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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봄을 거니는 고독상념 소용돌이 (상준 외전) 2023. 3. 30. 14:32
차창을 통해, 뒤로 가는 세상을 봅니다.
겨울과 봄이 싸우는 오후의
서슬 퍼런 바람이
칼춤을 추며 출렁이는군요.
풍경은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나는 스치어 갈 뿐이니까요.
차창 안의 공중부양한 자비들이
모호한 미소를 점잖게 아래로 던지면,땅 딛고 서 있는 사람들은
못 본 척 외면하고 표정 없이 찡그립니다.
겨울 낮의 의기양양한 바람이기진한 봄볕을 안고 춤추며 흘러가는
거리에서
정류장을 몽유하는 내 쓴웃음 한 컷에도
불현듯 뒤돌아 함께 웃어 주는,
소녀가 다 있네요.
착각이어도 좋아요.
소녀의 슬리퍼 속
언 듯한 맨발이 동동거리며 밟고 선 땅에서,
때 이른 아지랑이가
그녀의 발그레한 미소처럼 피어오릅니다.
꼭 있어야 할 풍경이었습니다.
결국은 봄이 오는 이유를,
스치어 갈 뿐인 내가
고개 돌려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습니다.
마른 모래 위로 치매 앓는 햇살이 기어 다닌다.
자폐를 즐기는 시이소가,
구석에 쪼그리고 아이들을 훔쳐본다.
명랑한 엄마의 추파는 먼지를 일으키며
아이의 발에 족쇄를 채운다.
뭉툭한 기억이
미끄럼틀을 기어오르다 미끄러져
축축하게 흘러내린다.
날기 싫은 비둘기가 찬양하는
포플러 꼭대기에서
비발디의 발랄한 봄들이 하나씩 날아와
아이들을 차례차례 자빠트린다.
그러고는,
겁먹은 옛날의 봄이 아이의 가슴을 타고 앉아
조로(早老)한 깔깔거림을 강요한다.
끓는 유혹을 깔고 앉아 뭉개는
장터 아낙의 부지런한 궁둥이에서
범접 못할 안도(安堵)가 흐릅니다.
훈훈한 고민이 풍기어 옵니다.
평상에서 장기 두는 노인네의
굽은 등에 기대어
젊은 심장은 부지런한 박동을 편안히 눕힙니다.
너그러운 그네에 걸터앉아
고목의 땀이 스미었을 특유의 흙냄새를 맡아봅니다.
스치어 갔을 수많은 영혼들의 발냄새를.
언제나 그들 뒤에 있으렵니다.그들의 앞은 착취될 수 없는 것.
누구도 앞에는 없고 뒤에만 있는 곳에서
경치는 굼뜰수록 좋습니다.
다리 긴 남정네의 질주는 필요치 않습니다.
보리밭에 뿌리어진 구수한 잔상이
다시 안 올 바람에 실린 채
마을 어귀에 잠시 머물며 다소곳이 묵례를 합니다.
그리고
동구 밖을 점령한 아까시 뿌리들에 미련 없이 배어 듭니다.
오솔길을 걷던 할아버지, 들꽃 한 송이 꺾어 할머니께 바쳤다오.대로(大路) 변에 차를 세운 아버지, 한 다발 꽃을 사 어머니께 바쳤다오.
꽃집을 마련한 삼촌과 결혼한 숙모.
꽃씨를 뿌리는 농장주의 아이를 가진 형수.
아지랑이 뚫고 전진하는 홀씨들의 기세에 눌려경솔하게 움이 트는 나,
당신의 허락 없이 당신을 애도하며
하얗게 핀 눈물로 만개한다오.
오늘의 햇살에 어제의 햇살이 섞여 내려온다.아침의 평온한 햇살은,
어제의 햇살이 치근대며 어리광을 부려도
귀찮아하지 않는다.
오늘의 햇살에 내일의 햇살이 섞여 내려온다.봄날의 아늑한 햇살은,
내일의 햇살이 파고들어 희롱을 해도
당황하지 않는다.
어제와 내일의 햇살이 서로 먼저 나오려고구름 속에서 분주히 몸싸움을 하는 동안,
오늘의 햇살은 달콤한 최면 마다하고
한가한 아침을 공들여 쏟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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