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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변심
    지수 이야기/이상한 사춘기 2023. 1. 12. 18:37

     

     

     

     

     

     

     

     

     

     

     

     

     

     


    9반 여학생들의 그칠 줄 모르는 소란스러움이 1층 교무실을 주기적으로 침투하여,

    참견하기 좋아하는 깐깐한 교감선생님으로 하여금 비대한 살집을 출렁이며 손수 삼층까지 뛰어오르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의 자리 바로 옆에 위치한 교장실에서 한소리 나올까 싶어 지레 겁을 잡숫고 알아서 기시는

    행동파 교감의 거의 본능적이고 무조건 반사적인 대응 방식에

    익숙할 대로 익숙해져 있는 교무부장 선생님이,

    재바른 동작으로 그의 뒤를 따라잡아 앞장서서 성큼성큼 계단을 오른다.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머리털을 휘날리며 헐레벌떡 사건(?) 장소에 도착한 교감.

     


    복도 벽에 기댄 채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저희끼리 신나게 잡담을 늘어놓고 있던 "빤스 동자"들이,

    난데없이 나타난 호랑이 터줏대감을 보고 기겁하며, 내렸던 손을 번쩍 올리고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들이 꾸밀 수 있는 최고로 숙연하고 차량 맞은 반성의 자세를 연출하며 머리를 내리깔고 있는 발가숭이들을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교감과 교무부장의

    벌려진 입이 한동안 다물 생각을 않는다.

     

     

     


    정 현희 선생!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요?!

     

     


    두 양반이 9반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겨우 상봉하려던 (혈색 좋은) 아래위 입술들이

    아직 때가 안 되었다며 남북으로 거듭 헤어지고 만다.

     

       


    `참 일찍도 나타나시는군.'

     

     


    교실 뒤 구석에서 - 우리에 갇힌 원숭이들처럼 - 여학생들의 구경거리가 되어 떨고 있는 세 명의 희생양(?)들을

    교무부장이 복도로 내모는 가운데, 교감은 잠자코 가사선생님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있었다.


    이번엔, 굳게 닫힌 그의 입술이

    결연한 의지라도 띠는 양 떨어질 줄을 모른다.

     

     

     

     

     

     

     

     

     

     

     

     

     

     

     

     

     

    결국 이 일로, 담임은 교감에게 불려 가 주의를 받게 된다.


    아이들에게 수치심을 자극하는 방법으로 기합을 준 점 때문이 아니라,

    단지 타학급 수업을 방해했고 여학생들에게 혐오감을 주었다는 명목으로,

    담임은 어른들의 반성문이라 할 수 있는 경위서까지 쓰게 된 것이다.

     

     


    `우리들을 소중한 인격체로 대하였다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겠는가.
    개 돼지 다루듯 몽둥이로 후려 패는 걸로도 모자라, 아이들의 연약한 가슴에

    그들의 아직은 깨끗한 내면에 거리낌없이 치욕의 인두질을 해대고 지워지지 않는 징그러운 상처를 남겼으니,

    이런 고약한 새디스트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뭐 이런 식의 절통한 심정으로, 지수는 "누드 페스티벌(?)" 이후 며칠간 우울 증세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그를 제외한 다른 급우들의 견해는 (일일이 묻지는 않았으나) 그와 사뭇 달랐다.

    사춘기의 정서적 부작용(?)이 아직 발화하지 않은 열 서너 살의 천진한 소년들답게

    그들은 그날의 해프닝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들이 잘못했기에 응당 받아야 하는 벌로써 - 좀 낯설고 특이한 형태이긴 하지만 - 그런대로 받을만했고,

    또 지나 보니 꽤 스릴 있었던 모험인 것도 같고,

    계집애들 놀라는 꼴이 재밌어서 한 번 더 받아 보고 싶은 마음이 은근히 생길 정도라며,

    오히려 단순하고 가볍게들 여기는 눈치였다.


    어느 쪽이 올바른 생각을 하는 것인가는 시간을 두고 고려해 볼 필요가 있겠지만, 분명한 점은

    지수의 경우 나이에 걸맞지 않은 조숙한 심리의 소유자로서 복잡한 상념에 파묻혀 지내는 날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입이 무거워 그렇잖아도 바쁜 부모와는 대화가 단절된 지 오래인 지수의

    가정 상황을 알 길 없는 교감이, 알몸 사건이 있던 다음 날 그를 따로 불러

    침울함에 발목 잡힌 그의 마음을, 평소 모습과는 거리가 먼

    (다분히 연출된 듯한) 작위적 다정다감함으로 다독거려 주었다.

