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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객기상준 이야기/이상한 사랑 2023. 5. 8.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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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 차원의 "매출 목표 수정안"에 부화뇌동하여, 고객이 (사장이?) 요구하는 과제의 빠짐없는 완수를 위해목표치 초과 달성에 자만하지 않는 활기찬 도전 정신의 재무장과 분발을 팀장이 새삼 촉구한 가운데,
그의 고압적 격려를 수용한 사원들은
그간 왠지 비능률적인 업무 태도를 고수하기라도 한 것 같은 자발적 집단 최면에 종속되어
자신들의 노고를 스스로 평가절하하는 당치 않은 겸손에 도취한 채
실속 없는 긴장을 움켜 쥐고
아침부터 이리저리 바쁘게들 움직여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날따라 치하를 명분으로 고위급 경영진들은 줄줄이 시찰을 나왔고, 중간 관리자급 나리들은그들의 눈치를 보느라 (적어도 그날 하루 만은) 여기저기 애면글면 작업 현장을 기웃거리거나
직속 사원들을 달달 볶아대는 데 여념이 없었다.
팀장 이하 중간 관리자들이야말로, 그간의 비효율적 관리 체계와 그것을 근간으로 한 미숙한 관리 능력을 가장하기 위해 과도한 페이퍼 워킹(PAPER-WORKING)을 통해 급조된 난립하는 마스터플랜들로부실한 과거를 합리화하는 동시에,
현 실정을 도외시한 "점수 따기 식" 무리한 계획과 목표를 양산하면서
종이 위의 장밋빛 미래와 삐까뻔쩍한 계발 이데올로기에 여러 차례 금테를 두르는,
회의를 위한 회의를 즐기고들 있었다.
일관성 없고 상충되는 업무 부스러기들에 치어 이래저래 마음고생 몸 고생에 시달리며정작 일다운 일 한 번 못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일반 사무직원들 중에서도,
올해 간신히 대리 계급장에 턱걸이 한 상준은
특유의 실속 없는 (무늬만) 완벽주의적 습벽으로 인해 남들의 두세 배는 됨직한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했다.
별다른 욕심 없이 비교적 전문적인 업무를 그날그날 맡겨진 만큼만 규칙적으로 수행하고여가를 가능한 확보하여 사랑하는 사람과의 아기자기한 시간을 마음껏 향유코자 한
순진하고도 소박한 그의 꿈이 (게으름이 꾸며낸 환상이)
정식 입사하던 날부터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 이후
현재까지, 그로선 어찌 보면 잘도 버텨 온 나날들이었다.
자존심과 게으름이 발버둥 치며 차지하려고 애쓴 알량한 "그만의 몫"이 (정녕, 넘보아선 안 될 파렴치한 욕심이었던가..) 무딜 대로 무딘 "현실감각과 융통성"의 당연한 결말인 스스로 자초한 과중한 업무량 때문에딛고 설 여지를 자꾸만 잃어가자, 이로 인한 짜증과 울화는 자기를 합리화할 핑곗거리를 찾게 되었고
외부의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구태의연한 부조리에 굳이 눈길을 돌려
날이 선 비판의식의 외피를 뒤집어쓴 과도한 신경질을 발산하기에 이르렀다.
