서로의 원인으로 작용하여

    서로에 비례하면서 끝없이 증가하는 형국이었다.

     



    무수히 쪼개지는 빛줄기의 형태로 의식의 파편들이 분산되어

    "존재함의 극미소(極微小) 조각"들을 타고 무한 속도까지 가속하며 달아나는 동안,

    맥없이 흩어질 줄 알았던 상념들은 도리어 결집하여 생의 도정을 고정밀(高精密) 스캐닝하기 시작하였다.

    생애의 파노라마가, 삼백육십 도 펼쳐진 대형 스크린 상에 입체적으로 투사되면서 낱낱의 사건들을 재현해 가고 있었다.

    필름의 단속적인 한 컷 한 컷이 빠르게 이동하여 연속된 움직임을 형성하듯이..



    상준의 농축된 상념 줄기는, 삶을 이루어 온 시퀀스들 위를 날아 커트 커트마다 접속하며 사건 강도(强度)를 관측하였다.

    마치 필름을 들여다보는 영화감독이 된 듯한 기분이었는데, 뭐랄까 한 인간의 개인사(個人史)들이

    "짜릿하고 황홀한" 환상으로 처리되어 말랑말랑해진 상태에서 주인의 검토와 검열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이윽고 "초점이 맞지 않아 희미하게 번지는 장면"을 한 군데 발견하였는데, 그 장면을 포함하는 사건의 궤적이

    너무도 생소하여, 그곳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강렬한 호기심이 자연스럽게 발생하였다.



    가만히 지켜보니 생의 파노라마는 밧줄처럼 한 줄로만 이어진 것이 아니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의 행적은, 그물처럼 얽히고설켜 출렁이고 있는 입체적 파노라마의 일부분에 불과하였다.

    전생들과 후생들은 물론 무수한 평행 분신들의 횡적인 사념계들까지 일사불란하게 연계하여

    살아 움직이는 4차원 "사건 궤적 망"을 유기적으로 구축하는 데 협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 보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히도록 만든 (판독 불가능한) "생의 단면"도

    어쩌면 존재감의 밀도가 다소 떨어지는 "사념의 미래계"인지 모를 일이다.

     

     




    '내가 이동 중인 목적지가 바로 저곳?
    블랙홀 내에서 이동 주체가 목표 시공을 인지하는 패턴.. 바로 이런 것이었군.

    몸뚱이가 분해되어 빨려들어가는 와중에도 의식은 쉬지 못하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한대에 가까운 상념을 환영(幻影)으로 구현해 내야 하다니..

    컨트롤당하는 의식이, 무의식의 상상 영역을 끄집어내어

    그것과 매칭되는 "초 우주의 광대한 실재"에 접속하는 방식이라..

     

    매혹적인 체험이긴 하지만, 불순한 존재로부터 기만당하는 더러운 느낌 또한 떨쳐 버릴 수가 없군..'






    사건들이 흐르던 스크린은 이내 사라지고, 백 미터 깊이의 우물 바닥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처럼 열쇠구멍만 하던

    "차원의 문"이 고슴도치 가시 같은 빛줄기들을 뿜어내면서 - 숨을 불어넣을 때마다 비눗방울이 부풀어 오르듯 - 코앞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그 속에서 빠르게 회전하고 있는) 눈이 부시도록 파란 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화이트홀의 경계를 빠져 나오면서, 엿가락처럼 늘어진 시공의 미끄럼틀 위를 구르던 "영과 육의 소립자"들은

    미지의 무엇인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허겁지겁 조립되고 있었다.

    (주먹만 한 눈뭉치가 언덕 아래로 구를 때 점점 커지듯이) 몹시 바빠 보이는 속도감을 자랑하지만

    그래서 왠지 불안정하고 위험할 것 같다는 느낌이 퍼뜩 들었다. 급조되는 육화의 과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상준의 불안한 의식을 더욱 휘저어 놓은 것이다.







     

     

     

     

     

     


     

     

     


    ※ 에프엠 (F.M.)

     

     

     

      1) 프리메이슨 (FreeMason)의 영어 약자.

     


      2) 고대/중세 서양 석공들의 숙련공 조합에서 기원하였으며,

          공제를 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비밀결사의 형태로 발전한 조직.

     


      3)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세계를 지배하는 그림자 정부.