     

    이번 일이 만에 하나 지수의 아버지와 이사장에게 알려질 경우 발생할지 모르는

    골치 아픈 후환을 멋대로 상상한 교감이

    체통에 죽고 체통에 사는 교장을 대신하여 체면 구겨지는 행동 대장 노릇을 한 것이다.

     

     

     

     

     


    교감에게 입단속을 다짐하고 교무실을 빠져나오는 지수를

    흘겨보는 담임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지수의 담임을 맡은 이래 삼 개월 동안 유모로부터 벌써 서너 차례나 봉투를 받아 챙겼고 (물론 지수는 모르게, 그의 어머니가 지시한 것임) 지난 삼월 중순경에는, 지수 아버지의 비서실장이 마련한 (이사장 이하 덕망학원의 전체 교사진들이 모두 초대받은) 연회는 물론이거니와 담임이라는 특별 자격으로 별도의 호사스러운 향응까지 대접받은 처지였기에,

    지금까진 여러모로 - 다른 아이들의 눈총을 무시하면서 - 지수를 봐주는 입장에 서 있었던 그였다.


    그런데, (평상시 담임과는 그리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던) 교감이 지수를 직접 챙기는 횟수가

    근래에 들어 부쩍 늘었고, 이로 인해 제자의 눈치까지 보게 생겼다는 자괴감이 새록새록 들던 차에,

    그가 즐겨 애용해 왔던 얼차려이자

    여태껏 상부(?)의 묵인하에 해이해진 아이들의 "정신 개조"用으로 별문제 없이 실행에 옮겨졌던

    "누드 페스티벌"이, 별안간 (여선생의 변덕스러운 히스테리가 한몫을 하긴 하였지만..) 도마 위에 오르게 되고,

    급기야 본인은 시말서를 제출하는 자존심 상하는 조치를 당하게 되면서,

    이러한 사태가 지수와 전적으로 무관하지만은 않다는 (담임답지 않은) 속 좁은 억측과 함께

    그는 지수에 대한 편견의 부호를 (+)에서 (-)로 급격히 선회하기에 이르렀다.


    적당히 비굴한 보통의 다른 선생님이라면, 이럴수록 더욱 지수를 잘 대하여 주고

    필요하다면 그의 눈치까지도 봐 가면서, 현실을 인정하는 약삭빠름으로 난관을 비켜갈 텐데,

    속내를 가늠하기 힘든 포커페이스이자 "공포의 카리스마"인 담임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튀는 바람에,

    지수의 약한 마음은 꽤 오랫동안 번민에 빠져 허덕여야 했다.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똥배짱으로 아이들에게 가하는 폭압의 수위를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자기 위의 권위적인 세력들(교감 이상 학원 경영진들)을 애써 무시하는

    서른세 살 노총각 선생은,

    걸핏하면 삐딱선 타려고 벼르는 것이 무슨 정의를 표방하는 행위라도 된다는 듯 독불장군의 갑옷을 걸치기 일쑤였다.

    빤한 계산속으로 실속은 다 챙기는 구린내 나는 젊음.

    이중성으로 체화된 냉철함의 껍데기뿐인 반골 기질.

    이런 것들만 대표하는 주제에..

     

     


    한마디로 "삐친" 담임에 의해, 얼떨결에 권위 세력과 한 통속이 되어 버린 지수였다.

     

    그를 은근히 무시하고 비꼬는 빈도수도 눈에 띄게 늘어,

    그의 자폐에 가까운 내향성에서부터, 그의 집안이 치부(致富)해 온 떳떳지 못한 역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들먹이는 등의 방식을 동원하면서

    담임은, "간접적이지만 공식적으로" 지수를 빈정대는 데에 재미 붙이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전부터 지수를 괴롭히고 멸시해 오던 아이들의 사기는 어느 때보다 충천하였고,

    독재적인 담임의 막강한 영향력은 결과적으로, 지수가 6반의 대표 "왕따"로 성장(?)함에 있어

    어느 누구보다 크게 이바지하는 역할을 맡은 셈이 되었다.

    엄밀하게는, 그의 시혜(施惠)에 여전히 목말라하는 아이들이 많기에 대놓고 왕따시키는 건 아니고

    범접 못할 "그의 환경"을 시샘한 나머지 은근히 따돌리거나 소극적으로 놀리는 정도에 그치긴 하였지만.