다른 동료나 선배들은 그저 술자리에서 혹은 직접적으로 감정이 타격을 입었을 경우에 한해눈치껏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또 기분 좋은 때가 가끔 생기면 그것을 계기로 삼아
언제 우울했었냐는 식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로 선회하는 한편
주기적인 회식이 선사하는 주색 향연의 도움을 받아 만성적 스트레스의 찌꺼기마저 말끔히 해소해 버리는
명쾌하고 단순한 유연성을 발휘하는 데 반해,
여러모로 근본주의적 기질이 농후한 상준은가벼이 지나칠 수 있는 적당한(?) 부조리나 불합리에도 괜스레 민감하게 반응하여
그것의 근원을 파고들며 심각하게 고민하고,
창자 가득 묵은똥을 담고 있는 만성 변비 환자의 누리끼리한 안색처럼
언제나 꿍하게 안면 가득 불쾌감을 머금은
그래서 "상사에게 알아서 기는 활달한 순발력"이 생기려야 생길 수 없는
우울 증세에 깊이 빠져 있으니,
직장생활이 원만히 이루어질 리 만무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윗사람의 눈 밖에 나기가 일쑤였으며, 그때그때 불만을 호소하여 애로 사항을 개선해 갈 용기는 부족한 주제에쌓이고 쌓여 목에까지 차오른 울화가 엉뚱한 방향으로 터져나와 상관을 난처한 지경에 빠뜨리는 상황이 연출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바로 이날, 그러한 일이 또 일어나고 말았으니..
상준이 "본사 경영진 보고" 자리에 배석하였을 때의 일이다.
다른 동료들과 달리 하필 그날따라 적절한 자료를 구비하지 못한 그는경영자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은 하지 못 하고 당황하여 얼굴만 벌겋게 물들이고 있었는데,
품질관리 팀장이 적절히 나서서 큰 무리 없이 위기를 해소하게 된 것이다.
그 일로 인해 팀장은 이사들로부터 한 소릴 들어야 했고, 상준의 운명 또한 명약관화.
입사 5년차 중고참 사원이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헤맨다며 팀장으로부터 동네북처럼 신나게 깨진 그는그나마 쌀알만큼 가지고 있던 "업무에 대한 의욕"마저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퇴근 무렵,큰 일 치르고 나면 늘 그러했듯 팀장은 사원들과의 단합을 위한 조촐한(?) 자리를 공장 비용으로 예약하고
십여 명의 직속 사원들에게 생색을 내가며 참석을 명령하였다.
특히 상준에겐 직접 다가가 꼭 참석할 것을 지시하였는데, 이는틈만 나면 "퇴근 후 가볍게(?) 한 잔"을 실행에 옮기는 술꾼 팀장이 주도하는 빈번한 술자리에
상습적으로 불참하는 주범이라 손수 구속시켜야겠다는 일상적 의지 표명임은 물론
이날의 불미스럽던 일을 툴툴 털어 버리고 아울러 그가 받은 마음의 상처를 나름대로 위로해 주기 위한
뒤끝 없는 팀장의 통 큰 배려가 묻어난 행동이기도 하였다.
(그에게만 인색하던 배려가 웬일로 그날 발휘되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지만..)
일차 삼겹살 소주 파티로 간단히 식도를 마사지하고, 이차는단골로 찾아가는 룸살롱행이었다.
부하를 이끄는 장군인 양 의기양양한 팀장을 필두로 거나하게 취해 비틀거리며 들어서는여섯 명의 졸개들 앞에 (늘 그렇듯 여사원들은 남자들만의 광란의 코스를 위하여 알아서 일차에서 빠져 줌)
날고기를 보고 침 흘리는 승냥이 떼처럼 마담 휘하 여러 명의 호스티스들이 우르르 몰려와
가식적인 눈웃음과 입에 발린 조잘거림으로 매달리며 먹잇감의 옷소매를 하나씩 잡고 늘어졌다.
팀장이 먼저,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마담의 호리호리한 허리를 껴안고 볼에 가벼운 뽀뽀를 하며 분위기를 돋운다.
마담, 그동안 잘 있었지? 나 보고 싶어서 어떻게 지냈어?
김 사장님 안 오시나 목이 빠지는 줄 알았어요, 호호..
가라오케 시설이 갖추어진 큼직한 룸으로 안내된 일행은화장으로 떡칠한 세 명의 이른바 영계들에게 술 시중을 받으며 - 물 탄 양주를 소주처럼 들이켜면서 - 흥에 겨워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
상준 역시 잔뜩 취해서 옆에 앉은 어린 호스티스의 허벅지를 더듬다가가라오케 앞에서 한창 벌어지고 있는 블루스 잔치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이마에 넥타이를 묶고 이 양의 통통한 엉덩이를 주무르며 블루스 삼매경에 빠진 왕고참 대리 정대리를어깨로 힘껏 밀쳐 낸 상준은, 웃통을 벗어젖힌 채 이 양의 몸에 자신의 몸을 밀착시켰다.