     


      4) 우주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축으로서의 악마적 섭리계.


          진리의 이중 구조를 축조하여 범우주적 퇴화를 촉진하는 총체적 악마성.

     


      5) 부작용을 양산하는 불완전한 진화의 원동력.


          불안정한 환상으로 진실을 교란하는 다양한 음모론적 준동의 근원.

     


      6) 해탈하지 못한 (인간을 포함한) 지적 우주 생명체의 불투명한 내면을 총칭.


          무의식이 존재하는 이유.

     


      7) 4차원 사념계 (평행 우주)를 자유로이 내왕할 수 있는 군신 그룹.

         상하위 4차원을 아우르며 지배하는 군단.

     


      8) 영적인 조화 섭리의 대척점에 서 있으나 그들 역시도 반인반신의 의식체임. 즉 모순의 정점을 지향하는 존재.

     


      9) "물질 문명이 극도로 고도화된" 사념계에서 발원하여 평행계 시스템 전반에 침투하고 있는, 무자비한 검은 기류.

     

     

    10) 영성의 진화 없이 물질과학 및 기계화 패러다임만으로 신의 반열에 합류한

           팽창 우주 은하계의 최상급 진보 종족이자 동시에 교조적인 세계관의 초월적 원류.

           (이 또한 모순의 체화를 극한까지 지향하는 양상임.)

     


     11)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4차원의 저급 중음계 및 중급 영계를 굴복시켜 세력권 안에 두고

           일관되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마귀와 마신들의 맹주.

     


      12) 고차원 우주들의 어둠의 영역을 (어둠의 시공을) 주관하는 검은 창조 섭리.

     


      13) 다차원 평행 우주 시스템의 우주 버블 표피에 초(超) 문명 수준의 에프엠토피아를 건설해 놓은 집단.

     


      14) 대(大) 창조 섭리 내지는 근원 의식의 차원에서 용인된, 초 우주적 조화를 위한 핵심 요소로서의

            "신성하고 영원한 갈등"의 결정체.

     

     

     

     

     

     

     


    ※ 제작된 블랙홀/화이트홀을 이용한 (불안정하고 불안전한) 워프 시스템

     

     


      :  "육체의 세포"와 "유체의 아우라 소자"가 공히 아원자 단위로 해리된 후

         부호화된 전자기파 상태로 이동하여 "목표 시공"에서 재조합되는,

         생체 플라스마 인젝션 방식의 순간이동 시스템.

     

         차원 간 통로 (웜홀) 확보와 그것의 안정적 유지가 배제되어

         이동 대상의 안전이 백 프로 보장되지는 않음.

     

         원형 단계의 블랙홀과 화이트홀이 시공 연구를 통해 고안 및 설계되고 실험적으로 생성되었으나

         이들의 안정화에 기여하는 웜홀 결합 기술의 미비로 인해

         "진정되지 않은 블랙/화이트홀"을 통한 거친 워프가 불가피한바

         이러한 방식에 따라 이동 중인 생명체의 재조합 실패율은 유의미한 정도까지 상승할 수 있음!

     

     

     

     

     

     

     

     

     

     

     

     

     

     

     

     


    얼떨떨한 정신이 머리와 가슴 사이에서 진동하며 간신히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강한 두통을 호소하며 눈을 뜨니 야산 기슭의 한편에 나란하게 놓여 있는 벤치들이 보였다.


    그 벤치들 앞으로 오솔길이 나 있었는데 오래전에 떨어진 듯 거의 다 썩은 낙엽 부스러기들로 덮여 있었고

    눈이 드문드문 흩어져 얼어 있기까지 하였다.

     

     

    일 미터도 채 되지 않는 너비의 그 길 입구에 그는 분명 서 있었다. 아니, "분명"이란 단어는 취소해야 할 것 같다.

    생경한 두통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주변을 좀 더 자세히 둘러보던 중, 나무로 만들어진 오래된 벤치 아래

    낮고 좁은 공간이 불현듯 상준의 눈에 들어왔다.

     

    이동하자마자 재수 없게 동시성 감지 트랩에라도 걸려들고 말았나 싶었지만

    그 밑에 엎어져 있는 정체불명의 사내를 단순히 도플갱어라 여기기엔

    헐벗은 옷차림하며 아주 세세한 부분 하나하나까지 그의 지금 모습과 판박이였다.

