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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이상한 누나
    지수 이야기/이상한 사춘기 2023. 5. 19. 18:57

     

     

     

     

     

     

     

     

     

     

     

     

     

     

     

     


    '얘가 어찌 된 일이야. 9시가 다 되었는데 들어올 생각을 않네?'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유모는 걱정이 되어 밀린 설거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평소에 거짓말을 하지 않고 어른과의 약속은 결코 어긴 적 없는 아이라

    일찍 들어오겠단 얘기만 철석같이 믿고 - 몸이 두 개라도 모자를 만치 몹시 분주하단 핑계로 - 윗선에 보고하지 않은 것이,

    이제 와서 뼈저리게 후회되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2차로 마련된 응접실 술자리에서

    저마다 취기가 돌아 흥겹게 이야기꽃을 피우며 양주잔을 돌리고 있는, 지수의 아버지와 그 형제들.

     


    안방에서는, 그들의 부인들이 따로이 모여

    맥주 파티를 위한 한상을 거하게 차려놓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위태롭게 유지하는 가운데

    자질구레한 잡담들이 활발히 뛰놀고 있다.


    지수의 할아버지가 식사만 마치고 댁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인지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린 마나님들은

    싱거운 맥주를 숭늉 들이키 듯하였고, 상 위에 안주감이 푸짐한데도 굳이,

    할아버지와의 나이 차가 50년이나 되는 패션모델 출신 새 할머니를 안주 삼아 씹어댔다.

     

    명예 회장의 권세만 믿고 눈 앞에 보이는 것 없이 (싸가지 없이) 까부는 그녀를 앞다투어 헐뜯고 성토하였으며,

    언제 날 잡아 눈물이 쏙 빠지도록 못된 버릇 고쳐줄 것을 어머니한테 강력히 요구하기도 하였다.

     


    웬만큼 분위기가 무르익어가자, 투실투실한 사모님들은

    텔레비전 보느라 정신없는 지수의 조카들을 불러와 - 명절 특집 S.F. 영화 때문에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 - 녀석들에게

    노래를 시키면서, 서로 누구 애가 잘 부른다고 우겨대는 둥 난리 블루스를 추었다.


    손주들의 재롱에 한껏 흥이 오른 어머니가 유모를 불러 지수를 데려오라고 하였으나,

    그즈음 파란만장(?)한 "모험"을 하고 있을 그가 집에 있을 리 만무했다.

     


    유모로부터 대충 자초지종을 들은 어머니는 주방으로 자리를 옮겨 그녀를 닦달하기 시작하였다.

     

     

     

     

     

     


    친구네 집에서 저녁도 먹고 좀 놀다 온다기에..

     

     


    아니 그래도 그렇지, 지수가 언제 밤 9시 넘어서까지 밖으로 돌아다닌 적 있습디까? 
    전화가 왔으면 나를 먼저 바꿔 줘야잖아요!

     

    더구나 돈까지 들고 나갔으면..

     

     


    도련님이 사모님께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바람에..

     

    사모님도 손수 저녁 준비 하시느라 무척 바쁘시고 해서..

     

     


    허어! 그게 유모로서 할 소리예요?!

     

    마 군이 없으니 당장 이렇게 표가 나는구먼.. 그렇다고 일 년에 한 번 보내는 명절 휴가를 없앨 수도 없고 참..

     

    김기사 얘는 그때 뭐 하고 있었어?

    마 군 없을 땐 마 군 몫까지 해야 한다고 그리 강조했건마는..

    이기사는 어디 저런 덜떨어진 애를 후임으로 소개한 거야!?

     

     

     

    마침 떨어진 식자재가 있어서 구해 오라고 제가 급히 심부름을 시키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사모님.. 김기사 불러올까요?

     

     

     

    됐고!

    일이 만원도 아니고 십만 원씩이나 가지고 갔는데, 어디에 쓸 건지 묻지도 않았단 말입니까?