키 작은 이 양의 얼굴이 그의 가슴에 눌렸다.
주변의 환호성에 고무된 그녀가 상준의 가슴에 연달아 입을 맞추며 빨간 루주 자국을 한다발 안겨 주었다.꼴사납다는 표정으로 그 모양을 쳐다보던 팀장이 소리 질러 그를 부른다.
야 야, 전상준!이리 와 자리에 앉아라. 내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좋은 얘기 해줄 테니..
들은 척도 않고 계집아이를 껴안아 빙글빙글 돌리는 상준을옆에서 보다 못한 정대리가 잡아끌어 팀장 맞은편에 앉혔다.
젊고 예쁜 와이프가 밤마다 따끈따끈한 서비스를 해줄 텐데, 뭐 그렇게 외간 여자한테 껄떡거리나.
결혼 생활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
거, 말조심하십쇼. 부하 직원이라고 말 함부로 해도 된다는 법 있습니까?
팀장을 꼬나보며 제법 거칠게 내뱉자, 옆에 앉아 있던 민과장이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냅다 갈겼다.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팀장님께 무슨 말버릇이 그래!?
그놈의 눈물나는 과잉 충성, 꼭 술자리에서까지 자랑해야겠소? 정말, 역겨워 못 봐 주겠군..
그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이죽대자 평소 힘깨나 쓰는 근육질의 민과장이 주먹 쥔 손을 들어 올린다.민과장 옆에 붙어 있던 손 양이, 공중에서 잠시 멈춰 있는 그의 팔을 잽싸게 잡아 내려 자신의 빈약한 가슴께로 당겼다.
아저씨들, 애들같이 왜 이래요? 분위기 망치지 말고 우리 즐겁게 놀자고요.
그러고는 신속한 동작으로 민과장의 비어 있는 잔에 술을 따라 그의 코앞에 갖다 대는 그녀였다.
그것을 빼앗듯 낚아챈 그는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상준의 얼굴에 철썩 소리가 나도록 술을 뿌렸다.
건방진 자식, 너만 취한 줄 알아? 감히 누구 앞에서 꼬장이야!?
어허 왜들 이러나.민과장도 이제 그만 하소. 내 농담이 좀 지나쳤던 게지.
그랬다면 내 사과하지, 전상준 씨.
팀장의 무마로 험악한 분위기는 더 진전되지 않고 일단락되었다.
머리를 숙인 채 어금니를 물고 있는 상준의 젖은 뺨에 부드러운 헝겊의 감촉이 전해진 건, 바로 이때였다.고개 돌려 옆을 바라보니, 이 주점에선 처음 보는 아가씨가
얌전한 자세로 앉아 차분한 손놀림으로 그의 얼굴에 묻은 술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를 보며 살며시 미소 짓는 그녀의 앳된 얼굴을 본 순간, 상준은 심장이 일순 멈추는 듯한 놀라움에 머리털이 곤두섰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 분명한데, 어디서 보았을까..'
녀석, 꼴에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화가 누그러진 민과장의 놀리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상준은 맞은편 팀장 옆에 앉은 이 양에게 물었다.
얜, 누구야?
아, 얘는 말이죠.옆방 손님이 박 양을 애타게 찾길래 박 양 대신 임시로 들어온 대타예요.
오늘부터 아르바이트로 일하게 된 진 양인데요, 아직 생초짜라 좀 서툴러도 이해해 주세요.
얘, 뭐 해? 손님들께 인사 안 드리고..