     

     

     

     

    '의식의 혼란이 착각을 유발한 게 아니라면 이 역시 강제 유체이탈 현상 아닐까. 저들이 주특기를 또 발휘했나 보군..

    이래서 두통이..? 아, 이런 식의 이동 정말 짜증 나는데 계속 이런 식이라니..

    그간 스무스한 이동이 참 좋았었는데 왜 갑자기 다운그레이드된 방식을 고수하는 거지?

    이건 아무래도 나를 무시하는 처사 같은데..?

     

    하필 저기가 포털이란 말인가? 런닝 차림의 내가 저렇게 아무 데나 내동댕이쳐져 있다니..

    공중이나 물속, 땅속이 아니라서 천만다행이네. 어후, 생각만 해도 끔찍해. 물론 나를 죽게 방치할 친구는 아니겠지만

    요새 날 대하는 부쩍 냉랭해진 태도를 감안하면 이러한 확신마저도 수그러드는 느낌이 든다니까..

     

    바로 코앞인데 왜 이리 다가가기가 힘들어? 몸을 찾아가려는 영혼의 열망만으로 쑥 빨려 들어가야 정상 아닌가?

    으윽,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군..'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며, 본인으로 추정되는 육신에 간신히 유체의 손가락을 대는 순간이었다.

     

    유체일 때는 무디게만 느껴졌던 "3차원 외계에 대한 감수성"이, 육신을 터치하기가 무섭게 되살아나

    잠시 잊고 있던 오감을 동시다발적으로 회복시키고 있었다.

     

    입성이 부실한 만큼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의 추위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엄습해 왔는데, 영육 합체의 과정이

    막 시작되고 있는 단계임에도 이렇게 날 선 육체적 감각은 밀물처럼 아우라를 습격하며 신속하게 차크라를 자극하였다.

     


    바위에 짓눌린 듯한 무게감을 겨우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초겨울의 매서운 칼바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빨갛게 얼어 있는 맨살을 인정사정 안 봐주고 후벼 팠다.

     

     



    '스웨터랑 외투를 과거에 두고 와 버렸네.

    황당과 난감의 연속이었는데 그거 챙길 새가 있었남 어디..?


    찜통더위에서 곧바로 시베리아라.. 요따위 시공 이동을 한 번만 더 했다간 몸이 남아나지 않겠군.


    가만있자, 근데 여기가 어디더라?'

     




    주위를 암만 살펴봐도,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이름 모를 나무들과 - 소나무 등의 - 상록수들로 빽빽한

    그저 그런 야산일 뿐이었다. 눈에 띄는 표지판 하나 없어 어디가 어디인지 감을 잡을 수조차 없었다.

     

    이런 날씨에 요런 몰골로 무작정 걸어 다니기가 몹시 껄끄럽고도 고통스러울 것 같아, 일단 위로 올라가 전망부터 내려다본 후 어떻게 움직일지를 정하기로 하였다.

     

    (다행히 인적 없는) 비탈진 오솔길을 따라 상준은 무거운 걸음을 힘겹게 옮겼다.

    완성도가 떨어지는 우주 간 이동 방법에 의탁하여 쫓기듯 넘어온 때문일까. 이렇듯 몸이 무거운 것은 아마

    그 후유증인지도 모를 일이다. 혹시 생체 내에 있는 중력 감지 센서에 이상이 발생하여

    지구 중력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라면, 부디 일시적인 증상이기를..

     

     

     

     

    '비교적 야트막한 산인데도 정상까지 오르는 데 한 시간 이상 소요된 것 같다.

    내 몸 상태가 아직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단 뜻이겠지..

    꼭대기가 이렇게나 넓을 줄은 몰랐네.'

     

     

     

     

    한 이백 평 정도 되어 보이는 을씨년스러운 공원의 정경이 그의 선명해진 기억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아! 여기가 거기였지, 참!'

     




    짧은 오후의 막바지, 내린 지 며칠은 된 듯한데 여전히 두껍게 덮여 있는 눈이

    차게 식은 햇살을 받아 하얗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테니스 코트,배구 코트, 농구 코트 등이 관리되고 있기는커녕 그 위에 단 한 개의 발자국도 찍혀 있지 않았다.