    물론 그깟 눈치 안 보고 적극적으로 괴롭히는 몇몇 녀석들은 제외하고 말이다.

     

     

     

     

    수업 시간에 지목할 때나 그냥 아무 때고 호명하는 경우에도

    지수에 대한 담임의 호칭은 자연스럽게 "미스 나"로 바뀌어 있었다.


    철용이나 민호가 "미스 나"라고 처음 불렀을 때에는, 성 정체성을 함부로 뒤흔들어 능욕을 가하는 두 녀석의 만행에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껴야 했고,

    둘의 선동에 부화뇌동하는 다른 대다수 애들까지 자기들 딴엔 가벼운 장난 삼아 "미스 나! 미스 나!"를 연호할 때면,

    모멸감과 절망조차 막다른 골목으로 몰려야 했다.

    이러한 지수를 향해 이제는, 믿었던 선생님의 입에서마저  "미스 나"가 난발되고 있었으니..

    너무 깊어 도저히 올라오기 힘든 "자포자기의 구덩이"에서 끝없이 허우적거리는 기분이었다.

     


    웬만큼 놀려도 겁 많고 소심한 성격 탓에 - 엄마한테 일러바쳐 - 학교에 분란을 일으키지는 않을 거란 계산이 섰는지,

    담임은 지수를 아예 여자라 단정해 버리고,

    "짓궂은 장난을 가함으로써 성적 쾌감까지 맛보는" 철용이의 기분에 동화라도 된 양,

    소녀(?) 지수를 타깃으로 "미스 나" 미사일을 꾸준히 맹폭하였다.


    아무래도, 그것을 맞아 이글이글 타오르는 지수의 빨간 얼굴과 어찌할 바 모르는 당황하는 몸짓으로부터

    그 또한, 여자를 희롱하는 느낌의 대리만족적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 같았다.

     

     


    "미스 나"라고 불릴 때마다 홍당무가 되어 버리는 지수의 얇은 얼굴 가죽에서 영감(?)을 얻은 담임이

    그에게 "붉은 미스 나"라는 별칭을 덤으로 부여하며 한 술 더 뜨고 나오는, 지경에 도달하자,

    자폭의 위험 수위에 오른 정서적 불안과 절망적 고립감이 파국을 초래하지 못하도록

    지수의 애처로운 "자기 보존" 심리는 자체 조절 메커니즘을 발동하여

    자신의 영적(靈的) 시스템을 자극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감성에 치명타를 가하는) 병원체 "미스 나"에 대항할 항체를 생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 눈물겨운 노력으로 - "미스 나"에 면역된 지수는

    성별과 관련된 모든 놀림, 비웃음, 경멸, 장난들에 대해서 표정 변화 없이 무덤덤한 반응을 보일 수 있게 되었고,

    감정을 전달하는 복잡한 신경망의 일부가 절단된 듯

    교사와 학생들이 연합하여 펼치는 "미스 나" 공세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일종의 최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외부적인 "미스 나" 공격에 항복하고 기꺼이 세뇌되어 그것과 자신의 갈등 구조를 청산한 다음

    "어쩌면 자기 속에 정말로 존재할지 모를 미스 나"를 인정하면서

    그녀(?)와의 화해를 모색하는 수준에까지 시나브로 도달하고 만 것이다.


    "미스 나"와 나 지수가 동일인물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그 누가 "미스 나"라 부르던 "미스 나!" 하면 즉각 고개 들어 그쪽을 바라볼 정도가 되었다고나 할까..


    지수가 사회와의 타협을 처음으로 의식하는 서글픈 순간이었다.

     

     


    이렇게 알아서 긴다고 한들, 악동들의 그에 대한 태도가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들의 완전무결한 장난감으로 지수가 거듭나는 첫 단계이자

    그를 괴롭히는 양상의 새로운 발전(?)이 요구되는 전환기를,  맞이한 것이나 다름없는 녀석들에겐,

    "그에게서 고통을 요구하는" 집요한 욕구에 기운을 실어주고 전의를 북돋아 주는

    계기로 밖에 작용하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지수에게 자신을 지킬 다른 대안은 보이지 않아 이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울며 겨자 먹는 임시방편 격이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지속적인 평온과 영원한 고요를 희구하는 그의 무의식이 우선은 안심할 수 있었다.

    나중의 부작용은 그때 가서 고민해도 늦지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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