반짝이가 붙은 야들야들한 탱크탑에 초미니 주름치마를 입은 (키는 작지만 볼륨 있는 몸매의) 그녀가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사람들 앞에 꾸벅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진민아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자기소개를 마친 그녀를 그냥 내버려 둘 리 없는 사내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든다.
목소리 봐라, 관등성명 똑바로 못 대지!?
민아라고? 그거 본명이니, 가명이니?
야 야, 박 양 불러, 박 양. 쟨 엄마젖 좀 더 먹고 오라 그러고..대체 어떤 새끼야? 내 애인 박 양을 감히 가로채 가는 놈이..
마담 불러! 이거 이래도 되는 거야?!
혼자 신나 너스레를 떠는 정대리의 삐뚤어진 안경을 고쳐 주면서 손 양이 귀에 대고 속삭인다.
진 양이 우리들보다 더 언닌데요?이 바닥에 언니가 어딨어? 미숙한 초짜면 다 애송이지.
이쪽저쪽에서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동안 살그머니 자리에 앉고 마는 민아를상준은 눈을 떼지 않고 유심히 주시하였다.
피부 위로 들떠 미처 안정되지 않은 짙은 화장 아래 그다지 예쁘지 않은 밋밋한 얼굴이 숨어 있었는데
두터운 파운데이션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첫날의 난감함"이 갸름한 턱선의 떨림과 조심스레 공명하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관심이 시간을 멈추게 하여 상준의 눈에 잠시 생기가 돌았으나,어디든 끼어야 직성이 풀리는 팀장의 껄끄러운 목소리가 아니나 다를까
그의 혼자 즐기고 싶은 상념을 여지없이 흩트려, 무거운 시간은 다시 굴러가게 되었다.
별 흥미도 없었고 천착할 자신은 더더욱 없었던 어렵기만한 전공의 학사 과정을 억지로 마치고인생의 뚜렷한 비전도 없이 남들 따라가듯 그렇게 들어간 직장이었다.
처음엔막부 시대를 연상케 하는 권위 메커니즘과 그것을 윤활하는 파벌주의 등에 숨 막혔고,
겨우 적응하여 익숙해질 무렵에는 이른바 기업 문화의 이중성에 넌덜머리가 났다.
갖가지 오류와 딜레마를 먹고 "빛바랜 이상과 합리"를 적당히 토해내어
올바른 척 정의로운 척하며 영원히 이윤을 추구하려 하는
영악한 공룡의 당당한 포효가 메스꺼웠다.
이러한 상준을 불쌍히(?) 여기는 어르신들이 늘상 하는 얘기가, 팀장의 입에서도 잊을만하면 기어 나오곤 하였다.
자넨 도대체 나이를 뭘로 먹은 건가.장가가서 애까지 딸린 사람이 그런 철없는 넋두리나 늘어놓고 앉았으니.. 쯧쯧..
누군 생각이 없어서 자네 같은 불평 안 하는 줄 아나?
비판 속에 안주하는 것도 일종의 자기도피고 직무유기야.불만을 안으로 삭이고 불완전한 현실이지만 거기에 맞추어 노력할 줄 아는 것도, 능력이네.
여기 있는 자네 선배들을 봐.자네 눈엔 그들의 허술한 점밖에 안 보이겠지만, 다들 알차게 자기 몫을 다 하고 있지 않는가 말이야.
이 사람들에게도 다 자네 같은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자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하게 알고들 있을 거야.
그러니 애로사항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이런 자릴 빌려 도움 주십사 부탁도 해 보고 뭐 그런 맛이 있어야지, 사람 참..
재미없고 뚱하기는..
압니다, 잘 안다고요.어르신네들이 겉으론 미덥지 못하고 허허실실 얼렁뚱땅해 보여도
축적된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이 망할 사회를 어찌나 잘 이끌어 가시는지..
멀리 갈 것 없이, 날 먹여 살리는 (눈물 나게 고마운) 우리네 공장돌아가는 모습만 봐도 이것은 자명한 사실 아닙니까.
푸훗, 정말 기적 같은 일이죠. 덕분에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