     

     

     

     

    '지역 주민을 위해 큰돈 들여 만들어 놓은 시설이었고 계절에 관계없이 많이들 이용했었지.

    지금 시각도 원래는 운동하는 사람들로 제법 북적여야 할 텐데 이렇게 휑할 수가 있나..

    날씨 핑계를 댄다 해도 그렇지, 운동깨나 한다는 스포츠 마니아들까지 보이지 않는다는 건..

    하기야 관리가 전혀 안 되고 있으니 운동을 하려야 할 수가 없겠군. 어쩌다 이리 된 걸까.'

     

     

     


    테니스장 너머로 홍주시의 일부 전경이 나지막하니 앉아 있었다.

     

     

     


    '벌써 오 년이 지났군. 일 년간 직장 생활 하느라 혼자 내려와 잠시 살았던 곳.

    직장 관두고 바로 올라와 현재는 망각의 저편에서 희미해져 있는 곳이거늘..

     

    친구는 왜 이리로 날 데려왔지? 여기가 내 미래의 어느 시공이라면..

    이곳에서 내 삶의 중차대한 사건이라도 벌어진단 말인가.'

     




    산중의 바람은 더욱 매서워져 이대로는 도저히 견디기가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상준은 생각을 잠시 접고

    퍼렇게 얼어 버린 살갗을 손바닥으로 연신 비벼대며 미끄러운 비탈을 조심조심 내려왔다.

     

     



    '홍주로 왔다는 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금이 대관절 과거야 미래야? 아, 답답하구나. 이 양반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연락도 없고..!'

     




    듬성듬성 덮인 눈들로 살얼음판을 이룬 비탈길에서 몇 번 엉덩방아를 찧는 동안

    그의 혼돈은 얼어붙은 땅처럼 굳어졌다.

     








    흙투성이의 남루한 러닝셔츠 하나 걸치고 야산을 내려와 주택가 아스팔트에 가까스로 발을 붙였을 땐, 이미

    어두울 대로 어두워진 뒤였다.
    날씨로 미뤄 최소 11월 말은 훌쩍 넘겼을 시기라 짐작되었고 이를 토대로

    저녁 일곱 시경은 족히 되었음 또한 추측할 수 있었다.

     

     



    '환절기라 더 춥게 느껴진다기엔 실제로도 대단한 추위인걸. 지구 온난화란 이제 옛말이 된 것인가.

    특히 바람까지 거칠게 불어대니 살이 저며지는 것 같네. 설마 여기 지구가 다시 소빙하기로 접어든 건 아니겠지?

     

    이걸 견디는 나도 대단해. 보통때 이만치 추우면 요런 꼬락서니로 절대 집 밖을 안 나갔을 텐데..

    우주를 넘나드는 스케일로 선택의 여지 없이 대모험에 뛰어들게 되고 혹독한 환경에 바로 투입돼 버리는 판국이면

    목숨을 내건 긴장감 속에서 이 정도 상식선의 고통에 징징거릴 여유란 사실상 없다 봐야겠지.

    이왕지사 이렇게라도 내가 단련되고 있는 거라면 좋겠어..

     

    으음, 대호산 공원 아래니까.. 여기는 성장동이겠구만..'

     




    이보세요! 얼어 죽을 것 같아요. 설마 동사를 체험케 하려고 이리로 데려온 건 아니잖습니까?!

     

     



    '역시 아무 대답도 없군.

    텔레파시가 여의치 않아 이런 거추장스러운 헬멧을 쓰게 했으면 답변이라도 속시원히 해 줘야 마땅하지 않은가.

    왜 이리 말을 아끼는 건지.. 달변가 친구답지가 않아.


    어쩌다 연결이 되어도 알 수 없는 말만 짧게 뱉어 놓고..

    데려가기 전엔 귀찮을 정도로 사전 설명을 하고 데려온 후에도 장황하게 상황을 정리해 주던

    친절하신 양반이 새삼 그립군. 무슨 꿍꿍이로 돌변하신 겐가.


    이제는 내가 알아서 체험하고 알아서 다 해결해 나가란 뜻인지..
    그렇다손 치더라도, 지금같이 황당한 경우가 이어지면 한 번쯤 코멘트를 띄워 줘야 도리 아니야?