     

     


    당연히 물었죠. 여러 번 물어보았지만 바쁘다고 워낙 급히 뛰어가 버려서요..
    금방 올 테니 걱정 말라고 했으니까, 별일 없을 거예요, 그만 염려 놓으세요, 사모님.

     

     


    원.. 유모가 돼서 어쩜 저리 무심할까..

    애가 생전 안 하던 짓을 하면 걱정이 돼서라도 나한테 제일 먼저 보고를 했어야지!

     

     

     

    정말 죄송해요, 변명인 줄은 알지만 시간마다 손님상 준비하느라 아줌마랑 둘이 너무 정신없었습니다.

     

     

     

    말이나 못하면..

     

    찾아왔다던 그 친구들, 이름하고 전화번호는 받아 놓았겠죠?

     

     


    ...............

     

     

     

    유모!!

     

     

     

     


    평소엔 너그럽다가도, 당신의 사리 판단에 어긋나고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이 발생하면

    잘잘못을 가리기가 대쪽 같고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어머니였다.


    그런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유모가 자신의 섣부른 대처를 뒤늦게 후회하고

    거짓이 통하지 않는 사모님께 숨겨진 사실을 낱낱이 직고하여 후환을 조금이나마 줄이려 하였으나,

    상황은 점점 그녀에게 불리한 쪽으로만 치닫고 있었다.

     

     

     

     


    왜 대답이 없어요?

    설마, 모른다는 건 아니겠지?!

     

     

     

    저, 그게..

    사모님, 정말 죄송해요. 미처 거기까지 생각을..

     

     


    뭐예요!? 기가 막혀서..

    만일 지수한테 무슨 일 생기면, 그땐 각오해요!!

     

    그러고 서있지 말고 경찰에 우선 신고라도 해 두세요!

     

     


    아.. 네에, 사모님.

     

     

     


    '얌전한 애가 그간 안 하던 짓을 하네?

    오늘 같은 날, 친척들도 다 와 있는데 어떻게 친구 집에 갈 생각을 한담?


    그나저나 정말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입술에  축축한 것이 자꾸 닿는 느낌이다.

     

     


    일본 도깨비처럼 머리에 뿔이 나고 송곳니가 뾰족한 무시무시한 모습의 민호가 커다란 바가지를 들고,

    달아나는 지수를 쫓아온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식은땀이 삐질삐질 흐르는데도, 그의 발놀림은 체인 빠진 자전거의 페달처럼 겉돌기만 할 뿐

    괴물 민호와의 간격은 점차 좁혀지기 시작한다.


    목덜미를 붙잡은 털투성이 손이 너무 차가워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핏발 선 붉은 눈에서 빛을 발하는 그 흉측한 도깨비가, 지수를 아기처럼 가슴에 품더니

    들고 온 바가지를 그의 입에 들이댄다.

    (이상하게도 민호의 가슴이 여자의 그것처럼 부풀어 있다)


    흥부전에 등장하는 보물 바가지만큼이나 커다란 그것 안에는, 오래 묵힌 오줌 같은 (누리끼리하고 지저분한 거품이 부글부글 일어나는) 맥주가 비릿한 악취를 풍기며 담겨 있다.


    싫다고 도리질을 해대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거친 도깨비의 품은 더욱 억세게 조여와 그는 이제 옴짝달싹할 수가 없다.


    꼼짝없이 도깨비가 주는 대로 지린내 나는 맥주를 마실 수밖에 없는 지수는
    수영장처럼 넓은 바가지 속에 빠져 허우적거려야 했다.


    마치 그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수십 마리의 돌고래가 일제히 맥주 거품 속에서 튀어 오른다.


    눈 코 입이 없고 오돌토돌한 돌기가 전신에 돋아나 있는 돌고래 비슷한 징그러운 것들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며 지수에게로 달려든다.

    불그스름하고 미끈거리는 괴생명체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렇다!

    그것들은 돌고래가 아니라 제각기 살아 움직이는 혓바닥들이다.


