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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골목을 거니는 고독 2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3. 4. 5. 15:50
노를 저어 호수를 건너면,
고성(古城)의 지붕에 걸터앉아 나그네의 갈증을 잡아끄는
부푼 유방이 보입니다.
숨바꼭질하는 소녀들이 숨어든 첨탑에서
팽팽한 탄식(嘆息)이 내려옵니다.
불안한 사랑이
주름 펴는 넋두리에 잠시 눈멀어도,
나그네는 마냥 좋기만 합니다.
짝을 찾아 방황하는 어여쁜 이여.
눈을 감으면,
몰래 뒷맵시를 살피는 애절함이 보이지 않습니까.수려한 "한 평"을 여행하는 미끈한 구두여.
상식을 돌아 명승지를 비켜 가는
나들이도 있답니다.
한 평을 수호하는 사랑이어야 포옹을 결심하는 이여.
한 평 너머 아득히,
남자도 여자도 아닌 뒷맵시를 살피려고 밀려 오는
잔잔함이 있습니다.
더없이 다정하게 그대를 밀어내는 잔잔함입니다.
도둑맞은 자전거를 찾아 아버지와 아들이 방황하는,
지독한 현실의 골목이 있습니다.
그 골목은 언제나, 낡은 흑백입니다.
자전거 도둑들이 활보하는 환상적인 천연색 거리가 있습니다.
천연색 거리의 구석진 모퉁이에 숨어 있는 천연색 방이
울고 싶을 때마다,
천연색은 흑백을 초대합니다.
코 고는 큰길 옆에서 눈시울 적시는 작은 길이,
울먹이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담담하게 걷는 아들의
골목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들의 골목도 천연색임을 확인합니다.자전거를 잃은 절망과 천연색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색하여, 흐르던 눈물도 멎습니다.
이번에는,
어린 아들의 착잡함을 잡고 울음을 터뜨리며 힘없이 걷는
아버지의 골목이
흑백을 찢고 들어와 천연색 방을 다시 울립니다.
부옇게 번지는 무채색의 뭉툭한 외로움이
날카로운 천연색을 박박 긁어대면,
울고 싶은 방은 시원한 아픔에 흐느낍니다.
선명한 천연색의 벗겨진 생채기에서
흐릿한 흑백이 흘러내립니다.
굴욕으로 범벅된 골목을 빠져나올 때마다
절망하는 흑백은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가고,
천연색 방은 애잔한 여운이 남아
한동안 흑백의 방이 됩니다.
죽고 싶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들어오는 슬픈 아들의
집이 됩니다.
깨어나기 싫은 피곤을 아무 데나 누일 수 있는,
나만의 소중하고 초라한 흑백영화가 됩니다..
세련된 액자 속 은혜가 섬세하게 똬리를 틀어,
어려운 창공을 간신히 감싸고 있다.
그 난해한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니
머리를 적시어도 사람들이 모르지.
그러나 사람 이외의 모든 것들은 알고 있다.
밀림에 쏟아지는 비가 이파리를 때리는 만큼
나무들은 저마다 목청을 높인다.
바다에 쏟아지는 비가 바닷물과 섞이는 만큼
파도는 높아간다.
사람에게서 독립한 꿈들은
조용한 지붕을 두드리는 소란에 맞추어
두꺼운 상념을 벗고 탭 댄스를 춘다.
바다가 마음 놓고 저항하는 비.
밀림이 제멋대로 반항하는 비.
꿈이 놀아달라 졸라대는 비.
"흥분한 은총이 같은 음으로 연주하는" 도시를 분주히 누비다가
구정물이 다 되어 나의 골목까지 찾아드는,
귀신같은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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