    도무지 속셈을 모르겠네. '

     




    "인내의 한계로 치닫는 추위"와 친구에 대한 불평으로 잠시 흐트러진 정신을 상준이 미처 수습하지 못한 탓이었을까.

    주변을 살펴 경계 태세에 집중해야 하는 비정상적 "시공 활보" 그 불안한 노정에 본인이 있음을, 잠깐 잊고 말았다.

    따라서 심상찮은 그림자가 도시 위에 드리워져 있음을 일시적으로 간과하였으나, 그의 선천적 의심병과 편집증은

    간과의 효과가 그리 오래가도록 놔두지 않았다.

     

     



    '이상한데..? 정전인가? 지금쯤이면 곳곳에 불이 켜져야 정상인데, 집들도 하나같이 캄캄하고

    가로등 한 군데 켜진 곳 없으니 어찌 된 일일까.

     

    어럽쇼? 초저녁인데 동네는 또 왜 이리 한산하지?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 기어 다니지 않잖아!?

    그러고 보니 수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닐세..


    뭐야, 내가 시간을 잘못 계산했나? 지금이 새벽인가?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날이 점점 저물고 있는데 뭔 놈의 새벽?

     

    일단 차도로 내려가 보자. 택시든 버스든 일단 차에 올라타면 추위는 좀 면할 수 있겠지.
    내 모양새를 보고 미친놈이라 여길까 염려는 되지만 지금 그게 문제인가. 당장 얼어 죽는 것보다야 낫겠지..'

     

     

     




    주택뿐 아니라 주거지 중간중간 박혀 있는 소형 상점들조차 셔터를 내린 채 비밀을 간직한 자폐아처럼 돌아앉아 있었다.



    "방향성 없이 출렁거리는" 삭풍을 뚫고 한참을 뛰어 내려와 8차선 도로에 이르렀다.


    퇴근 무렵의 러시아워를 떠올리며 - 날쌔게 오고 가는 - 헤드라이트의 행렬을 기대하던 상준에게

    한적하기 그지없는 도로 상황은 자신의 눈이 의심될 만큼 뜻밖의 광경이었다.

     

     



    '통행금지령이라도 내려졌나?

    젠장, 택시 버스는 고사하고 트럭 한 대 보이질 않는군. 어휴 추워..'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는 그의 옆으로 검은 물체가 닿을 듯 스치었다.


    기척도 없이 나타나 그를 화들짝 놀라게 한 그것은 금속성의 탈것, 다름 아닌 택시(?)였다.

    (택시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냐고? 물체의 상단 중앙부에서 알파벳 T.A.X.I가 홀로그램처럼 일렁였으니까.)

     

     



    '엔진 소리 전혀 없이 유령처럼 움직이다니.. 이거 자동차 맞아?'

     




    납작한 중절모 모양의 중형 탈것이 상준이 서 있는 위치로부터 약 일 미터 전방에 멈춰 섰다.


    유리창이 없는 - 것 같은 - 미지의 금속 차체가 매끄러움의 극치를 뽐내며,

    금형 안에서 통째로 찍어낸 것 같은 부드러운 곡면부를 맵시 있게 노출하고 있었다.

     

     



    '세련된 디자인이군. 미래형 자동차 전시회장에서나 볼만한 모델이 개인택시로 활용된다?
    잠깐만..

    어잉?! 바퀴가 없잖아! 차도 위에 떠있네? 저게 그러니까 말로만 듣던 공중부양 차?? 저래서 소리가 나지 않은 건가?

    S.F.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더니만, 기어이 실용화된 모양이네.


    여긴 도대체 몇 년도의 한국일까? 몹시 궁금해지는구나..'

     




    택시 옆으로 다가가 문을 열려고 하였으나 손잡이가 보이지 않았다. 일체형의 금속(?) 그 자체라고나 할까.

    그걸 타기 위해 승객이 할 수 있는 건 단지 서서 - 그를 받아들일 때까지 - 기다리는 것뿐.

    문이고 창문이고 간에 어떠한 윤곽이나 요철도 허용하지 않는 극강의 간결함이었다. 심지어 전조등도 보이지 않았는데

    불빛은 분명 흘러나왔고, 근본을 알 수 없는 그 불빛이 차의 전면부를 표시하는 전부였다.