    노란 액체를 코와 입으로 쉴 새 없이 들이켜며 죽기 살기로 헤엄치는 그에게

    가장 크고 혐오스럽게 생긴 혓바닥이 돌진해 온다.
    그리고, 녹초가 되어 늘어진 그를 다리에서부터 칭칭 감아 올라오더니

    방울뱀 꼬리 같은 혀끝에 축축한 침을 묻혀 그의 입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한다.


    기다란 혀를 따라 흐르다가 그 끝에 모아져 소용돌이치는 (끈적한 점액질 같은) 침이 지수의 목구멍으로 넘어온다.

    너무 역겹고 소름 끼쳐 비명을 지르려 해도 목구멍을 막고 있는 그 괴물 혀 때문에 쉽지가 않다.

     

     


    `이건 틀림없이 꿈이야. 현실이 이렇게 무섭고 처참할 순 없어.


    어서 깨어나야 해! 눈을 떠, 지수야! 어서 눈을 떠!!'

     

     

     

     


    꿈속의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수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안전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진짜 현실로 돌아왔다.

    아니, 돌아오겠다는 의지를 실어 바윗덩이가 짓누르고 있는 듯한 눈꺼풀을 반이나 들어 올렸을까.

    그런데..


    그로테스크한 꿈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괴기스러운 현실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적갈색의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이 지수의 얼굴을 온통 뒤덮고 있었으며

    바로 눈앞에서는 사람의 얼굴 비슷한 것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불과 1, 2센티의 거리였던 것 같다.

     

    그의 안경은 벗겨진 상태인 데다 얼굴에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어

    허옇고 흐릿한 형체를 식별하기란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것의 입술로 추측되는 뭉클한 느낌이 입 언저리를 포위하였다고 직감한 순간, 꿈속의 기분 나쁜 경험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처럼 그의 목구멍으론 미지근한 액체가 조금씩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공포가 껴안고 있는 현실"을 (가위눌린 것 같은 상황을) 더 견디지 못하고

    지수는 의식의 끄트머리에서 조로한 용기를 힘겹게 끄집어내었다.

    자신을 품 안에 보듬고 있던 도깨비(?)에게 바위라도 밀쳐낼 괴력(?)을 발휘하여 대항한 것이다.


    한데, 헤비급 프로레슬러를 연상시키던 거구의 도깨비가

    의외로 쉽게 나가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이 역시 꿈이라서 이러한 역전이 가능한 것일까.'

     

     


    꿈과 현실의 경계로부터 날아드는 혼란스러움이

    구역질 나는 액체를 콧구멍으로 역류시켜, 지수는 심하게 기침을 하였다.

     

    자신의 내장을 부식시키는 두려움의 찌꺼기를 남김없이 뱉어내려는지

    그의 기침은 소금 뿌린 미꾸라지처럼 요동쳤다. 그로 인해,

    지근거리던 두통이 더욱 기승을 부렸고 비위 약한 위장은 또 한 번 뒤집어질 준비를 완료하였다.

     

     

     

     

     


    뭐 이런 그지 같은 새끼가 다 있어!?

     

    간만에 착한 일 좀 해서 하나님한테 잘 보일랬더니..
    천당행 티켓 구하기도 전에 지옥 갈 뻔했네, 아이고 머리야!

     

     

     


    불그죽죽하니 염색한 파마머리를 산발하고, 일본 가부키 여주인공이 "동생 어디 갔었어?" 할 만큼

    두껍게 덮어쓴 파운데이션과 찰리 채플린을 보는 것 같은 희한한 눈화장 및 방금 쥐 잡아먹은 듯한 빨간 입술로

    나이를 삼켜버린 여자였다.


    입술 색깔과 동일한 브래지어와 팬티만 걸친 채

    지수네 개집만 한 (거인 코딱지만 한) 좁아터진 방구석에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나뒹구는 깡마른 여자.


    그녀가

    지수에게 일격을 당한 바로 그 도깨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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