    이때, 뒷좌석을 차폐하고 있던 겉면이 (측면과 천장을 포함하여 "차의 뒤쪽 절반"에 해당하는 차체의 외부가)

    아래에서 위로 스무스하게 열리며 승객을 위한 아늑한 공간이 준비되어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센서에 의한 자동 개폐인가. 뭐 그렇게까지..

    그냥 기사가 작동 버튼을 눌러 열어 주었겠지.

    설사 기사 없는 무인 택시라 한들 여기선 대수도 아닐 터. 괜한 호들갑은 떨지 말자고..'

     




    맨살을 유린하는 추위나 우선 피하고 보자는 다급함에서 그는, 앞뒤 따질 겨를 없이 너구리가 굴속으로 기어들 듯

    훈훈함과 안락함이 기본으로 보장될 것 같은 유에프오급 택시 안에 몸을 던졌다.

     

    상준을 빨아들이기 위해 잠깐 공개되었던 내부 공간은 밀봉되듯이 다시금 외부와 차단되었고

    어느 미래의 산물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스터리한 첨단 택시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백여 미터쯤 전진하며 속도를 높이는가 싶더니 이내 멈추고 십여 미터를 수직 상승한 후 그다음부턴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는 것 같았다.

     

     



    '기존의 동력 장치에 획기적인 무언가가 접목되었음이 틀림없어. 그게 무엇일까.

    외계의 첨단 에너지가 우리나라에까지 도입된 것일까. 외계인의 기술과 "미지의 우주 에너지"를 활용한 무한동력 같은..?

    자기장과 반중력이 하이브리드 되기라도 했으면 엄청난 도약인걸!? 그렇다면 여기는

    차근차근 발전의 단계를 밟아 나간 아주 먼 미래이거나 우호적인 외계 선진 문명과 극적으로 결합한 근미래거나

    둘 중 하나란 얘긴데..

    이곳 홍주의 환경이 내가 사는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전자일 리는 절대 없고.

    인프라 조성도 전혀 안 된 밀림에 리무진을 들여놓은 것처럼 진한 이질감이 느껴지는군..'

     




    어디로 갈 거요?!

     

     

     

     

    꽤나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기까지 한 굵은 목소리가 그의 어린애처럼 들뜬 상념에 제동을 걸었다.

     

    승객 친화적인 뒤쪽 공간이 운전석과는 완전히 격리되어 있어 진짜 무인 주행 차량 아닐까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으므로, 갑작스럽게 등장한 "중년 사내의 음성"도 처음엔 기계적으로 만들어 낸 소리라고 생각했다.

    물리적인 칸막이라 굳게 믿었던 것이 스르르 옅어지며 연기처럼 사라지기 전까지는..

    (물론, 기껏 합성해 낸 소리가 공손한 "손님 응대용" 어투가 아니라서, 다소 의아하긴 했지만..) 

     

     

     

     

    '너무 앞서 나가진 말자. 이게 맞지.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니 그래도 안심이 되는군.

    최첨단을 달리며 날아다니는 자동차와는 사뭇 걸맞지 않은 촌스러움이 풍기지만, 이런 게 인간미 아니겠어?

    혼자 상상만 할 게 아니라 궁금한 것들은 기사 아저씨한테 물어보면 되겠네. 친절히 답변해 줄지는 의문이지만

    그렇다고 선입견을 가질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야..'

     

     

     

     

    아저씨, 여기가 홍주 맞긴 한 거죠?

     

     

     

    그렇소만..

    보아하니 외지인인 모양이구만. 근데 젊은 사람 꼴이 그게 뭐요? 어디서 패싸움이라도 하고 왔소?

    쯧쯧, 요즘같이 살벌한 시국에도 정신 못 차리는 인간들 있다더니..

     

    칩은 심었어 젊은이? 없으면 미리 말하고 내려. 신고하진 않을 테니까.

    요즘 세상에 칩 없이 무임승차할 강심장은 없겠지만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니 기분 나빠도 이해하슈.

    하긴, 걸리면 사형인데 누가 무임승차를 하겠나.

     

    빨리 행선지 얘기 안 하고 뭐 해 젊은 양반?

    참고로, 한 바퀴 드라이브할 거면 정해진 요금이 꽤 비싸다오.

     

     

     

    예? 칩이요? 사형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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